★ 일어나 저 강을 건너라 56

R의 졸업식과 J공고 교사 생활 및 나의 병원 생활 뒷바라지

본래 우리 집안은 군대에 가서는 어려운 사정이 생겨도 부모님에게 알리지 않는 전통이 있었다. 전에 형이 군대 생활을 하실때도 연천의 신망리 의무대에 계셨는데 가족이 단 한번도 면회 간 일이 없었다. 나도 병원 생활 하게된 것을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그저 잘 있다고만 편지 하였다..

미군 교환소대장으로 발탁되다. 106 야전병원으로 후송되다.

우리 쌍용부대 담당구역 내에는 대통령이나 모든 외국 국가 원수들이 북한의 상황을 관찰하고자할 때 오시는 S OP(S 관측소)가 소재하고 있었다. 대대장님은 육사 출신의 이동섭 중령이셨다. 대대장님은 영어가 유창하여 우리 대통령이 오실때는 우리말로 브리핑을 하시지만 외국 국가 원..

마지막 뵌 아버지, R과의 엇갈린 면회, 유격훈련과 쌍용부대 전입

5월 초에 장성 전술학교장으로 파견 훈련을 나갔다. 2주동안 보병학교에 오지 않고 전술학교장에서 야외텐트를 치고 숙영하며 훈련하는 과정이었다. 어느날 억수같이 비가 쏜아지는 칠흑같은 밤에 판초우의를 뒤집어 쓰고 대대 공격 방어 전술 교육을 받고 있었다. 너무 비가 쏟아지니 ..

1974년 육군소위임관, 대학졸업, 육군 보병학교 입교와 초등군사반 생활

1974년의 새해가 밝았다. 대학과 학군단의 모든 과정이 끝나고 졸업과 임관식을 기다리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김효신 장로님 댁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졸업에 앞서 2월 20일의 임관식이 먼저 다가왔다. 임관식에 초대할 초대장이 각자 2장씩 나왔다. 가족 또는 여친을 초대하기 위한 티켓..

학군단 2년차 병영훈련, 교생실습, 대학생활 4년의 마감

1973년 3월이 되어 다행히 유신 휴교가 끝나고 대학생활의 마지막 해이며 학군단 2년차 생활을 시작하였다. 1년차 후배들도 들어오니 낡은 사각모에 하얀 세로막대기 네개의 2년차 생도 계급장은 아주 고참스러워 보였다. 바쁜 생활은 변함 없었지만 그래도 R과의 관계가 작년보다 조금 안..

ROTC(학군단) 1년차 병영훈련, 후반기 농촌실습, 10월유신과 포장마차

1972년 여름 방학이 가까운 어느 무더운 일요일에 나는 혼자서 R을 만나러 송학대교회에 찾아갔다. 교회학교 예배가 진행되고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살며시 교회문을 열고 소리없이 뒷자리에 가서 앉았다. 마침 R이 앞에 나가서 이야기를 해주고있는 동화 시간이었다. '묵크의 신발'이라..

ROTC(Reserve Officer's Training Corps, 학생군사교육단) 입단과 제주도 농촌실습

한국은 남북 분단 상황에서 국가 안보의 강화 및 군사력 증진을 위해 1961년부터 미국의 ROTC 제도를 도입했다. 학도군사훈련단(약칭 학훈단)이라는 이름으로 창설된 한국의 ROTC는 그때부터 매년 약 3000명 정도의 후보생을 선발했다. 이 이름은 1972년 학생군사교육단으로 변경되었고, 지금까..

1971년 블루 크리스마스의 쓸쓸한 종소리

방학이 끝나고 9월초 2학기를 시작하며 바빴지만 겨우 시간을 내어 R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에게 다가온 것은 만남의 기쁨이 아닌 헤어짐의 시련이었다. 학교앞에서 만난 R의 표정은 어딘가 어두운 것이었다. 우리는 말도 별로 없이 버스를 타고 을지로 입구로 나갔다. 당시 을지로 입구의 훈목 다방은 서울 시내에 몇 안되는 클래식 다방이었다. 클래식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즐겁게 들리고 원하는 곡을 DJ에게 신청해 들을 수도 있었다. 전에도 같이 가본적이 있지만 그날은 웬지 분위기가 너무나 무거웠다. R은 학업의 부담도 물론 있었지만 나의 마음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부담이 갔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모든 일에 부담을 느끼고 한동안 마음을 쉬고 싶어하는 상태였다. "언제까지 일지 는 모르지만 어떻든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