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어나 저 강을 건너라

임진강은 흐른다. 나의 신임소대장 시절

Billy Soh 雲 響 2020. 2. 27. 22:30

내가 소대장으로 첫 부임한 쌍용부대 1대대 4중대는 임진강변의 중화기 중대로 중대장과 81밀리 박격포 3소대장은 3사관학교 출신이고 기관총 소대인 1, 2소대장은 ROTC 장교인 나와 양희천소위였다. 서로 출신이 달라도 사이가 좋은 조직도 있는데 그때 우리 중대는 미묘하게 파벌이 되어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중대장은 3소대장과 친하니 둘이 잘 어울리고 나는 양소위와 단짝이 되어 석식후 중대 업무 결산만 끝나면 M읍에 나가 한진다방 등에서 차를 마시며 놀곤 하였다.


8월 중순경 사단 교육대에 신임 소대장 교육을 들어갔다. 오랫만에 동기들과 1주일 정도 같이 보내며 교육을 받으니 실무의 스트레스를 떠나 해방감 속에서 즐겁게 교육 받고 있었다. 오후 5시면 교육이 끝나고 6시에 저녁 식사가 끝나면 동기 들이 거의 Y골등 유흥가에 나가 여유로운 시간들을 보냈다. 어느날 양소위와 석식후 Y골에 나가 산책을 하다가 다리 난간에 걸터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다리 저 건너편에서 어떤 아가씨가 걸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군인이니 농담을 지껄이며 " 야 양소위, 저 아가씨한테 말 좀 걸어봐라."하면서 수다를 떠는데 그 아가씨가 웬일인지 빙긋이 웃으며 우리쪽으로 오고있는 것이었다.


아가씨가 거의 눈앞에 2, 3미터 앞에 올때까지 나는 이 아가씨가 왜 우리한테 오는지 이상했다. 바로 코앞에 까지 왔을때에야 눈이 번쩍 뜨여 알아보니 그 아가씨는 다름아닌 나를 찾아온 교대생 Y였다. 물론 그때는 교대생이 아니고 이미 서대문의 G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혼비 백산을하며 놀랐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일인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나는 대학 졸업 무렵은 물론 임관후 상무대 초등군사반으로 내려 가며, 또한 자대로 배치되어 오기까지도 Y에게는 일체의 연락을 한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당황하며 "어 어 .. 아니 어찌 된일인가 .." 하면서 어물거리니 양소위가 놀라서 "아니 너 아는 분이야?"하고 같이 어물거렸다. 나는 허둥지둥하며 "으응  양소위 먼저 좀 들어가라 나 이따 들어갈께" 하고 친구를 먼저 교육대로 들어가게 했다. 경과는 모르겠으나 어찌 됐든 이렇게 뜻하지 않은곳에서 조우했으니 일단은 어쩔수 없이 다방으로 같이 들어갔다. 차 한잔을 마시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들어보니 참 할 말이 없었다. 졸업후 내가 소식 끊어지고 떠난뒤 애를 태우던 Y는 어떻게 어떻게 하여 내가 가정교사로 입주 생활하고 있던 김효신 장로님댁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전화를 하니 사모님이 받으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모님은 이 전화가 내가 좋아한다던 여학생 R의 전화인줄로 아셨다 한다. 아무튼 아가씨가 전화로 "소선생님 어디 군대로 갔는지 아세요?" 하고 물으니 사모님은 좀 이상하게 생각하셨다. '어찌 소선생이 좋아하는 여자한테 어디로 간다는 말도 안가르쳐주고 갔을까'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어떻든 물어보니 "글쎄- 아마 M읍 가까운 데라고 하던데 - "하고 가르쳐 주셨다 한다.


Y는 그말만을 듣고 서부터미널에 와서 무작정 M읍행 버스를 탔다. 참 그런 무모한 사람도 많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버스 옆자리에 군인 중위가 앉는 것이었다. Y는 군인이니 무작정 그에게 물어 보았다. " 저기 혹시 소소위 아세요?" 했는데 그 중위가 "네? 아 소ㅇㅇ 소위요? 걔 내 후뱁니다. 우리 대대에 같이 있어요." 하고 아주 친절하게 얘기해 주었다. 그 중위가 공교롭게도 다름아닌 같은대대의 1년 선배 학군 장교였던 것이다.


그 선배는 후배의 여자친구가 면회를 온줄 알고 아주 친절하게 안내를 하여 대대에 와서 물어보니 내가 사단 신교대에 갔다는 것이였다. 그러니 아주 자세하고 친절히 사단 신교대로 가보라고 교통편을 가르쳐 주어서 M읍에 다시 나와 시내 버스를 타고 Y골에서 내렸는데 사단 신교대 가는 버스를 물어보려고 군인을 찿았는데 다리 난간에 어떤 군인 둘이 앉아있어 자세히 보니 바로 찾아가는 나였다는 것이다. 자초지종 얘기를 들어보니 우연도 그런 우연이 없었다.

나는 정말 할 말이 없고 난처하였지만 이렇게 까지 온 사람한테 야박하게 말은 못하고 군생활은 아무래도 부담가는 생활이니 부대에 오지 않는것이 좋겠다고만 얘기 하였다. Y를 보내고 교육대로 들어오며 정말 착잡하고 난감하였다. 어찌 기다리는 R은 오지 않고 Y가 온다는 말인가. 생각할 수록 마음이 쓸쓸하였다.


계절의 변화는 언제나 신기한 것이다. 8월 말일까지는 여름기분이 들고 하늘은 검은 비구름이  많은데 어찌 하룻밤을 자고나면 하늘이 갑자기 높아지고 구름은 하얀 새털 구름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렇게 기다려도 오지 않던 R이 내 생일이 되자 처음으로 면회를 왔다. 생일 케익을 사와서 양소위와 다른 동기들을 불러 부대앞 수퍼의 작은 방에서 케익에 촛불을 켜서 내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동기들에게도 소개하니 모두 부러워하였다. 그렇게 처음 온후로는 가끔 면회를 오니 초임시절 긴장된 군생활에서 그보다 더큰 행복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오지 말라했던 Y가 또 부대까지 찾아왔다. 나는 임진각 커피숍으로 같이 가서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정말 심각하게 얘기했다. 내가 "학생때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고 얘기했었는데 기억 나지 않아?" 했더니 "그말은 기억하고 있지만 나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졌던 거야? 이제까지 내맘대로 안돼본 일이 없었는데. 난 충분히 내게로 오게 할 수있다고 자신했어"하고 오히려 의외라는 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수년 동안 그녀가 나를 생각했던 마음을 알고있는터라 너무나 민망하여 할말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확실히 상황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계속되는게 아니고 이미 장래를 함께하기로 한 사이인데. 미안하지만 이제는 나를 잊고 더 좋은 사람 만나면 좋겠어. 부대에 오지말고." 했더니 그때는 순식간에 얼굴이 하얗게 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말도 하지않고 앉아 있았다. 한참이나 지난후에 같이 커피숍을 나와 M시의 버스터미널 까지 바래다 주었다. 버스가 출발할때 차창밖의 나를 향하여 고개를 숙인 모습이 Y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모두가 배필을 만나는 청춘시절에 빚어진 또하나의 갈등과 엇갈린 운명이었다. 그 후로는 소식을 들어본적도 없다.


쌍용부대는 1974년 12월 초에 부대를 이동하여 GOP(General Outpost, 일반전초)지역으로 교체 되었다. GOP란 휴전선에서 적의 접근을 조기에 탐지해 아군을 보호하기 위한 전초부대다. 적군과 마주칠 가능성이 큰 지역에서 적의 침투를 경고, 지연시키는등 주력부대의 피해를 최소화 하는것이 목적이다. GOP지역 근무로 들어가면 후방지역에 잘 나오기도 어려우므로 나는 들어가기전에 청계천에서 고성능 SONY 라디오를 샀다. 세계의 단파대까지 다 나오는 정교한 고성능의 그 라디오는 수십년이 지나 골동품이 된 현재까지도 잘 나오고 있다. 나는 그후부터 거의 소니의 맹신이 되었다. 소니 티브이 소니 카메라 소니 카셋트 소니 비디오 등등. GOP지역으로 들어간 후 내 임무는 내 소대를 데리고 미군부대 인접 지역으로 파견나가게 되었다. 그 지역은 판문점 진입로 게이트 지역인데 나는 미군과 교차 근무하며 이 게이트를 지키는 이른바 수문장 소대장이었다. 미군 초소를 같이 순찰하는 것이었다.


어느 눈이 퍼붓는 밤에 순찰을 나갔다가 나는 큰 사고를 당할뻔하였다, 당번병을 데리고 방한모를 눌러쓴채 순찰하는데 미군초소에서 수하하는 소리를 눈보라 소리 때문에 듣지 못하였다. 순간에 M16 노리쇠 후퇴 전진하는 쇠소리가 들렸다. "Who is there?" 하고 그들이 수하하는 소리를 그때서야 듣고 "I am ROK Army platoon leader." 답하니 그때서야 통하게 되었다.


한번은 대대본부에서 전화가 왔다. "그곳 미군부대 스낵바를 통하여 쌀을 팔아먹는 자가 있다는 정보이니 잘 감시해" 하는 정보였다. GOP지역내에는 어떤 매점도 없으니 오로지 외부와 통하는 루트는 미군 캠프내에 있는 스낵바의 한국인 군무원이었다. 그곳에서 팔아먹는 물건이 나가고 외부 물품이 들어오고 하는 창구였던 것인데 그 스낵바 또한 나의 책임 지역이었던 것이다. 당분간 밤시간을 주의해서 보고 있었는데 어느날 밤 멀리서 트럭이 헤드라이트를 비추며 들어오더니 곧 라이트를 끄고 조용하였다.


나는 M16을 들고 조용히 나갔다. 캄캄한 트럭에서는 조용하더니 잠시후에 검은 그림자가 무언가 짊어지고 우리 소대 연병장으로 들어오는게 보였다. 미군 스낵바로 가기 위해서는 우리 연병장 한 모퉁이를 지나가야 했다. 나는 나무 뒤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가 5미터 정도 가까이 왔을때 갑자기 뛰어나가며 "누구냐?"하고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다. 그 서슬에 깜짝 놀란 그림자가 털썩하고 등에 진것을 땅에 떨어뜨리더니 순간 조용하였다. 나는 M16 노리쇠를 철컥하고 후퇴 전진 시켰다. 군인들은 누구나 안다. 그 상태에서 손가락만 까딱하면 연발로 드르륵 발사가 된다는 것을. 그림자는 얼어붙은 땅바닥에 덜퍽 엎드리면서 "소대장님, 살려 주세요-" 하고 울부짖었다.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선임하사가 체포하듯이 붙들어 내무반으로 끌고 들어와보니 그는 바로 식량과 부식 조달책임자인 대대 1종계 하사였다. "너 이놈 식스틴을 긁어 버리려 했다. 군대 식량 팔아먹는 죄가 얼마나 두려운지 모르나?" 하고 호통을 치니 꿇어엎드린 하사는 울면서 살려 달라고 손을 빌었다.


그는 장기 직업 군인이었다. 한동안 꿇어 앉혀 놓았는데 또 한편 화가 가라앉고 바라보니 가여운 생각도 들었다. 보고를 하나 어찌 할까 망설이다가 내 선에서 한번 용서해 주기로 하였다. 내개 만일 정식 보고를 하여 처리하면 아마 그의 직업군인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반성문을 받고 몇번을 다짐하여 호통을 친뒤 다시는 그런짓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풀어주었다. 그는 몇번이나 감사하다고 허리를 굽히며 돌아갔다. 그 후에는 부식차가 올때마다 나에게 고기나 생선등 특별 부식을 가져 왔다, 나는 음식에 그다지 애착이 없는 타입이므로 소대원들에게 먹게 했으나 곧 이어 이제 다시는 추가 특별 부식을 가져오지 말라 하였다. 팔팔한 초급장교 시절의 에피소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