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의 새해가 밝았다. 대학과 학군단의 모든 과정이 끝나고 졸업과 임관식을 기다리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김효신 장로님 댁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졸업에 앞서 2월 20일의 임관식이 먼저 다가왔다. 임관식에 초대할 초대장이 각자 2장씩 나왔다. 가족 또는 여친을 초대하기 위한 티켓이었다. 임관식은 매년 용산의 육군 본부 연병장에서 강원도를 포함한 서울과 수도권 생도들의 임관식이 열리는 장소였다. 지금은 전쟁기념관으로 변해있는 장소이다. 나는 R에게 티켓을 전달해줄 생각으로 화신백화점 지하 다방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한장은 아침에 수원에서 오시는 형님에게 전해달라하고 한장은 R 본인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R은 형님을 만나서 티켓은 전해 드리겠으나 본인은 식장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다 보는 공식적인 행사에 참가함으로서 나와 교제하는 사이라는 것을 공개하는데 부담을 느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만난지 만 3년. 이제까지는 모든것에 R의 의사를 존중해 주었지만 이번만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모든 과정이 끝나고 학교를 떠나 군대로 헤어지는 과정인데 이때 만일 이러한 행사에 오지 않겠다면 이것은 앞으로의 만남도 신뢰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한 이제까지 만나왔던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인지 뭔지 자존심도 상하고 진정한 마음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와서 굽히고 와달라고 사정하기도 싫었다. 나는 너무나 흥분하여 "마음대로해 오든말든 " 하고 소리치고는 뛰어 나와 버리고 말았다. 가슴이 아펐다. 아무튼 티켓 두장은 전해 주었으니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잠을 설치고 일어나 아침에 학군단 본부로 가서 동기생들과 구대장님들 모두 같이 육군본부로 출발하였다. 육군본부 연병장에는 이미 수도권에서 모인 많은 12기 동기생들이 집결하고 있었다. 10시에 임관식이 거행 되었다.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국민의례 순서가 있고 김종필 국무총리의 축사가 시작 되었다. 신임 소위들에게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당부하는 내용이었다. 드디어 임관식의 순서가 끝나고 사회자의 제의가 있어졌다. "이것으로서 학도군사훈련단 제12기 장교들의 임관식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뒤에 계시는 가족 친지분들께서는 대열로 들어오셔서 심임장교들의 어깨에 계급장을 달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임관 생도 대열 뒷편의 스타디움에 모여있던 수많은 친지 부형들이 신임 장교들의 대열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나는 가슴이 두근 거렸다. 어제까지 R은 못오겠다하고 헤어졌으니 온다고 확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형님에게 어떻게든 티켓은 전해 드렸겠지 하는 생각은 들었다. R이 못온다해도 이제는 별 수가 없다고 스스로 마음을 가라 앉히려고 애썼다. 먼저 대열 속에서 친구 원이 부모님이 보였다. 인사를 드리고 부모님은 원이 양 어깨에 소위 계급장을 달아주셨다. 많은 동기생들의 친지와 여친들이 이미 대열에 들어와서 반갑게 만나고 계급장을 달아주는데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우선 형님이 오시기를 기다렸다. 한참이나 지나서 인파 사이로 형님의 얼굴이 언듯 비쳤다. 나는 손을 들어 여기라고 불렀다. 조금후 형님이 가까이 오시는데 보니 형님 뒤에 R이 가려서 오는 것이 언뜻 보였다. 나는 정말 뛸듯이 기뻤다. 혹시나 혹시나 하고 기대했었는데 꿈처럼 R이 나타난 것이다. 옆에서 내 마음을 아는 원이가 더 기뻐했다. 형과 R의 축하를 받으며 어깨에 하나씩 계급장을 달아 주시도록 내밀었다. 그 순간이 아마도 나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환희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것은 이제 R과의 관계가 이어지게 된다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꿈꿔왔던 미래를 실현 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임관식후 사흘지난 2월 23일이 대학 졸업식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양복을 입었지만 우리 임관한 장교들은 육군 정복을 입었다. 대운동장 스타디움에서 사각모를 쓰고 졸업식을 마쳤다. 그런데 자식의 졸업식을 보러 아버님이 올라오셨다. 당시 이미 회복할 수 없는 위암의 말기이기 때문에 피골이 상접하신 모습이었는데 누가 봐도 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몸이 아니셨다. 그러나 오직 둘째 아들의 졸업식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초인적인 힘을 내셔서 서울까지 오신것이었다. 형이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오고 R도 가족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학군단 장교의 초록색 추만옥 반지를 끼고 육군 장교 정복을 입고 고생끝에 맞는 졸업이니 기쁨도 있었지만 기쁨보다는 아버님의 병환으로 인해 오히려 마음이 괴로웠다. 아무튼 식을 무사히 마쳤으니 모두 같이 학교앞에서 식사를 한후 가족들은 내려 가셨다. 부모님에게도 R을 보여드린게 다행이었다.
가족을 전송해드린후 R과 함께 성남시로 갔다. 극장에 들어가 '엘 시드'를 보았다. 찰톤 헤스턴과 소피아 로렌 주연의 명화였다. 영화를 보고 나와 식사를 하고 신림동으로 갔다. 그때는 R의 집이 상도동에서 신림동으로 이사한 후였다. 벌써 시간이 늦었지만 너무나 헤어지기가 싫었다. 집앞에서 한참이나 얼쩡거리다가 별 수가 없어서 집으로 들여 보냈다. 며칠 있으면 보병학교로 입교하여 헤어져야하니 R도 이제 아쉬워만 하였다. 집으로 들어가며 잠시만 여기 서 있으라 하였다. 컴컴한 골목에서 한참을 서있으니 담 너머로 R이 얼굴을 내밀었다. 목소리를 죽여 "잠깐 담넘어 들어와 봐요." 하니 나는 정신 없이 담을넘어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에 작은 헛간같은 빈곳이 있었다. 우리는 그곳으로 들어가 한참이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집안에 들어갔다가 잠깐 나왔으니 오래 있을수도 없었다. 마음은 안타까워 견딜 수 없었지만 어서 들어가라하고 다시 담을 넘어 나와 자양동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는 매일 R과 만나 주로 용산의 여로다방에서 지냈지만 며칠의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 내일이면 보병학교로 입대해야할 날이 다가왔다. 이제는 마음을 주고있는 R과 정말 헤어지기가 싫었다. 그래도 입영전 마지막 밤이라고 집에서 뭐라고 얘기를 해 놨는지 R은 나와 같이 지내기로 하였다. 얼마전까지도 공식 석상에 오지 않겠다고 냉정하게 생각했던 R이었는데 얼마 안되는 기간에 대단한 반전이었다. 늦게까지 돌아다니다가 신림동에 있는 중앙여관에 들어갔다. 당시는 모텔이라는 말은 없었다. 밤새 안타깝게 같이 지냈지만 우리는 선을 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밤을 같이 새운 것만으로도 R은 임신이 되지 않았을까하고 엄청 예민하게 걱정을 하였다. 얼마나 무식한 우리였던가. 참 지금 생각하면 웃음을 금할 수 없다.
이튿날은 2월 28일. 낮시간까지 종일 같이 지내고 식사를 같이 한후 저녁 6시에 용산역 광장에 도착하였다. 지금은 용산역이 민자 역사가 되어 현대식이 되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일제시대의 용산역사 건물이 그대로이고 역앞은 넓은 광장이었다, 광장에서 전송 나와준 재억이와 셋이서 만났다. 역사안 집합장소로 들어가야할 시간이 가까워지니 더 이야기 할 시간도 없었다. 서둘러 안타까운 이별을 하고 용산역 광장을 가로질러 들어갔다. 플랫홈에는 이미 우리를 수송할 군용열차가 대기하고 있고 홈안의 '축 환영, 학군 12기 육군 보병학교 입교' 라고 커다랗게 걸려있는 플래카드 앞에서 육군 군악대가 요란하게 행진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나는 본래는 브라스밴드의 연주곡을 좋아했지만 그날의 군악대 연주는 환영이 아니라 '각오하라'고 겁주는 소리로만 들렸다.
정해진 군용열차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많은 동기생들이 승차하고 있고 친구 원이도 이미 와 있었다. 멀지않아 드디어 열차가 출발하였다. 한참들 떠들며 보병학교 입교의 긴장감과 입교전 며칠의 화제로 시끌벅적하였지만 곧이어 대부문 잠이 들고 기차는 남으로 남으로 달렸다. 나도 원이와 이야기를 하다가 피곤하여 잠이 들었는데 얼마나 짔을까.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수송장교 대위가 들어와 " 신임 장교 여러분, 기상하십시오. 송정리 도착 15분전입니다." 하고 큰소리로 기상 시켰다. 우리는 드디어 올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하며 잠이 깨어 하차할 준비를 하였다.
새벽 3시 송정리 역에 열차가 정차하였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보급품 군장 더블백을 역전에 대기하고 있던 군용 트럭에 던져 싣고 상무대 육균 보병학교를 향하여 구보로 출발하였다. 송정리 역에서 보병학교까지는 16킬로미터이다. 모두들 아직은 싸늘한 3월1일의 새벽공기를 마시며 뛰었지만 긴장한 탔인지 힘든줄도 몰랐다. 물론 훈련으로 단련된 젊음이 넘치고 있었다.
보병학교 대연병장에 도착하여 소속 구대별로 재 집합하였다. 나는 다행히 원이와 합께 4구대에 소속되었다. 나는 구대 교육담당으로 선발되었다. 교육담당이란 매일 저녁 다른 동기들이 점호 준비를 할때 내일의 교육일정을 학인하고 그 교육에 필요한 교재와 교구재를 수령하는 일이었다. 나는 교사자격증도 있으니 그 업무는 보람있고 점호 시간에 사역하지 않는 좋은점도 있었다.
초등군시반 생활은 생각했던것보다는 견딜만하였다. 다만 나는 식사를 빨리하지 못하는 체질이라 1분에 마쳐야하는 훈련식 식사를 견디기가 어려웠다. 이제 좀 먹으려하는데 "식사완료
10초전!"하는 구대장의 구령이 들리면 정말 짜증이 나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먹지 못하면 훈련때 쓰러질것 같은 강박관념에 식판을 들고 잔반통으로 이동하며 밥을 먹었는데 운나쁘게 호랑이 같은 구대장 눈에 띠었다. "어떤 장교가 보행중에 식사를 하나. 앞으로 -"하고 찢어지는 목소리로 불려세워저 푸쉬업과 쪼그려 뛰기등 쓰러지도록 기합을 받았다. 그 후에는 어떤 방법으로든 시간내에 식사를 다 하도록 엄청난 노력을 하였다. 그것이 소위 군대식 적응이다.
당시의 육군보병학교장은 육군 소장 정득만 님이셨다. 지금은 작고 하셨지만 정장군님은 주월파병 맹호 사단의 사단장으로서 많은 무공을 떨쳤던 분이셨다. 그러나 철수 말기 안케 패스 전투에서 많은 희생자를 냈던 것은 전략 판단의 실수 였다. 아뭏든 철수 하여 보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셨는데 성품은 인자하시고 교육훈련 과정에서 안전에 각별히 신경을 쓰셨던 분이다.
두달 가까이 지났을때 '초등군사반 축제'가 열렸다. 부대내지만 각종 체육행사와 음악 연주회 행사도 열렸다. 나는 어디서나 노래가 또 장기이니 원이와 같이 구대 대표로 출연하기로 하고 연습하였다. 곡목은 대학시절부터 같이 많이 부르던 '웨딩케익'이었다. 대강당에서 다른 구대는 밴드 연주 등도 있었지만 원이와 나는 둘이서 기타를 치면서 듀엣 화음으로 노래하여 입상하였다. 살벌한 훈련기간에 가졌던 어름다운 추억이다. 훈련중에도 휴식시간에 동기들 앞에서 스트레스를 푸는 노래를 많이 하였다. 'Top df the World', 'Cotten field','Don't forget to
remember' 등이 그때 잘 불렀던 노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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