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남북 분단 상황에서 국가 안보의 강화 및 군사력 증진을 위해 1961년부터 미국의 ROTC 제도를 도입했다. 학도군사훈련단(약칭 학훈단)이라는 이름으로 창설된 한국의 ROTC는 그때부터 매년 약 3000명 정도의 후보생을 선발했다. 이 이름은 1972년 학생군사교육단으로 변경되었고, 지금까지도 약칭 학군단으로 불리고 있다. 학군단 후보생은 1983년부터 제1국민역의 신분을 가지게 되었으며, 후보생 기간 중에는 '학군사관후보생'으로 부르게 되었다. 나는 1971년 2학년 2학기때 이 ROTC에 지원하여 합격하였다. 훈련은 3,4학년 2년간 받고 졸업과 동시에 임관시험을 거쳐 육군 소위로 임관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의무복무기간은 2년(공군의 기본병과는 3년)이며, 국가가 학비를 부담하여 수학한 생도에 한해서는 2년을 가산하여 복무하게 할 수 있다. 학군단 지원자격은 당시에는 평균 B학점 이상이었다. 지금은 경쟁력이 더 높아져서 합격하기도 꽤 어렵다고 들었다. 학우들은 학과 공부만 하면 되지만 우리 학군단 생도들은 똑같이 공부하면서 군사교육까지 받아야하니 보통 시간이 빠듯한 생활이 아니었다.
1972년 3월 2일. 3학년 1학기가 시작 되자마자 학군단 1년차 생활이 시작 되었다. 나는 알바 학생들도 가르쳐야되는 1인 3역 정도로 정말 시간이 없었다. 모든 동기들은 옥스포드지로 된 하얀 단복을 마쳤는데 나 혼자서는 마치지를 않고 시중에서 파는 그냥 하얀 와이셔츠를 단복으로 입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창피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보다 오히려 뭣때문에 생도들에게 비싼 돈을 주고 마치게 하는지 그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아뭏든 좀 튀는 성격이 또 발로하여 남들은 하얀 플라스틱 명찰을 붙이고 다녔는데 유독 나만은 까만판에 하얀 글씨로 새긴 명찰을 달고 다녔다. 그때나 지금이나 남과 똑같이 하는것을 싫어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구대장은 육사 출신으로서 월남전에서 돌아왔고 성격이 좀 사나웠던 명산옥 소령과 같은 ROTC 출신으로서 우리 축산대학 선배인 이정무 대위님이 계셨다. 이대위님도 또한 월남전에 참전하였는데 태권도가 5단으로써 주월 한국군 사령부에서 태권도 교관으로 근무하신 분이었다.
이대위님은 키가 크고 체격이 좋으며 대단한 무인상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주 따뜻하고 고마우신 선배님이었다. 내가 알바 등을 하며 너무나 빠듯한 생활을 하는 것을 아시고 많은 편의로 돌봐 주셨다. 나는 당시 육군 태권도와 같은 오도관 태권도 유단자였는데 우리 동기중에는 나밖에 없었다. 이대위님께서는 내가 운동하는것을 보시고 나를 동기들의 태권도 훈련 시간의 교관으로 지정해 주셨다. 그리고 "너는 바쁘게 생활하니 군사교육과정은 어쩔수 없지만 그 외 시간에는 태권도 교육만 확실하게 해주고 일찍 가라" 하고 봐 주셨던 것이다. 얼마나 고마운 선배님이셨던가.
그 바쁜 중에 R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 평일에는 주로 잠깐 나는 틈을 이용해 학생회관의 기독학생회 회의실을 이용하였다. 약속을 한다기보다 그냥 틈날때 그곳에서 기다리면 R도 강의가 끝나고 들어오곤 하였다. 물론 우리만 있는것은 아니고 다른 선후배 회원들도 같이 쓰는 회의실 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기타를 치고 R과 같이 듀엣으로 노래를 하곤하였다. 그때 많이 부른 노래들은 '록키의 봄', '지루하던 날', '알래스카의 처녀', 'Cotten Fields', 'Come Back Lisa', 'Hand me down my walking cane', '그리운 고향', '진주조개 잡이' 등의 수많은 포크송들과 '바람부는 날이면' 등 우리 가요, 'Don't forget to remember' 등 팝송, '오빠생긱', '겨울나무', '과꽃' 등의 동요등 셀수 없는 곡을 만나면 화음으로 즐겁게 부르곤 하였다.
시간이 나는 날엔 둘이서 학교 앞에서 567변 버스를 타고 봉천동 고개 넘어 종점까지 타고 갔다. 한시간 이상 걸리는 지금의 서울대입구역 근처이다. 그곳 고개를 거의 다 내려 간곳 오른쪽에 관악산 다방이라는 조그마한 다방이 우리들의 아지트였다. 오후에 들어가 구석진 자리에 앉아 커피 두잔을 시켜놓고 저녁까지 앉아있곤 하였다. 잠시 앉아있었는것 같은데 어찌그리 시간은 빨리 지나갔던가. 무슨얘기를 그리도 할 게 많았는지 화제도 끝이 없었다. 기독교와 종교 이야기, 문학과 작가들, 예술가들, 앞으로의 장래 이야기 가족과 형제 등이 주로 화제였다. 어두워질때까지 있다가 나오면 배도 고프니 가는 곳은 중국집이었다. 주머니가 얇으니 좋은것은 못사주어도 짜장면 값은 언제나 내가 내었다. 먼훗날 R은 짜장면이라도 꼭 자기가 내려는 그때의 매너와 책임감이 좋았었다고 말한적이 있다.
언젠가 내 생일에는 R이 특별히 마음을 먹고 명동 한일관에 가서 갈비탕을 사주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지금으로 치면 고급호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은것과 마찬가지 수준이었다. 현재의 봉천동 서울대입구역 건너편은 그때는 아직 산길이었다. 좌우는 과수원이고 그 사이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지금의 서울대 정문 방향으로 가는 언덕 정상 오른쪽 길가에 바위 틈에서 흘러나오는 약수터가 있었다. 우리는 떠오르는 달빛을 받으며 같이 걸어가다가 그 약수터에서 차가운 물로 목을 추기며 고개를 넘어갔다. 계속 걸어 신림동 방향으로 돌아 신림사거리까지 걸어오는 때도 있었다. 지금이라면 다리가 아퍼서 걷기도 싫을 먼 거리이다.
5월 5일에 모처럼 R과 약속이 되어 천마산 등산을 가게 되었다. 배낭에 코펠과 쌀과 찌개거리를 챙기고 약간의 간식을 가지고 청량리 시계탑 아래에서 R을 만났다. 경춘선 열차를 타니 계절의 여왕 신록의 계절을 즐기려는 상춘객들로 열차는 만원이었다. 자리가 없어 서있어도 마음이 설레니 다리 아픈줄도 몰랐다. 마석역에서 내려 천마산 쪽으로 오르니 좁은 등산 길에 사람들이 한줄로 서서 오르는것 같았다. 산 중턱 못미쳐 파란 보리밭이 나타났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만 자란 R에게 나는 일부러 "이게 뭘까?" 하고 물어 보았다. R은 "글쎄 이게 뭐지?" 하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보린지 밀인지 무슨 작물인지 그다지 본적이 없으니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는 그걸 모르는 것이 너무나 우스워서 밀과 보리의 이파리 차이를 설명해 주었다. 중턱 적당한 자리에 자리를 잡고 밥을 하고 찌개를 끓여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지금이야 산에서 취사를 못하게 하지만 그때만해도 옛날이니 그런 즐거움이 아직 있었다.
천마산은 마석에서 올라가는 길은 그다지 힘들지 않은 완만한 경사지만 평내 쪽으로 내려오는 길은 경사가 급하다. 나는 핑게김에 비탈진 곳에서는 R의 손을 잡아주며 조심 조심 내려왔다. 상명여대 실습장을 거쳐 평내역까지 내려오니 어느덧 해가 기울고 있었다. 평내역에서 다시 경춘선 완행 열차를 타고 청량리로 출발하였다. 차안은 갈때보다 더 만원이라 겨우 차 안쪽으로 비집고 들어가니 완행열차는 무겁게 출발하였다. 그런데 무슨일인지는 모르나 한참 달리던 가차가 도중에 멈추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때는 왜 멈추는지도 모르고 그냥 무작정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기차가 출발은 하지 않고 불평만 여기 저기서 터지는데 어두운 만원 기차안에서 누군가가 '보리밭'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한 두사람이 곁에서 따라 하다가 곧이어 차안의 모든 사람이 합창을 하게 되었다. 노래하는 사이 어느덧 불평도 사라지고 잠시후에 기차는 다시 출발하게 되었다. 아직은 낭만이 가슴에 남아있던 그시절의 한 장면이었다.
학군단 1년차 1학기의 바쁜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어느덧 여름방학을 맞게 되었다. 일반 학우들은 방학을 그저 개인적으로 즐겁게 보내면 되지만 학군단 생도들은 4주간 병영훈련을 입대해야 되는 과정이 있었다. 거기에다 또 학교에서는 농촌 실습 과정도 이수해야 하였다. 그러니 어떻게 시간을 짜야 할지 모를정도로 빠듯하였다. 아뭏든 병연훈련 일정에 앞서 농촌 실습과정을 먼저 이수하기로 결정하고 재억이와 같이 제주도 중문 출신인 이병훈 선배네 농장으로 실습을 가기로 하였다. 7월 중순에 방학이 되자마자 재억이와 같이 용산역에서 호남선 완행열차를 타고 목포로 향하였다. 저녁 9시 무렵에 기차를 타서 다행히 자리를 잡았는데 모든 역을 다 쉬며 자다가 깨다가 호남선을 달려 목포역에 도착하니 이튿날 정오가 가까웠다. 14시간 정도 걸린것이다. 내리자 마자 신속히 항구로 달려가 제주행 가야호 시간부터 확인하였다.
부랴부랴 서둘러 간단한 점심을 마치고 부두로 가서 오후 1시쯤 가야호를 타고 제주로 향하였다. 배표는 물론 가장싼 3등 선실표이다. 처음 배가 항구에서 출발할 때는 갑판에 나와 파도와 갈매기 구경도 하였지만 곧 비가 내리고 속이 메슥거리며 배멀리가 시작되니 급히 배 밑창 3등 선실로 내려갔다. 3등 선실은 1.2등처럼 의자도 없고 그냥 툭터져 장판이 깔린 넓은 마루 공간이었다. 여기 저기 남자고 여자고 배멀미에 지친 사람들이 뒹굴어 큰대자로 뻗어 누워있는데 우리도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누워 잠을 청하였다. 잠이 들면 멀미는 가라앉게 되는 것이다.
한동안 자다가 배가 멈춘것 같아 깨어 벌써 제주에 도착 한건가 하고 밖에 나가 보니 여기는 추자도라고 하였다. 제주로 가는 도중에 잠시 정박해 손님을 내리고 태우는 것이었다. 배멀리를 피해 다시 선실로 내려가 누군가 소리쳐 깨울때까지 정신없이 잤다. 제주의 항구엔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재억이와 나는 우산을 받아도 비바람은 사정없이 옆을 때리니 생쥐처럼 함빡 젖어버렸다. 돈도 부족하니 어디 여관에 들어갈 형편도 안되고 간단히 요기를 마친다음 농촌지도소를 물어물어 찾아갔다. 밤중에 흠뻑 비에 젖은 학생 둘이 찾아가니 누가 좋아 하겠는가. 그런데 농촌지도소에 게시는 숙직 아저씨는 우리를 너무나 친절히 대해 주셨다. 학생들이 서울에서 고생하며 왔다고 옷을 말리게 하시고 간식을 주셨다.
미안한 마음이었지만 염치없이 얻어먹고 나니 피곤하여 곯아 떨어지고 말았다. 밤새 푹자고 일어나니 피곤이 씻은듯이 사라졌다. 그래도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일어나 세수를 하고 가겠다고 하니 숙직 아저씨는 아침을 사줄테니 먹고 가라고 우리를 데리고 나섰다. 제주시 로타리에 창만정이라는 식당이 있었다.그곳에서 사주시는 순대국밥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지금도 그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훗날 업무차 수없이 제주시를 찾게 되었을때 아무리 그 기억속의 로타리를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식당은 없어졌다해도 그 로타리 지형마져 찾을 수 없으니 너무나 아쉬웠다.
그렇게 아침을 얻어먹고 감사 인사를 한후 버스를 타고 남제주로 넘어갔다. 중문리에 내리니 비는 아직도 계속 내리고 있었다. 길에서 이병훈 형의 집을 물으니 바로 가르쳐 주었다. 병훈 형네 집은 돌담으로 둘러쳐진 낮으막한 제주 전통 가옥이었다. 병훈이 형과 반갑게 만나니 "야 너희 점심 안먹었지? 배고프겠다. 조금 기다려라 점심 내올께" 하는 말이 너무나 고마웠다. 한참이나 기다린 후에 점심상이 나왔다. 둥그런 알미늄 소반위에 커다란 양푼에 보리쌀 삶은밥이 수북히 담겨 김이 나고 있었다. 반찬은 조그만 감자조림 한가지가 있었다. 그래도 제주에서 서울까지 유학을 간 집인데 점심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눈치를 채고 병훈이형이 얘기했디. "야 제주도는 식생활이 육지보다 많이 떨어지지?" 아닌게 아니라 당시의 제주도는 소득수준이나 의, 주생활에 비해서 식생활이 육지보다 많이 떨어진것을 느낄수 있었다. 아뭏튼 쌀은 한톨도 들어있지 않은 그 보리쌀 밥도 배가 고프니 그렇게 꿀맛일수가 없었다.
다음날 부터 우리가 하는일은 병훈이형네 중문리 산비탈 다랭이 논에 나가 소가 끄는 쟁기질을 돕는 것이었다. 계단식의 논 폭이 2m가 될까 말까하니 쟁기를 끌고간 소가 돌아서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앞에서 소의 코뚜레를 잡고 제자리에서 돌려 방향을 잡아주는 것이었다. 사실 말이 일이지 그다지 힘드는 일은 아니었다. 한참하다가 또 집에 들어와서 보리쌀 밥을 꿀맛으로 먹었다. 그런데 병훈이형네는 일할 것도 그다지 많지를 않아서 재억이와 나는 한동네에 좀 부자집인 이상주씨 댁으로 옮겼다. 그댁은 제주시에 빌딩도 있는 부자집이고 집도 새로 지은 깨끗한 기와집이었다. 그 집에 가서는 5년생 귤나무의 귤을 따는 작업을 하였다. 귤나무가 어느정도 커서 제대로 귤이 열리기까지는 나무가 튼튼해지도록 열린 귤들을 모두 따줘야 하는 것이었다. 그집은 상당히 부자인데도 식생활은 역시 검소하였다. 물론 병훈이형네 집보다는 나은 편이어서 김치나 가끔은 생선토막도 나오니 아주 성찬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날 R에게서 엽서가 왔다. 친구들과 경포대 해수욕장에 놀러 갔다는 것이었다. 내가 보낸 편지의 답장이었다. 마지막에 까맣게 사람 모양을 그려놓고 "이렇게 까매?" 하고 쓰여 있었다. 나는 얼마나 반가운지 그 엽서를 보고 또 보고 닳도록 읽었다. 그런데 나는 다정하고 긴 편지를 받고 싶었지만 R은 언제나 누구나 보는 엽서를 짧게 보내는 것이 너무 서운하였다. 그나마 받는것 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가하고 스스로 위로를 하곤 하였다. 며칠후 우리는 실습을 대충 끝내고 재억이와 같이 제주도 여행을 하기로 하였다. 둘이서 텐트와 코펠 담요 양식 약간을 가지고 무작정 중문에서 서귀포쪽으로 출발 하였다. 완행버스를 얻어타고 가다가 풍경이 좋아보이면 내렸다. 그때만 해도 제주는 얼마나 인심이 좋았던지 차장 아가씨에게 돈이 없다고 차비좀 깍아달라하면 절반으로 깍아주기도 하였다. 우리는 아무런 일정이나 시간 계획도 없이 가다가 저물면 바닷가에 텐트를 치고 잤다.
성산 일출봉에 가서는 날이 저물어 우선 교회를 찾아가 잠좀 잘수 없나요 부탁하니 교회 안에서 자라 하였다. 저녁을 먹고 들어와 잘려고 하는데 모기때문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뒤척거리며 밤중까지 자는둥 마는둥 하다가 재억이와 둘이 일어나 배낭을 다시 꾸려서 나왔다. 어차피 잠자기도 틀렸으니 일출봉이나 올라가자고 하였다. 바닷가에 밤안개가 짙어서 앞을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더듬더듬 길을 잡아 일출봉으로 얼마나 올라 갔는지 어느 순간에 더 올라갈 곳이 없었다, 우리는 그 봉우리 저쪽은 바다로 떨어지는 낭떠러지인것으로 알고 있었다. 서로 조심해 조심해 하며 옆으로 능선을 걸었는데 안개에 몸이 축축해지긴해도 모기도 없고 시원하였다. 우리는 일출봉 위 안개 속에서 A텐트를 펴서 한자락은 깔고 한자락은 담요와 같이 덮고 깊은 잠에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몇시간이나 그렇게 달게 잤는지 갑자기 더워지는것 같아 눈을 뜨고 일어나 보니 우리가 낭떠러지인줄 알고 조심하였던 곳은 넓게 펼쳐진 분화구였다. 둘이서 얼마나 실소를 하였던가.
삼양해수욕장에서도 자고 한림에서도 자고 만장굴 입구에서도 잤다. 그런 여행은 그때가 전무후무한 자유무전여행이었다. 길을 걸어가다가 트럭이 오면 무조건 손을 들어 세웠다. 서울에서 온 학생들인데요 좀 태워 주세요 하면 거절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1주일을 여행한 다음에 마지막 밤에는 중문 해수욕장에 텐트를 쳤다. 어떤 아주머니한테 얻은 감자와 남은 쌀로 죽을 끓였다. 중문해수욕장은 바로 태평양과 연결 되기때문인지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파도가 높은 해수욕장일 것이다. 그리고 모래는 다른 해수욕장처럼 돌이 부서진 모래가 아니라 집어들고 자세히 보면 조개껍질이 수천년 동안 부서진 조개껍질 가루이다.
집채만한 파도가 밀려오는소리를 들으며 밤에는 잘도 잤다. 그곳이 지금은 중문 하이얏트호텔 롯데호텔 신라호텔이 세워진 금싸리기의 땅인 곳이다. 그리고 이튿날은 다시 병훈이 형 집으로 돌아와 며칠을 쉬고 돌아다닌 다음 서울로 출발 하였다. 곧 ROTC 1년차 병영훈련 입소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은 갈때의 반대로 제주항에서 가야호를 타고 목포로 가서 완행 열차로 용산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전반기 농촌실습의 명분으로 다시 해보지 못할 추억의 여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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