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어나 저 강을 건너라

두근거리는 가슴, 서호의 갈대숲에서

Billy Soh 雲 響 2020. 1. 29. 23:14

5월 말의 어느 일요일 아침 재억이와 같이 식사를 마친후 학교 앞에서 568번 버스를 타고 노량진 장승배기로 갔다. 나는 처음 와본 장승배기라는 곳이 낯설긴 하였지만 재억이와 같이 송학대 교회를 찿아 갔다. 장승배기 삼거리에서 노량진역쪽으로 가다가 오른쪽 뒷길 골목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석조로 된 큰 교회 건물이 눈에 띄었다. 시간은 12시 반경이라 마침 대예배 시간이 끝나고 성가연습을 하는 시간이었다. 어떤 남자분이 보이길래 "R씨를 찾아 왔는데요. 혹시 아세요?" 하고 물어 보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남자분은 R과 동기인 김인수 씨였다. 그가 "아 그러세요? 잠깐 기다리세요" 하고 별관으로 들어가더니 잠시후에 난감한 표정의 R이 나왔다. 재억이와 내가 찿아온것을 알고 " 아니 웬일이세요?" 하고 당황한 빛이 역력하였다. 물론 내가 찾아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하지 않았을테니 당황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찿아 온것을 어찌 하겠는가. 셋이서 같이 큰길로 나오자 재억이는 "나 먼저 간다" 하고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좋든 싫든 이제 내가 리드를 할 수 밖에 없었다.어디를 가겠다고 미리 생각해 둔곳도 없어서 민망하였지만 가까스로 생각해내 "혹시 수원에 서호 가봤어요? 서호에 가볼까요?" 하고 제안을 하였다. R은 "그래요" 하고 동의하여 우리는 버스를 타고 수원으로 향하였다. 수원역에 내려 시내버스를 몇정거장 타면 서호였다. 형이 서둔동에 사실때 서호 근처 지리는 잘 알고 있었기에 내가 농촌 진흥청 경내를 지나 서호 호숫가로 안내하였다. 초여름의 잔잔한 호슷가에서 R의 꽃무니 원피스 자락이 바람에 날릴때 내 눈에는 마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온것처럼 보였다. 이날이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해본 소위 데이트리는 것이었다.


지금은 서호가 너무나 깨끗하게 잘 정리되어 엣날과 같은 낭만이 오히려 없어져 버린것 같지만 그 때만 해도 그냥 자연의 호수 그대로였기 때문에 호숫가에는 갈대가 무성하고 갈대 사이로 호수의 잔물결이 찰랑거리며 끊임없이 밀려오고 있었다. 호수의 수면이 바라다 보이는 어느 갈대 사이에 돌을 가져다 놓고 무언가 그위에 깔고  R을 않도록하고 나도 그곁에 앉았다. 하지만 이렇게 단둘이 있게 되고보니 나는 무슨 이야기로 화제를 잡아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를 않았다. 아무런 얘기도 없이 어색하게 앉아있기도 하고 집안 얘기를 조금씩 나누기도 하였다. 그저 만만한 얘기는 합창단 얘기와 음악에 관한 대화였다. 그러나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얘기는 내가 왜 이렇게 말라가는지 왜 가슴이 왜 답답하고 밥을 먹을 수 없는지 그것은 R 그쪽을 사랑하게 된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날 하루가 다 지나도록 나는 그말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사람이 말로 표현 한것만 알수 있는건 아니었을 것이다. R은 아마도 표현 할 수 없는 나의 마음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둘다 장래에 대한 아무런 예측도 할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러한 사랑의 감정을 내놓고 표현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요즘의 젊은 세대가 듣는다면 아마 한심하다고 헛웃음을 칠 일이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모든 것이 장래의 일때문에 불안하던 시대였던 것이다.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말만으로도 그만큼 무거운 책임이었기 때문이다.


정작 하고 싶었던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은 얼마나 가슴이 조이는 안타까움이었던가. 나는 마음이 지쳐서 버스에서 졸았다. R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졸았지만 서울이 다시 가까워지면서 그 시간이 흐르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다시 상도동의 장승배기에까지 돌아와 주머니도 얇으니 간단한 저녁을 먹었다.  R이 그곳에서 집이 멀지 않다고 들어가는 것을 본후 나도 발길을 돌려 학교로 돌어왔다. 기숙사로 돌아온후에 생각하니 참 스스로에게도 만족할 수는 없는 하루였다. 하지만 그래도 무언가 어제와는 다르게 가슴이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