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3월이 되어 다행히 유신 휴교가 끝나고 대학생활의 마지막 해이며 학군단 2년차 생활을 시작하였다. 1년차 후배들도 들어오니 낡은 사각모에 하얀 세로막대기 네개의 2년차 생도 계급장은 아주 고참스러워 보였다. 바쁜 생활은 변함 없었지만 그래도 R과의 관계가 작년보다 조금 안정된것이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다. 봄빛도 짙어갈 무렵 같이 인천의 자유공원에 놀러 갔다. 맥아더 장군 동상을 본후, 커피숍 창가에 앉아 해무가 낀 봄바다를 바라보며 돌아올 미래를 이야기하였다. 일단 나는 대학 졸업과 함께 소위로 임관되는 과정이 정해져 있었으니(물론 임관고사가 패스 된다는 전제하에) 사회 진출은 3년후인 1976년 정도 되어야하는 것이었다.
미래는 언제나 불확실하고 사회에 나와 취직은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과연 안정된 생활의 기반을 만들수 있을지 소위 빽도 비빌 언덕도 아무것도 없는 나로서 정해진 것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R은 꼭 잡아야하겠는데 모든것은 불안했다. 나 자신 안정도 안된다면 어떻게 R을 잡을 수있을것인가 막막했다. 그러나 나는 대한민국 육군 장교가 될 사람으로서 또한 23살의 호기가 있었고 R에게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도 보여주고 싶어서 우리들의 미래 청사진을 대 발표(?)하였다. "내가 군에서 전역하는것은 1976년 6월 30일일텐데, 취직은 신속히 할 수 있을 거야. 그럼 1년 정도 결혼 자금을 모아서 그 다음해, 그러니까 1977년 5월 첫째주 토요일 정오 12시에 결혼식을 올릴거야." 하고 감히 선포하였다. 웃으면서 얘기하고 보기에 따라선 반 농담 조로 들렸을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그래도 많은 생각과 고민끝에 마래를 생각해 보고 한 말이었다. R은 갑작스런 선언에 너무 어이가 없어서 "참 내, 무슨 .. 세상일이 그렇게 자기 맘대로 된대요?" 하고 웃으며 믿는둥 마는둥 하였다.
"두고 보라고 내가 누구인가. 만일에 세상일이 마음대로 되지않고 어려움이 온다해도 걱정 말어. 나는 리어카라도 끌어서 자기를 책임 질테니까. 세상 살아 가는건 자신 있다구" 하고 자신감있게 호기를 부렸다. 그 결심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사실은 이것이 프로포즈였다. 벌써 만난지 3년째 되었지만 그런 말을 해본것은 처음이었다. R은 "응 응 알았어" 하고 허허실실로 대답하고 있었다. 우리는 장미빛 미래의 얘기에 시간 가는줄 모르다가 어두워져서야 자유공원에서 내려왔다. 사실 우리는 그때까지 몇년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겨우 손을 잡을 정도의 스킨쉽밖에는 없었다. 손도 내가 꼭 잡으면 R은 어느새 손을 빼고 겨우 새끼손가락 하나만 잡는게 다였다. 지금 사람들이 들으면 참 우습다고 실소하겠지만 포옹이나 입맞춤은 감히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며칠전 자유공원의 대화가 있고나서는 R이 알수 없는정도로 미묘하게 조금은 옛날보다 가까워 진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의 학교 시간 활용이 너무나 빠듯하니 우리는 만나는 장소를 조금이라도 가까운데 잡으려고 그 무렵부터 용산역 오른쪽 골목안에 있는 '여로다방'이라는 곳을 새롭게 만나는 아지트로 개발하였다. 시간이 넉넉할 때는 봉천동 고개넘어의 '관악산다방'을 이용하고 시간이 좀 부족할 때는 도중의 용산역으로 갔던 것이다. 그 다방은 손님도 별로 많지 않았지만 한쪽 구석부분에 커다란 기둥이 있어서 그 기둥뒤 구석 자리에 등을 보이고 앉으면 다른 자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고 카운터 계산대에서도 잘 보이지 않으니 호젓하게 둘이 앉아있기에는 아주 딱 알맞은 자리였다. 훈련과 가정교사 알바가 없는 날을 골라 그곳에 가면 이른 오후부터 배가고파 저녁밥을 먹어야 할때까지 몇시간이고 한없이 앉아있곤 하였다.
나는 본래 많은 친구 사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대학 친구는 이재억과 김원 두사람 뿐이다. 이 두 친구는 나와 R이 처음 만나기 시작할 때부터 알고 특히 재억이는 만남의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하였으니 우리 두사람 만남의 진행 경과는 이 두 친구에게는 언제나 솔직히 얘기하였다. 원이는 중곡동의 형님 댁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곳 원이 방인 다락방은 시간이 나거나 강의를 기다리는 시간에 우리들의 아지트였다. 재억이나 원이는 아직 만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 다락방에 가면 주로 우리 두사람의 진행 과정이 재미있는 화제였다.
여름방학이 되니 이번에도 병영훈련 입소가 다가왔다. 이번에는 수도권이 아닌 먼 지방의 K시 외곽에 있는 31사단이었다. 1년차때처럼 처음이 아니니까 그다지 긴장되지는 않았다. 이번이 임관하기전 마지막 훈련이니 잘 마쳐야 되겠다는 각오 뿐이었다. 삼복더위에 진행되는 병영훈련은 언제나 견디기 어려운 과정이지만 그런대로 무사히 해내고 있었다. 저녁식사후의 휴식시간이 되면 막사 뒷편의 언덕에 잠시 오르며 산책하곤 하였다. R로부터는 예의 짧은 엽서 소식이나 내가 편지로 보내라고 답장을 보내면 길지않은 내용의 편지를 보내는것이 언제나 아쉬웠다. 보고싶다는 절절한 내용의 긴 편지를 보내 줬었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러난 R은 그렇게 감정을 내놓고 펼쳐보이는 그런 성격이 아니니 어쩔 수 없었다. 저녁 햇빛을 받아 아이스크림 같은 새하얀 뭉게 구름이 뭉글 뭉글 피어 오르는것을 바라보면 마치 그 구름 속에서 R이 웃으며 내려와 내게 달려올것같은 환상에 젖을때도 있었다. 나는 그 환상이 스스로 느끼기 좋아서 저녁 식사 후엔 자주 그 언덕에 올라가는 것이 줄거움이었다. 물론 그런 그리움은 힘든 훈련의 과정을 견디는데 비할수 없는 에너지가 되곤 하였다.
여름 방학의 모든 과정들이 지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2학기가 시작되니 이번엔 교생 실습 준비에 바빴다. 여러가지 과정도 많은데 나는 욕심도 많게 교직과목까지 이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학우들은 선생할 것도 아닌데 힘들게 교직과목은 할 필요가 없다고 1학년 초부터 아예 신청하지 않은 친구들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사람일은 모르는 것이니 중등학교 2급 정교사자격증은 힘들더라도 따 놓는게 좋다고 생각했었다. 교직과목의 마지막 과정이 4학년 2학기의 교생실습인데 나는 다행히 학교에서 멀지 않은 송파구의 일신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하기로 허락을 받았다.
그 당시만해도 잠실의 시가지는 지금의 잠실사거리 부근이 전부였고 거기서 조금만 성남쪽으로 나가도 아직 논밭이 펼쳐져 있었다. 성남쪽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논둑길을 좀 들어가면 일신여상이 있다. 나는 2학년 여학생 반을 담임하게 되었다. 지도 담임선생님은 영어과목 여선생님이었다. 나는 뭔가 다른 선생님들과 좀 다른 차별화를 하고 싶어서 종례시간마다 사자성어를 가르쳤다. 새옹지마 주마가편 주마간산 등등과같은 사자성어를 매일 세개 정도씩 한자로 칠판에 써 가르치며 그 배경의 이야기를 들려주니 아이들의 흥미는 예상보다 높고 매일 재미있어 하였다.
교생실습 중 과제의 하나는 케이스 스터디(사례연구)이다. 문제학생 하나를 선정하여 한달 동안 계속 상담하며 지도하고 종료후 레포트를 제출해야하는는 것이었다. 나는 담임 선생님과 상의하여 한 여학생을 선택하였다. E는 어머니가 없이 아버지와 새엄마 밑에서 자라는 학생이었다. 몸이 성숙되고 힘도 좋아서 학교는 깡패처럼 다니고 있었다. 무단 결석이 많고 학교에 나오면 맘에 안드는 친구는 남학생 깡패처럼 데려다 패는 것이었다. 이틀후에 며칠만에 E가 등교하였다. 나는 아침 조회 시간에는 일부러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방과후 종례가 끝난 다음에 우연인것 처럼 옆으로 지나가다가 웃으며 얘기를 붙였다. "오늘은 E가 나왔네? 우리 다른 애들 돌아간후에 얘기나 좀 할 까? 이따 상담실로 좀와라" 했더니 E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시간이 좀 지나고 딴 애들이 돌아간후 안오려나 하고 상담실로 갔더니 웬걸 E가 혼자 앉아 있었다. 나를 보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따뜻하고 조용한 말투로 "E야 너 힘드나 보구나. 말하기 싫으면 얘기 않해도 돼. 나중에 니가 선생님한테 얘기하고 싶을 때 있으면 그때 아무얘기나 너 생활하는 얘기나 들려줘" 하고 내가 사춘기에 지냈던 어려운 얘기를 잠시 들려 주었다. E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듣고 있었다. 나는 혼자서 너무 오래 얘기하기도 멋적어 "그래 오늘은 어서 집에 가거라. 잘가" 하고 보내는데 E는 역시 말도 않고 풀죽은 모습으로 고개만 숙여 인사하고 돌아갔다.
이튿날 아침이 되었다. 조회시간에 들어갔더니 E가 벌써 단정한 옷차림으로 앉아있었다. 누구든 노려보는 눈의 살기가 없어지고 눈빛에 부드러운 느낌이 돌았다. 그날 종례시간에 또 "E야 좀 내려올래?" 했더니 모기만한 소리로 "네-"하고 대답을 하였다. 그때 E가 열여덟살이고 내가 스물세살이었으니 사실 교생선생님이라해도 다섯살 차이밖에는 나지 않았다. 아무튼 그날도 상담실로 가니 E는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야- E가 달라졌네 착실하게 수업에 앉아있을려니 어떠냐. 힘들지 않았어?" 하니 갑자기 E의 눈에는 눈물이 맺히였다. 나는 부드럽게 어깨를 두드려 주면서 " 그래 E야 너 힘드는거 선생님이 다 알고 있다." 하니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이었다.
평소에 그렇게 괄괄하고 말괄량이 행동을 일삼던 E의 모습이 아니었다. 방과후면 그렇게 매일 E와 얘기를 나누었다. 막혔던 말문도 터졌다. 엄마와 아빠가 이혼하고 새엄마가 들어오셨다. 아빠는 동대문 시장에서 장사를 하시니 집에 들어가면 새엄마 밖에는 없었다. E는 집에 들어가기도 싫고 마주치는 새엄마는 얼굴도 보기 싫었다. 학교도 다니기 싫었다. 아빠도 밉고 보기도 싫었다. 반항하고 싸우기만 했다. 친구들과 학교로부터도 점점 소외 되기만 했다. 아무에게도 자기 마음을 얘기할 사람도 없었다. 본 담임선생님에게도 야단만 맞았다.
나는 그녀의 얘기를 묵묵히 다 듣고만 있었다. " 그래 E야 얼마나 힘들었겠니. 나라도 너처럼 됐을것 같다" 하고 달래주니 E는 고개를 숙이고 울기만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E의 학교 생활은 완전히 180도 변하기 시작했다. 아침에는 제일 먼저 등교 하였다. 수업시간엔 얌전히 수업에 임하고 학급의 봉사활동이나 청소도 앞장서서 하였다. 학교의 이름난 깡패였던 E가 그렇게 성실하게 행동하니 다른 아이들은 더욱 일사불란하게 학급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 후에는 나는 매일 E를 만나지 않고 하루 걸러에 한번씩 상담실에서 만나 학교생활과 집에서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E는 학교가 점점 재미있어지고 아침에는 빨리 학교에 가고 싶다 하였다. 새엄마와도 전에보다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4주간의 교생 실습은 또 어찌 그리 빨리 지나갔던가 벌써 마치는 날이 되었다. 마지막 종례를 하러 들어갔다. 감성이 풍부한 여학생들이라서일까. 나는 그다지 생각지도 않았는데 언제 준비했는지 감동적이 환송식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교실 안을 풍선과 색색 테이프로 장식하고 반장과 E가 주도하여 다과와 노래와 선물등을 차려놓고 모두가 아쉬운 환송회를 열어주니 나는 정말 감동하고 말았다. 아쉬운 헤어짐의 말과 당부 그리고 꼭 한번 너희들 보러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학교를 떠나는데 모두가 교실 창문을 열어놓고 함성을 지르는 것이었다. 나는 후에 사회에 진출하여 교사로 살진 않았지만 교생실습을 하던 기억과 특히 마지막 환송회의 기억은 정말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다. 물론 그애들이 다 지금은 60대 중반의 할머니들이 되었을것이다. 특히 그렇게 섭섭해하던 E도 지금쯤은 손자 손녀 있는 할머니가 되지 않았을까.
학교로 돌아온 후 학업 마무리와 학군단 일정으로 눈코 뜰새 없이 바뻤지만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어느날 일신여상을 다시 찿았다. 아이들의 반가운 함성은 말할 수 없었다. 너무 반갑고 헤어짐이 아쉬웠지만 나도 해나가야 할 일정들이 밀려오니 그 후로는 아이들을 만나지 못했다. 다만 사례 연구를 하고 보고서를 제출했던 E만은 너무나 섭섭해 하고 선생님 보고 싶다는 연락이 와서 자양동 제과점으로 오라 하였다. 성실히 학교생활 할 것을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헤어질때 E의 눈엔 또다시 눈물이 맺혔다. 그러나 어찌 하겠는가 나의 마음엔 언제나 R이 있었던 것을.
졸업학점은 이미 남도록 따 놓았으므로 한 두 과목 시험을 치르고 나니 대학의 모든 과정은 그렇게 마무리 하게 되었다. 남은것은 학군단의 장교 임관고사였다. 육군에서 치루는 모든 시험까지를 무사히 치르고 합격하니 꿈많던 대학 4년의 생활은 어느덧 끝나고 일감호반의 캠퍼스는 하얀 눈속에 쌓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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