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어나 저 강을 건너라

일본으로 가다. 시대 변화에 대한 소고

Billy Soh 雲 響 2020. 5. 10. 21:36

1990년 1월 4-5일 새해 POA가 천안에서 개최 되었다. 나는 일본으로 출발할 날짜가 다 되었으니 발표를 할 일은 이미 없지만 그래도 회사 전체 모임이니 같이 참가하였다. 아침에 전체 개강하는 것 보고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몇가지 더 준비할 것이 남아있어서였다. 롯데 백화점에 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고 이곳 저곳 볼일을 마친후 오후 다섯시쯤 다시 천안으로 출발 하였다. 그냥 집으로 귀가해도 되겠지만 출국을 섭섭해하는 직원들이 기다리겠다고 했으니 안갈 수가 없었다. 차를 운전하여 한남대교를 건너 경부고속도로로 들어서는데 폭설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퇴근시간까지 겹친 고속도로는 금방 통행이 마비되다시피 하였다. 눈은 점점더 퍼붓고 직원들이 기다릴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급한데 이미 차는 기다시피 하였다.

 

눈쌓인 고속도로를 거쳐 천안 회의장에 다시 도착하니 거의 밤 10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직원들이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헤어지는 것을 섭섭해하며 송별의 잔을 들었다. 나도 떠날날을 기다려는 왔지만 미지의 환경으로 향하는 마음은 역시 긴장과 부담을 안고 있었다. 사실 그때만 해도 한국로슈뿐 아니라 국내 전 약업계에서도 재벌 회사처럼 자기회사 해외 지사가 아니라 다국적 기업의 타국 회사로 해외 근무를 나가는 것은 아마 내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무거운 마음을 직원들이 모두 격려해주고 부러워하니 마음은 조금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모두들 아쉬운 마음으로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며 송별을 나눈후 이튿날 나는 조금 먼저 서울로 귀경하였다. 내일이 출발일이었던 것이다.

 

1월 6일 아침 가족들과 아침식사를 마친뒤 김포공항으로 출발하였다. 당시는 아직 인천공항이 없을때이니 김포공항 국제선이 언제나 출입국장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송영을 나와 주었다. 사계절 입을 옷가지와 필요한 물건들 짐을 꾸리니 대형 이민 가방 두개가 되었다. 기대와 긴장이 함께하는 마음은 두근 거렸다. 가족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대한항공 나리타행 비행기에 올랐다. 현해탄 상공을 건너 나리타 공항에 내리니 오후 2시경이었다. 한국보다는 따뜻하지만 그래도 한겨울이니 바깥 날씨는 쌀쌀하였다.

 

여기서 이야기의 흐름을 잠시 바꿔보자.  우리를 둘러싼 역사는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며 우리들의 의식을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몰아 가는가. 지난날을 돌아보면 지금의 눈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시간들도 많았다. 2021년, 오늘의 관점에서는 나자신이 그때의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점이 많은 것이다. 1991년 1월 6일 내가 일본으로 건너갈때 우리나라의 상황은 아직 어려움이 많았다. 88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나 극동의 이름없었던 작은 나라 대한민국이 이제 막 세계무대에 데뷔하며 기지개를켜기 시작하는 시기였지만 그때만해도 일본은 인구는 일억이천이며 미국 다음의 세계 제2경제 대국이었다. 과거에 일본에 당했던 역사가 있어서 우리가 겉으로는 일본을 인정하지 않는것 같이 보였어도 사실상 우리로서 일본은 극복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이제부터 일본 근무시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자 하는데 그 당시의 한일 상황과 관점에 대하여 언급을 해두는 것이 도움 될 것 같다.  간단히 그 당시와 현재의 한국과 일본의 1인당 GDP를 비교해보면 당시의 의식이 이해가 갈것이다.

              1990년 말                2020년 말

한국         6000 달러               30600 달러

알본        36000 달러              39000 달러

 

즉, 일본의 1인당 소득은 우리의 5배 이상이었다. 그러나 당시 내가 근무하던 제약업계의 시장규모는 일본이 한국의 대략 열배로 평가 되었다. 약업계의 규모나 시설 기준 연구 성과등은 우리로서는 아직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었다. 역사적으로도 우리 고려 시대는 물론 조선 초기 까지도 우리가 일본에 앞서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 있어서 문화의 흐름은 중국에서 발전하여 한반도를 거처 일본 열도로 전달 되는 경향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발전된 문화가 흘러오는 동해쪽을 '앞쪽(오모테가와)'이라고 불렀으며 태평양쪽을 '뒷쪽(우라가와)'이라고 불렀다. 그것이 임진왜란 전인 1542년 포르투칼 상인이 최초로 일본에 온 이후 계속 되는 서양문물의 유입과 발전의 영향으로 어느때부터인가는 태평양쪽이 '앞쪽'이 되었으며 동해쪽이 '뒷쪽'이 되었다. 그 시기에 맞춰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와 그 뒤를 이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수백년간 지속했던 소위 전국시대를 끝내고 전국을 통일체제로 정비하였던 것이다.

 

일본에 가던 1991년  내가 가졌던 내심의 숙제는 일본이 한국을 앞서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체류중 저녁에 일본어학교에 다니면서 카토 선생님과도 여러번 토론을 하였지만 나름대로의 결론은 일본의 에도 시대와 한국의 조선시대에서 찾았다. 급속한 속도로 발전된 서양 문화를 흡수하여 자신들의 것으로 만든 일본과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고 성리학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도외시 하였던 조선과는 점점 차이를 보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여러가지 이유로 일본에서는 에도시대부터 민간의 교육 열풍이 불어 소위 '요미카키소로반'이라하여 서민들까지도 읽고 쓰고 주판을 놓는 교육이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1868년 실시되었던 명치유신으로 일본은 300년 에도시대의 막부를 폐지하고 일왕 중심의 통일된 국가체제를 완성하였다. 국가를 뒤집는 대 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정치 경제 문화등 여러가지의 요인이 영향을 미쳤겠지만 일본이 명치유신 통일 근대 정권을 수립하여 부국강병의 기치하에 나가게 된 기저에는 에도 300년을 통한 교육효과의 축적된 힘이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나름대로 진단하였다.

 

그후 세월은 30년이 흘렀다. 그 동안에 일어난 한일 양국의 변화는 가히 기적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본경제는 발전이 침체되고 세계 2위의 경제 대국 지위도 중국에 넘겨주게 되었다. 반면 우리 한국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반도체 조선 휴대폰 가전 등의 많은 분야에서 세계의 정상을 정복하며 일본의 소니 파나소닉등도 한국의 삼성전자에 최고 지위를 넘겨주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한국은 세계 10위의 경제 강국이 되었으며 분단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며칠전 2021년 7월 2일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한국을 개발 도상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지위를 변경하였다. 이러한 예는 세계 최초의 사례이다.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는 2000년부터 일기 시작한 한류 바람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가요 음식 춤 패션 등 수많은 분야에서 K문화가 대유행하고 있으니 참 한국인의 저력도 대단한 것 아닌가. 한국은 언필칭 미꾸라지 용된 나라이다. 이러한 시대상의 변화를 감안하며 나는 우리가 어렵던 도일 당시의 관점으로 돌아가 '일본체류기' 기술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