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망의 1989년 후트론의 해가 밝았다. 장태산에서 열린 새해 첫 POA에서 향후 한국로슈를 이끌어갈 대망의 제품 항암제 '후트론'을 발매히였다.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던 전략 발매안이 경영층의 재가를 얻어 드디어 첫 선을 보인 것이다. 한국인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위암 대장암 직장암 유방암 영역에 있어서 획기적인 임상 효과를 나타낸 후트론은 암환자의 QOL(Quality of Life, 삶의 질)을 유의하게 향상시킬 것이었다. 내가 내건 슬로건은 'Longer
Suvival(보다 긴 생존), Better QOL(보다나은 삶의 질)의 두가지였다. 암환자에게는 가장 절실한 절대 명제 이었다. 당시에는 항암요법의 기준이 '암세포의 크기를 얼마나 축소시키느냐'였지만 정작, 항암 요법으로 암세포가 축소 된 환자가 정상 세포에 까지 미친 독성으로 인하여 얼마 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면 '닥터와 환자에게 무슨 유익이 되느냐'하는 기존의 개념에 대한 부정으로 부터 출발 하였다.
실제로, 후트론을 포함한 포로토콜은 기존의 어떤 화학요법 보다도 긴 5년 생존율을 나타냈다. 다시 환언하면 "후트론은 암세포의 크기를 줄이는 율은 낮지만 암세포와 함께 환자를 오래 살리는 요법이다. 어느것을 선택해야 하나?" 하는 임상의 가치관에 관한 새로운 화두였다. 모든 임상 자료 들로 구성한 논리에 전국의 대학병원 항암요법 전문 교수들이 긍정적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이었다.
나는 전국의 대학병원을 돌며 설명회에서 모든 약리작용과 임상자료를 소개한 후에 교수들에게 결론으로서 "기존의 화학요법으로 환자의 식욕이 완전 감퇴되어 늘어지고 체중은 줄어서 나중에는 화장실도 제대로 못가게 되는게 선생님이 치료하시는 통상 암환자의 진행 과정 아닙니까? 후트론 프로토콜로 바꿔서 환자가 그래도 밥을 먹고 화장실이라도 제대로 혼자서 가게 된다면 그것은 거의 임상의 대 혁신 아닙니까? 물론 저는 임상닥터가 아니기 때문에 환자를 생각하시는 의사로서 어떤 프로토콜을 택할지는 전적으로 선생님의 선택 권한이겠죠" 하고 설파하며 결론 지었다. 나의 설명회가 끝나면 많은 질의와 토론이 오갔지만 결론적으로는 거의 대부분의 항암 요법 교수들이 수긍하고 병원에서 채용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발매 대회는 혹독했다. 신제품의 발매는 영업부 MSR들에게 강한 첫인상을 심어줘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기 때문에 교육 훈련을 강하게 진행 하였다. 제품의 약리작용, 메카니즘, 특장점 , 적응증별 임상 자료 등 모든 내용을 포함하는 메인 브로슈어 내용을 철저히 강의 하였다. 질문과 답변 시간도 모든 질문이 해소 될때까지 무제한 토론 하였다. 그 모든 내용을 지점 수만큼 슬라이드로 제작하여 각 지점에 배분하고 지점별로 자체 Presentation 연습 시간을 갖게했다. 오전부터 시작했었지만 PT훈련의 시간은 역시 정하지 않고 무제한 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에도 계속 되었다.
완전히 훈련되어 자신이 있는 MSR부터 개인 PT 공개 시범을 하도록 하였다. 물론 시험관은 나를 비롯하여 영업 총수와 개발부에서 맡았다. 한번 시범을 보여서 합격하면 다행이지만 불합격하면 두번 세번 한정 없이 밤을 새워도 계속 한다 하였다. 합격을 하지 못하면 잠도 잘 수가 없으니 모두가 불만이 있었지만 그만큼 중요한 제품이기 때문에 누구나 내 놓고 불만 할 수는 없었다. 정말 징글 징글하게 훈련하여 밤 1시경에 전원이 PT를 통과하였다. 모든 영업부 직원이 대학 교수들 앞에서 발표 할 정도의 수준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 정도의 강도로 신제품 발매대회를 진행한 제품은 후트론이 처음이었다. 아뭏든 모두 힘들었지만 그만큼 자신감만은 확실히 갖게 되었던 것이다.
발매 대회를 마치고 다시 마닐라 웍샵이 있었다, 각국 로슈가 자사의 신제품 전략을 발표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내가 참석하여 후트론 전략을 발표하였고 일본로슈에서는 시마다 료오지 상이 참석하여 일본로슈의 경영 계획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첫날에 나는 무사히 발표하고 참가자들로 부터 많은 격려도 받았는데 둘째날 발표할 시마다상이 영어때문에 걱정이 태산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친근감이 가서 저녁 식사후에 시마다상 방에가서 같이 연습해 주었다. 시마다상은 약간의 내성적인 면도 있는데다가 일본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영어가 약하니 발표에 자신감이 없었다.
나는 시마다상이 알아듣기 좋게 영어와 일본어를 같이 섞어서 얘기해 주었다. " 시미다상, 여기 있는 참가자들 모든 나라의 제약 시장 규모를 다 합해도 일본 시장보다 적지요. 근데 무슨 신경을 그렇게 쓰세요? 확 깔아 뭉개고 발표해 주세요. 자료가 잘 구성돼 있으니 그까짓거 영어좀 약하면 뭐 어떻습니까. 발표의 내용이 중요하지요. 다른 나라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규모의 일본로슈 경영 계획인데요. 자신있게 해 주세요. 아마 모두 감동할 겁니다." 하고 힘을 북돋워 주었다.
이튿날 시마다상은 나와 둘이서 연습했던것 처럼 무난히 발표하고 많은 박수도 받았다. 그때부터 시마다 상과 친해져서 매일 저녁 식사도 같이 하였다. 시마다상은 내가 같이 연습해주고 용기의 말을 해 주었던 것이 그렇게 고마웠었나 보다. 어느날 식사후에 시마다상 방에서 캔맥주를 마시며 환담하였다. 한참후 내가 " 그런데 시마다 상, 나는 일본로슈에 가서 근무해 보고 싶어요. 후트론 마케팅도 제대로 좀 공부하고 일본 시장에서의 메디칼 마케팅 경험을 꼭 해보고 싶습니다. 어떤 방법이 없을 까요?" 하고 상의 하였다. 그런데 시마다상은 의외로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소상이 그런 생각이 있었나요? 소상 정도면 가능할 것 같은데 내가 귀국하면 추진해 보겠습니다. 토리이 본부장님에게 소상에 대해 설명하고 건의해보면 않되진 않을 것 같은데요." 하는 것이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시마다상이 그정도로 긍정적인 생각을 해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전략 웍삽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시마다상으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본부장님에게 건의를 드렸고 긍정적인 대답을 들었으니 자기 소개서를 보내라는 것이었다. 아마 토리이 본부장님께서 나에 대한 건의를 듣고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진솔한 자기 소개서를 이메일로 보냈다. 그 후에 몇차례 메일이 오가며 나의 일본 파견 건은 계속 진행 되고 일본로슈의 토리이 본부장님께서는 기본적으로 나를 받겠다는 의사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것이지만 시마다상은 일본로슈의 기획부장으로서 회사의 핵심 직책과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런 부장이 나를 추천하니 본부장님은 당연히 신뢰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무렵 일본로슈에 파견되어 근무하던 스웨덴 출신 Mr. Gunar Hulting 이 한국로슈의
Pharma Director 로 전보 되어 오셨다. 나의 상사이시며 아주 합리적이고 온후한 성품이셨다. 물론 나의 일본 로슈로의 전근 문제가 진행 중인것도 잘 이해하고 계셨다. 사실은 헐팅씨가 오셔서 나의 일본 파견 문제가 더욱 실제적으로 추진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10월에 남한산성 호텔에서 후트론 웍샵을 진행하였다. 이 웍샵은 후트론의 제품 뿐 아니라 나의 도일 문제를 더욱 확고히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이 웍샵을 위하여 일본 로슈 학술 마케팅부에 강사 지원을 요청하였는데 후트론 학술 마케팅을 책임지고 있는 소마 미치로 부장이 오시게 된것이었다. 후트론을 기초부터 아주 차근 차근히 강의해 주셨는데 이 일본어 강의를 담당 PM인 내가 완전하게 통역을 해낸 것이었다. 일본어를 세번째 도전한지 불과 1년 2개월 만이었다. 소차장이 언제 그렇게 일본어를 했었는지 그 웍샵에 참가했던 전 영업부는 물론이고 중역분들이 모두 놀랄 뿐이었다. 그러나 정작 더 놀란 것은 나 자신이었다.
나도 내가 전문 항암제의 일본어 강의를 그 정도로 완벽히 통역해 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전에도 나는 내 업무 분야에 있어서는 확실한 리더쉽을 장악하는 성격이었지만 그 웍샵 후에는 마케팅부나 전략을 실행하는 영업부서에서도 나의 마케팅 전략 계획에 반발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돌아보면 나는 어학력의 효과를 정말 톡톡히 누렸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사실 냉철히 생각하면 일본어의 경우는 내가 여섯살 때 아버지에게 떼었던 천자문의 실력이 크게 도움이 되었고 의학용어가 한자 용어가 많기 때문에 한자의 음독만 이해하면 다른 사람이 볼때는 엄청난 실력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또 후트론의 제품 내용을 내가 완전히 이해하고 있으니 통역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아울러 그때 오셨던 소마 부장까지도 일본에 돌아 가셔서 나의 일본 파견을 적극적으로 동의해 주셨던 분이다. 한 사람의 한국로슈 직원이 일본으로 파견 되는데 그렇게 여러 사람의 동의와 추천을 받을 정도로 어려웠던 것은 그런 경우가 종전에 전혀 없는 예외적인 사례였기 때문이다.
일본로슈는 설립된지 100년이 넘은 전통있는 회사지만 스위스 로슈 월드 본사에서 오는 사람이외에 제3국 직원이 일본으로 오려는 예는 전혀 전례가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일본어 어학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세계 로슈그룹은 다국적 기업으로서 대부분의 나라에 회사가 설립되어있고 국제적으로 인사교류도 있으며 모든 나라의 사내 공용어는 영어였다. 그러나 세계에서 오직 한나라 일본로슈만은 영어를 쓰지 않고 자신의 나라말인 일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이 당시 세계 제2경제대국인 일본의 힘이었는지 모르지만 비록 본사에서 오는 파견 인사도 일본에 오려면 먼저 일본어가 가능해야했다.
그것이 인사 교류의 장애로서 작용하게 되고 그만큼 일본으로 전근 가기는 어려웠다. 거기에 나는 스위스 바슬의 본사도 아닌 처음으로 한국이라는 제3국에서 전근을 가려고 하는 것이니 급여문제나 생활비 지원등 모든 문제의 규정을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었다. 1989년 로세핀과 후트론등 나의 모든 담당 품목이 한국 시장에서 톱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업무는 종합적으로 순항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도일을 위한 준비에도 조금은 여유가 있었다. 수없이 일본 로슈측과 부문별로 이메일이 오가며 나의 근무 여건 규정을 만들었다.
일본 파견 기간동안 우선 급여는 일본로슈로뷰터 엔화로 받기로 되었으며 직위는 학술1부 과장이었다. 당시 엔화 급여를 우리 돈으로 환전하면 한국의 사장 수준 급여였다. 학술1부란 후트론의 학술 마케팅만을 담당하고 있는 소마 부장의 부서였다. 주택을 제공받고 전기 수도 통신 교통비등 모든 종합적인 생활비를 지원 받기로 한국 일본 로슈 양사가 합의 하였다. 정말 이러한 좋은 조건의 근무는 나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뭏든 일본로슈는 한국로슈로부터 처음으로 한 직원을 받아들이는데 있어 할수 있는 모든 혜택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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