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순조로움과 신앙의 방황기였던 1987년도 올드랭 자인과 함께 저물고 1988년 서울 올림픽의 해가 밝았다. 그 무렵 봄에 석사 학위를 마친후 나는 하나의 고민을 오랬동안 하고 있었다. 무엇인가 다음 단계로 또 나아가야 하는데 영역은 두가지였다. 석사 학위를 마쳤으니 박사 학위를 할 것인가 아니면 현업의 강화를 위하여 제2외국어 하나를 더 도전할 것인가. 선택은 두가지였다. 당시 웬만한 대학의 박사 과정은 영어 실력으로 통과가 가능한 상태였다. 대개 박사 과정을 하는데는 5년이 걸리고, 제2외국어에 도전하는데는 물론 평생 공부를 지속해야 하는것이 외국어이지만 초기 3년간은 모든것을 제쳐두고 엄청난 집중을 요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초기 분출력이 없으면 외국어라는 로케트는 떠오르지를 못하는 것이다.
내가 비교하는것은 두가지중 어떤 한가지를 완성해 냈을때 가질수 있는 실제 소득 결실이었다. 물론 두가지 다 하면 금상첨화겠지만 어차피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박사학위는 하기는 힘드는데 비해 평생 명예와 호칭의 측면이 강하지 실제 소득과는 큰 관계가 없었다. 사내에서도 박사학위 소지자가 몇명 있었지만 학위 소지자라고 해서 급여가 높거나 한것은 아니었다. 제2외국어는 실력 여하에 따라 해외 근무 기회를 확보하는데 유리하며 해외 근무는 경제적으로나 경력관리 측면에서 많은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영어도 끝이 없는 것인데 제2외국어에 도전하자고 쉽게 결심이 서지도 않았다. 그것은 업무에 큰 도움이 되겠지만 그만큼 어려운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그 두가지를 이리할까 저리 할까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는데 1년 반 이상이 걸렸다. 본래 내 성격의 한가지 결점은 무엇을 실행하기 위해 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데 너무나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결정이 끝나면 전광석화처럼 신속히 밀어부치는 성격이다.
그때 로슈그룹은 벤조디아제핀계에서 항생제로 포트폴리오를 성공적으로 확장하였으나 이제 다시 항암제 분야로 진출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물론 이미 로슈는 5-Fluorouracil을 개발하여 항암 화학요법의 기본 약물을 제조하고 있었지만 라인을 더욱 확장하여 정상세포에는 작용하지 않고 암세포의 DNA와 RNA 합성을 선택적으로 저해하는 경구용 항암제 Doxifluridine(독시플루리딘) 제제 Furtulon(후트론) 발매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제품 후트론은 미국 로슈에서 최초로 합성에 성공하였으나 먼저 제품화 된곳은 일본로슈였다. Phase 1,2,3,의 모든 단계 임상을 성공적으로 실행하여 발매하였고 Phase 4 임상까지 진행하고 있는것이 일본이었다. 그 제품 분야에서는 세계로슈 그룹을 선도하고 있었다.
로슈는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 자회사가 있는 다국적 기업이니 만큼 제품의 임상자료나 마케팅 자료들은 모두 공용어인 영어로 되어있어서 PM들은 대부분 스위스 바슬의 본사에서 오는
Promotional Package를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독 후트론만은 영어 자료가 없고 모두가 일본어 자료였다. 즉, 후트론을 담당하는 PM은 일본어가 필수적이었다. 항암제가 본래 어렵고 국내 항암제 시장의 경쟁도 치열하니 어떤 PM도 후트론이 자기에게 떨어질까봐 신제품 할당 회의가 있으면 이런 저런 핑게를 대고 출장을 나가 버리곤 하였다. 거기에 영어야 모두 하지만 영어 가지곤 않되고 일본어를 해야 하는데 일본어 되는 PM이 아무도 없었다.
회사의 최중요 제품이 될 후트론을 누가 담당할 것인가. 나는 로세핀이라는 대 제품을 하고 있으니 처음부터 논외였었다. 그러나 계속 담당자를 정하지 못하고 모두들 피하기만 하니 이헌구 부장님이 어쩔 수 없이 나에게 말씀 하셨다. "모든 PM들이 다 후트론을 못하겠다고 피하기만 하니 어떡하나. 아무래도 소차장이 좀 해봐야 되지 않을까?"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저는 어떤 일이든지 업무에 겁내지는 않습니다. 말씀하시는 대로 후트론 담당해 보겠습니다. 다만 한가지 도와 주십시오. 저 또한 일본어가 되질 않으니 새로 도전하여 시작해야 하는데 회사에서 학원비만 좀 지원해 주세요." 하고 말씀 드렸다. "물론 그건 당연히 지원해 줄테니까 잘 해봐요." 하고 말씀하셔서 내가 후트론을 담당하기로 결정된 것이 8월 초였다. 이렇게 1년 반동안 박사학위냐 제2외국어냐를 선택하지 못하고 고민하던 문제가 회사내 상황에 따라 자연히 제2외국어인 일본어 쪽으로 결정 되었다.
온 국민의 환호 속에 서울 올림픽이 끝났다.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무대에 데뷔하여 선을 보이게 된것이다. 아시아의 이름없는 작은나라, 세계인들이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나라, 한국전쟁의 고아나 폐허의 이미지로 알려진 나라가 수많은 고비와 시련을 딛고 일어서 산업화에 성공하고 이제 막 세계를 향해 부상하려고 기지개를 켜는 것이었다. 이때 한국로슈에서는 후트론의 발매와 담당 PM까지 결정 되었던 것이다.
8월 24일부터 몸의 컨디션이 않좋아 지더니 급작스럽게 편도선이 심하게 붓고 열이 나기 시작하였다. 지독한 감기에 걸린것이다. 밤중에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일어나 앉아있곤 하였다. PM이 되면서 스트레스가 많아져서 그런지 조금씩 담배도 피웠었는데 담배는 커녕 식사를 하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닥터에게 보이고 약도 처방받았지만 상태가 쉽사리 호전 되지 않았다. 평소에 담배를 많이 피우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끊으려고 전에 노력 했었는데 두번이나 실패한 적이 있었다. 모든일이 그렇지만 하려던 것을 실패하고 나면 자괴감이 크기때문에 시도하지 않느니만 못한 경우가 많다. 4, 5일 지난 후부터 감기 증상이 조금씩 호전 되기 시작하였다. 사실은 9월 1일부터 처음 시사일본어 학원에 나가려고 등록해놓고 기다리고 있던터라 심한 감기때문에 많이 걱정하고 있었는데 한시름 놓을 수가 있었다.
8월 업무가 마감되고 9월 1일이 되었다. 감기증상은 완전히 나았다. 그러나 나는 일주일 넘어 피우지 않았던 담배를 다시 피우지 않기로 했다. 전에 친구가 말한 "담배를 억지로 끊으려면 어렵다. 지나다 보면 끊을 수 있는계기가 틀림없이 올테니 그 기회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된다." 고 했던 기회가 지금아닐까 생각했다. 어찌됐든 아퍼서 반 강제로 담배를 이미 일주일 끊었던 것이다. 거기에 일본어 공부도 전에 두번 시작했다가 실패했던 경험이 있는데 이제 세번째로 다시 시작하니 나는 무언가 한가지 나 자신에게 성공하겠다는 결단의 표시를 보이고 싶었다. 그것이 끊기 어려운 담배를 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생일도 다가오는데 일본어라는 새로운 무대로 항해를 시작하는 것이다. 끊겠다고 결정함과 동시에 담배를 완전히 싹둑 끊었다. 그 후에는 담배를 입에 대 본적이 없다.
9월 첫날 업무를 정리하고 6시에 종로2가 시사일본어학원에 갔다. 등록해 두었던 초급반에 들어가니 30명 정도 되었다. 교재는 외국어대학 일본어과 교수를 역임한 박성원교수의 '표준 일본어교본'이었고 담당은 이금원 선생님이었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어학 공부를 할때 학원과 선생님의 선택은 대단히 중요하다. 영어든 일어든 열성을 가지고 공부하려고 학원에 갔는데 그 학원이 무언가 자신과 맞지 않거나 또는 학원은 좋다고 해도 담당 선생님의 교육 방법이나 매너가 자신과 맞지 않으면 대개는 중도에 탈락하게 되고 실패의 원인이 되는 수가 많다.
다시 말하면 학원과 선생님의 좋은 선택은 이미 절반의 성공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선택은 아주 운이 좋았다고 할 수있다. 시사일본어학원은 여러 어학을 가르치는 잡화점 학원이 아니라 일본어 전문의 단일 메뉴 학원이었다. 거기에 이금원 선생님은 미혼의 여자 선생님인데 그 열성이 대단했다. 쉬는 시간도 없이 가르치다가 후에 강단에서 쓰러지시기도 했던 적이 있다. 본인으로서는 물론 지나친 무리였지만 가르치고자 하는 그 열성만은 따라갈 선생님이 없었던 것이다.
옛날 학생 시절과 동아제약 부산 시절에 일본어에 도전해본적이 있으나 다 잊어버려서 히라가나, 카다카나부터 다시 외웠다. 애들 둘을 구일역 근처 수영장에 들여보내 놓고 끝나고 나올때까지 포니2 찻속에서 혼자 가나를 외웠다. 학원에서는 언제나 맨 앞자리에 앉아 이금원 선생님과 눈을 맞추며 공부하였다. 학원 공부에 성공하는 요령은 언제나 선생님이 자기에게 주목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예습 복습을 철저히 하여 선생님의 질문에 단골로 대답해야 하며 또한 다른 학생에게도 도움이 되는 적절한 질문을 계속 하다보면 선생님이 싫어도 그런 학생에게 주목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요컨대 선생님과 주거니 받거니 양방향 소통이 되도록 수업을 유도 하는 것이다. 영어나 다른 과목도 학원가서 공부하는 요령은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런식으로 하다보니 일본어 공부가 너무 재미 있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학생은 수업에 흥미와 집중도가 떨어져서 탈락하게 되는 것이 대부분의 학원수업 추세이다.
30명이 시작했는데 첫달 지나고 나니 20명이 되고 두달이 지나고 나면 10명이 된다. 1년이 된후에 남아있는 학생은 나를 포함해서 3명밖에 없었다. 1년을 버텼으면 어느정도 자기 구동력이 형성되어 계속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형성된다. 일본어를 시작한지 두달쯤 되었을때 예비군 동원훈련이 나왔다. 1주일간 부대에 들어가니 물론 회사도 못가지만 학원에도 갈 수 없었다. 나는 교재를 가지고 입소하여 매일 학원에서 진행했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진도만큼 혼자서 철저히 공부하였다.
그렇게 매일 일주일을 지내고 학원에 갔을때 선생님의 진도와 내가 공부한 진도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그렇게 3개월의 고비를 넘겼다. 일본어는 3개월이 고비이다. 상일단 하일단 동사 변화와 수동태동사 사역동사 부분에서 대부분 나가 떨어지고 만다. 일본어와 한국어가 어순이 같아서 처음에는 재미있게 느껴지지만 3개월 정도의 과정에서 한국어와 다른 용법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고비를 이해하고 넘어가게 되면 단어와 음독 훈독등 암기해야 할 것이 많아지긴 하지만 공부에는 가속도가 붙게 된다.
일본어 3개월의 고비가 막 넘어갔을때 해외 출장을 가게 되었다. 마닐라에서 AAA(아시아, 아프리카, 오스트랄리아) 지역 항생제 Product Manager 들의 웍샵이 있었다. 나는 아직도 외국음식에 대한 적응이 잘 되어 있지 않았다. 마닐라 힐튼호텔에서 진행중인 웍샵에서 양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을 하였다. 식사를 제대로 못하니 힘이 없고 의욕도 떨어졌다. 한번은 일과후 저녁 먹을 한식당을 찾으려고 택시를 대절해 헤매다가 마닐라 가든 앞에있는 한식당 한곳을 택시 운전사가 겨우 찾아내 허겁지겁 식사를 한일도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웍샵 기간동안에 처음으로 커피맛을 알았다. 매일 아침 가벼운 아침식사를 하러 로비의 카페에 내려가면 갓 구운 빵과 원두커피를 머그잔에 가득히 따라 주었다. 나는 전에도 커피를 마시긴 했지만 맛은 제대로 알지 못했는데 설탕도 넣지 않은 그 원두커피의 향과 씁쓸하면서도 구수한 맛이 얼마나 좋았던지 그때 처음으로 '아 이래서 커피를 마시는구나' 하고 커피맛을 이해했던 것이다.
아뭏든 그때 마닐라 출장에서 돌아와 나는 또하나의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내가 서양 음식 하나에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여 먹지 못하고 힘이 빠져 업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무슨 수로 세계의 인재들이 경쟁하는 다국적 기업의 PM으로서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말도 되지 않는 너무나 기본적인 요건이라 생각했다. 양식뿐 아니라 세계 각국을 출장하고 업무하려면 어떤 나라의 현지 음식에도 즉각적으로 적응이 가능해야 했다. 된장 체질을 버려야 했다.
나는 한식 미련을 철저히 버리고 내 식성을 완전히 바꾸기로 결정했다. 음식때문에 곤란을 겪었던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집에 오자 마자 아내에게 선언했다. "나 이제 김치 안먹어. 가능하면 한국 음식도 주지마. 나 자신 체질을 양식으로 강제로 바꾸려고." 하고 부탁하니 아내도 놀랐다. 그렇게 하여 나의 음식 체질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그 후에는 양식은 물론이고 어느 나라를 가든 그 나라의 음식밖에는 먹지 않았다. 그리고 현지 음식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즐거운 일이었다. 오랜 훗날의 일이지만 나는 지금 현재도 한국 음식에는 전혀 미련이 없다. 물론 어떤 음식이든 막론하고 맛있게 먹긴 하지만 오늘 점심에 굳이 한식과 양식 두개를 고르라면 양식을 고른다. 참 간단한것 같지만 식성을 자기 강제적으로 바꾼다는 것은 나로서는 또 하나의 엄청난 변화였다.
일본어를 공부하는 기간에 나의 집중력은 통상을 벗어난 초 집중 상태였다. 그만큼 이번에야말로 꼭 일본어를 성공하리라는 집념과 목표의식이 강했던 것이다. 1988년 9월 1일 일본어를 시작하는 날에 나는 주요한 친구들에게 "내가 아무래도 1년 정도는 만나기가 어려울것 같아. 연락 잘 못하더라도 이해해라" 하고 전화를 하여 양해를 구하였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너무 요란스럽게 공부한다하여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친구들은 내 성격을 이해 했을 것이다. 그리고 포니2 차안에 있던 카셋트 음악 테이프및 모든 자료들을 완전히 싹 치우고 차 시동을 검과 동시에 오로지 일본어 테이프만 들었다. 그리고 그날 배운 새로운 단어나 문법 용례 등을 완전히 암기하기위해 3M 노란 딱지에 깨알같이 써서 사무실 책상앞, 서랍 책꽃이 , 집 화장실 안, 차 안 등 내가 이동하는 모든곳에 붙여두고 틀림없이 그날 내로 완전히 소화 했다.
그리고 한달이 지나자 마자 이금원 선생님에게 부탁하여 일본인 친구를 소개 받았다.한달 밖에 안된 되지도 않은 회화 실력으로 오전에 한번 오후에 한번 휴식 시간에 10분 정도씩 엉터리 수다를 떨었다. 오후 다섯시 반쯤 충정로 종근당 빌딩 11층 사무실을 나와 종각역 조계사 아래 시사일본어학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저녁 7시쯤 저녁을 먹고 다시 회사에 돌아와 업무를 정리 마감한후 저녁 10시경 집에 도착 하였다. 잠시 휴식한후 다시 예습 복습을 시작하여 밤 1시까지 공부하였다. 그리고 아침 6시에 일어나 아내가 싸준 샌드위치를 가지고 7시에 사무실에 도착하면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직원들이 출근하여 업무를 시작하는 8시 30분까지 혼자 다시 암기와 예습 복습을 하였다.
2주에 한번은 안국동의 일본문화원에 가서 일본 영화를 보며 워크맨으로 카세트 녹음을 하여 차속에서 테이프가 늘어나 제대로 들리지 않을때까지 수도 없이 계속 듣고 또 듣고 하였다. 그때는 토요일도 오전까지 근무했다. 매주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 오후에는 일본인 친구를 만나 관악산이나 청계산을 등산하였다. 몇시간 동안 친구와 같이 지내면서 실제 생활에서의 회화를 많이 연습하였다. 산에서 내려와 비빔밥이나 갈비탕을 사주면 친구는 너무나 고마워 하였다. 그때 서울 강남역 뒤 역삼동에 일본인이 집단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통일교 신자들이었다.
일본에서 대부분 집안도 좋고 학벌도 좋은 친구들이 어떤 경로를 거친건지 한국 통일교 신자가 되어 한국에 와서 고행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새벽에 세계일보 신문을 배달하고 식사는 보리밥에 소금이었다. 나는 어지간한 어려움은 어려움으로 알지도 않는 내공인데 나도 먹기가 어려운 정도였다. 그러니 비빔밥이나 갈비탕만해도 그 친구들에겐 호사였다. 나는 어차피 친구도 당분간 만나지 않으니 용돈은 오직 일본어 공부와 관계되는 것에만 썼다. 그런 생활을 꼬박 1년을 지속하였던 것이다. 회사 업무와 일본어의 집중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생각하지를 않았다.
그렇게 하여 1년을 지냈을때 웬만한 일본어 책은 거의 읽을 수 있게 되고 회화가 가능하며 후트론 문헌의 번역과 통역이 가능하게 되었다. 기적과 같은 일이었지만 거기에는 다른 사람과는 좀 다른 환경의 영향이 미쳤다고 할 수있다. 다름이 아니라 초등학교 어린시절 일본에서 직장생활 하시다가 해방 직전 귀국하신 아버님이 계속 듣던 일본방송의 영향이 분명히 있었다. 당시 아버지가 금성 7석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차지하시고 일본어 방송만 들으시니 좋아하는 어린이 방송을 듣지못해 속으로는 짜증이 났었다. 그러나 그때 자신도 모르게 귀에 익은 일본어의 억양은 완전 처음 쌩짜로 공부를 하는 학원 친구 들과는 엄청난 차이가 났다. 어학이란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몸에 젖은 그 느낌이 생각지도 못한 시점에서 발현이 되는 것이었다. 다른 얘기지만 영어 공부도 유창하게 회화를 구사하던 형의 영향을 엄청 받았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어학은 그렇게 어린시절의 경험이 성장한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일본어를 이해하고 구사하게 되었을때 영어에서는 특별히 느끼지 못하였던 가슴속이 확 터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영어는 워낙 어린 시절부터 오랜 세월을 공부해 왔기 때문에 그 과정이 길고 언제부터 구사하게 되었는지 그 시점이 명확치가 않고 이미 다국적 기업에서 영어로 회의하고 기획, 토론, 보고 등 공용어로서 생활하고 있으니 일본어에서와 같은 충격을 특별히 느끼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어의 경우는 단기간 동안에 상상을 초월하는 집중력을 발휘하여 극복하고 전에는 읽을 수도 없었던 일본 책들을 읽으며 나는 마치 어둡고 긴 터널을 천신만고 끝에 빠져나온 것 같았다. 어둠속에서 튀어 나왔을때 눈앞에는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지고 광명의 햇빛이 눈부시게 대지에 쏟아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어떤 일본어 원서도 다 볼 수가 있었다. 그것은 터질 것같은 희열과 넘치는 하나의 새 세상이었다.
하지만 외국어 수련의 길이란 익히기도 어려운 것이지만 그 수준을 유지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영어와 일본어 두개의 외국어를 유지하기 위하여는 매일 사용하지 않으면 않된다. 다국적 기업 현역시절에는 물론 그 두 언어를 다 현업에서 업무상 매일 사용 했으므로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도 두 외국어에 어떤 형태로든 매일 한시간 정도의 사용을 하고 있다. 그렇게 하여도 현업 시절에 비하면 알고있는 단어나 전문 용례의 사용 실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는데 만일 TV 채널의 NHK나 CNN 등을 듣거나, 두 언어의 책을 보거나, 영어 무선이나 일본어 무선에서 매일 현지인들과 채팅을 즐기지 않는다면 실력의 추락은 급격히 떨어지고 말것이다. 그러기에 외국어는 밥먹고 잠자듯이 하루도 빠짐없이 그 외국어로 즐겁게 놀지 않으면 유지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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