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어나 저 강을 건너라

산학병진 노선의 고달픈 생활

Billy Soh 雲 響 2020. 4. 7. 09:52

전에는 잘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 무렵 나는 스스로가  목표지향적 동기 유발이 엄청 강한 성격이라는 것을 느꼈다. 무엇인가를 하지 않고 정체되어있는 느낌을 견딜 수 없었고 무엇인가를 성취해 내지 못하면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 나는 영업 경력이 7년이라 길고 마케팅의 경력도 없이 비교적 늦게 그것도 한국 회사가 아닌 다국적 기업 제약마케팅의 Product Manager가 되었다. 외람되지만 성공의 길로 들어 설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지금 돌아보면 몇가지의 확실한 이유가 이었다. 

 

첫째는, '간절한 목표'였다. 전술한 바 있지만 내가 PM을 시작하던 시기는 그야발로 '절박' 그 자체였다. 엄청난 실패를 뒤로하고 입사했기에 조직생활의 성패란 이제 내 인생 전체의 성패를 가름한다는 절벽 위의 면도날 위에 서있는 상황이었다. 단 한번 주어진 기회에 실패란 상상할 수도 없는 때였다. 그것은 스스로를 엄청나게 몰아 부치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었다. 참 그때를 돌아보면 웃음도 나오지 않지만 업무의 중앙통제자 위치에 있었기에 사내의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이건간에 자기 업무를 확실하게 장악하지 못하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거나 회사 전체에 손실이 가는 행위를 하는 사람을 나는 결코 용인하지 못하였다.

 

당시 말도 되지않는 나의 논리는 "왜 자기 업무와 목표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당신이 있어서 내가 목숨을 걸고 있는 회사의 목표 진로에 손상이 가야 되는냐. 안되겠으면 신속히 물러나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혼자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길길이 뛰면서 대갈 일성 뒤집어 엎으니 당하는 상대방으로서는 황당하여 견디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그때 나의 직위는 고작 과장이었다. 직위는 과장이나 직책은 내 분야 전체를 총괄 진행 통제하는 업무이기 때문에 영업부나 관리부서의 직위가 높은 분이라 하더라도 나의 황당한 당위성의 갈쿠리에 걸리면 가차없이 당해야만 했다.

 

당혹스러운 에피소드도 있었다. 그 때는 3개월이 Product Marketing Cycle 이었다. 즉, 3개월에 한번씩 각 PM은 자기 담당 제품의 POA(Plan of Action)를 기획하여 상사의 승인을 받고, 다음은 사장 부사장을 비롯한 영업 총수와 임원 전체가 참석한 회의에서 자신이 기획한 POA를 발표하여 통과 되어야 했다. 그 경영회의에서 승인을 받으면 3개월에 한번씩 PM 전체 품목 전략을 책자로 제작하여 영업부에 배포하고 전사 POA Meeting에서 영업부를 교육하여 필드에서 적용 활동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POA의 기획이란 PM의 역량 그 자체이며 밤을 새워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내고 만일 경영회의에서 승인을 받지 못하고 퇴짜를 맞으면 그야말로 한없이 무능한 PM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시기 PM들의 스트레스는 대단했다.

 

다른 경쟁사는 물론, 동료 PM들이 이미 써먹은적 있는 프로젝트 아이디어나 Action Plan(활동 계획)을 재탕 인용 기획하거나 하면 창의적 마케팅의 아이디어가 부족한 멍청한 PM으로 보이기가 일쑤였다. 언제나 무엇인가 새로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액션 플랜으로 개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하물며 그 뉴 아이디어가 눈이 번쩍 뜨이며 성과가 예측 되어야 모두의 각광을 받으니 그 압박감은 대단했다. 너무나 몰두하여 POA 머리를 쥐어 짜내다 보면 정리가 되지않는 복잡한 생각으로 잠이 드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한밤중이나 새벽 꿈에 그 아이디어가 나타나는 경험이 나는 몇번이나 있었다. 사람의 영감과 암시라는 것이 그렇게 기묘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데 꿈을 꾸었던 그 전략 아이디어가 아침에 깨어나면 생각이 나지 않는 일도 있었으니 나는 그런 기획 시기에는 언제나 잠들기전 머리맡에 메모지와 볼펜을 준비해 놓고 터치 램프를 놓아두곤 했다. 아이디어 꿈을 꾸다 깨면 바로 머리맡의 불을 켜 한자의 메모라도 해두고 다시 잠든다, 그러면 아침에 기억이 정확히 나는 것이다. 정말 혼신의 영감을 짜고 뽑아내는 전략이었다.

 

1986년 어느 싸이클에 그렇게 만든 내 POA 전략과 활동계획을 경영회의에서 발표하게 되었다. 확신에 찬 필승의 신념으로 발표를 마쳤는데 이영호 사장님과 케스터만 집행 부사장님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때 영업 총수는 입사하신지 얼마 되지 않은 L상무님이셨다. 물론 과장인 나에 비해 연세도 높고 경력도 많은 분이셨다. 그런데 입사하신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분이 운나쁘게도 내가 프레센테이션을  끝냈을때 나의 Rocephin POA 안에 태클을 거셨다. "소과장, 그건 그렇게 하면 안되지. 그게 아니고 .." 하며 자기 논리를 펴는 것이었다. 나는 길게 듣지도 않고 "그만하세요" 하고 강한 어조로 말을 짤랐다. 명색이 영업총수 상무이사인데 전체 경영회의에서 새파란 PM 과장에게 망신을 당한 것이다. 자존심의 손상을 받은 L상무는 약간 흥분해서 소리를 높였다. "내가 항생제 시장을 잘 알고 있는데 소과장 왜 이렇게 건방져?" 나의 대책없는 광기는 거기서 폭발하고 말았다. 목숨을 걸고 밤을 새운 나의 기획안에 딴지를 거는 인간은 이미 직책이고 뭐고 눈에 뵈는게 없었다.

 

나는 사장님 부사장님과 모든 중역들이 동석한 대 회의라는것도 순간 잊어 버리고 감정이 폭발하여 영업상무에게 소리를 질렀다. "쥐뿔도 모르면서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자빠졌는 거요? 입 닦치지 못하겠소?" 이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사고였다. 전략 발표를 하던 PM 과장이 그 전략을 받아 수행해야하는 부서의 총수인 영업상무에게 도저히 해서는 않되는 폭언을 벽력이 치는 고성으로 호령을 한것이다. 순간 회의실은 살어름판처럼 얼어붙고 영문을 모르는 닥터 케스터만 집행 부사장님도 얼굴이 벌개져서 무슨일이냐고 옆의 임원에게 묻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내 행동은 앞뒤 상관없이 분노 조절 장애가 폭발한 형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가슴 속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밤잠을 설치며 고민하고 심지어 꿈속에서까지 계시를 받아 완성한 전략 POA 안인데 입사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영업상무가 마치 자기 직위 직책을 과시라도 하듯 눈빛이 핏빛이 되어 광기의 신념으로 발표하는 PM에게 섣부른 다른 의견으로 태클을 걸었으니 그가 운이 아주 나빴던 것이다. 세상이 다 깨져 나가도 나는 그런 행동은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 전략이 신의 안이 아니고 결점도 있을 수 있었겠지만 그런식으로 공개 석상에서 딴지를 걸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만일 그 상황에서 그 영업 상무가 참지 않았었다면 나의 하늘을 찌르는 자존심과 젊은 혈기에 어떤 더 험악한 장면이 터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무렵의 내 전략안은 필드에서 막 꽃을 피워가는 중이었고 어떤 제품의 전략보다도 우선적으로 실행되고 있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더 나의 자존심과 방만한 자신감의 행동이 터졌는지도 모를일이다.

 

그런데 회의가 끝나고 참석자 전원 회식이 있었다. 나의 직속 상사이신 이헌구 부장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소과장, 어찌됐든 같이 생활할 분인데 풀어야 되지 않겠어? L상무님한테 술한잔 드리며 죄송하다고 사과하지." 하시는 것이었다. 나도 시간이 좀 됐으니 흥분도 가라앉고 너무했다는 생각도 있어서 술한잔을 따라 드리며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였다. 그런데 그 회식석상에서 그 L상무님이 술이 취해서 다시 "이런 건방진놈, 너 그럴수 있는거야?"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순간 나도 사과하려던 마음이 사라지고 화가 나서 맞대꾸를 하는데 곁에서 이부장님이 내 팔을 끄시며 말리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있다가는 다시 시작 될것 같아서 다른 테이블로 가버리고 말았다. 아뭏든 그일 끝에 L상무님은 한국로슈에 적응을 못하시고 한달후에 사직해 버리고 말았다.

 

성공 마케팅의 첫번째 이유가 길어졌지만 따지고 보면 둘째, 영업부를 끌고 나가는 리더쉽이나 셋째,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될때까지 한 방향으로 추진해 나가는 실행력과 넷째, 다른 사람의 반대에 쉽게 굴복하거나 바꾸지 않는 배짱 등의 이유도 결국은 '간절한 목표'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종근당은 종전의 기술 제휴 회사들과 합작회사를 설립하였는데 한국로슈 , 한국롱프랑 등이다. 2년에 한번정도 5월 주말에 날을 정해 구로구 오류동에 위치한 우신고등학교에서 합동 체육대회를 개최 하였는데  1986년 그해에 열린 체육대회에서 한국로슈 팀은 내가 전체 지휘를 맡았다. 아침에 우신고등학교 스타디움에 가보니 종근당 영업팀 생산팀 관리팀이 사열석 맞은편 정면에 위치하고 한국로슈 한국롱프랑은 좌우 귀퉁이에 꿔다논 보릿자루같은 들러리 위치였다. 나는 자존심이 너무 상하였다. '이놈들 계열사 합동체육대회를 통해 화합의 분위기를 만들자더니 누구를 들러리 취급하나' 하고 밸이 끓어 올랐다.

 

개회식을 하고 회사별로 선수단 입장을 하는데 다른 회사들은 보무도 당당하게 손을 흔들며 "우로 ~ 봣!" 하고 걸어서 사열대를 통과 하였다. 내가 지휘하는 한국로슈 팀은 미리 계획을 세워 구보로 사열대를 통과하며 힘찬 구호와 함께 오른팔은 주먹을 불끈 쥐어 구보 박자에 맞추어 하늘과 땅으로 내 지르도록 하였다. 일견 보기에는 사열대를 향하여 주먹을 내 지르는 것 비슷하게도 보였다. 이것은 죄석 배치 때문에 빈정이 상한 나의 조롱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열대의 임원들은 깜짝 놀랐다. 뭐 이런 사열이 다 있나 하고 당혹스런 표정이 역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왜 한국로슈가 그런 불손한 행동을 하는지 진짜 이유를 알려면 폐회식까지 기다려야 했다.

 

하루종일 축구, 남여 배구, 줄다리기 등 체육 행사가 이어졌다. 오후 5시쯤 체육 순서가 끝나고 개회식과 같은 형태로 집합하여 시상식과 폐회식이 열렸다. 시상식과 훈시까지 폐회순서가 끝나고 사회자의 "이상으로 종근당 계열사 합동 체육대회의 모든 순서를 마치겠습니다."는 멘트가 이어졌다. 그러면 질서 정연하게 각 회사별로 퇴장이 이어져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사회자 멘트가 끝나는 순간과 동시에 철제 호각을 찢어져라 불며 엄청난 소리로 구령을 외쳤다. "한 국 로 슈 ! 뒤로~  돌앗 ! 뛰어~ 갓!" 하며 급작스럽게 뛰어서 퇴장했다. 마지막을 깽판친 것이다. 하루종일 화났던 것을 분풀이 한 것이다. 모든 다른 회사와 사열대의 임원들까지도 깜짝 놀랐다. 사회자가 마이크로 급박히 소리쳤다. "한국로슈 원위치, 한국로슈 제자리 ---!" 나는 구보로 퇴장을 지휘하다말고 돌아서서 단상을 향해 소리쳤다. "이 ㅇㅇ들아 니들끼리 잘 해쳐먹어. 우리가 너희 들러리냐. 이 ㅇㅇ들아" 하고 계속 구보로 퇴장을 지휘하여 장내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이튿날 오전 내내 체육대회 평가 임원회의가 종근당 본사에서 열렸다. '어제 로슈 지휘한 그놈이 누구냐. 당장 짤라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이영호 한국로슈 사장님이 변명하시느라 진땀을 빼셨다한다. 점심시간 지나 들어오신 사장님에게 내가 불려갔다. 엄청난 야단을 맞았다. 그러나 짤르겠다는 말씀은 하시지 않았다. 성깔은 있지만 업무 목표도 성격대로 완전히 해내니 체육대회 일 가지고 짤르기까지는 하고 싶지 않으셨던 것이다.

 

내 젊은 날은 그랬다. 목숨을 걸고 업무를 진행하였고 내 제품 성공 가도에 방해가 되는 일이나 사람은 어떻게 하든 제거하고 앞으로 앞으로만 사정없이 직선 돌진해 나갔다. 어떤 경우에도 내 자존심을 건드리면 꼭 댓가를 되돌려 주었다. 업무든 생활이든 내 인생의 전환점에서 '나는 두번의 기회가 없다. 이 한번의 기회에 성공해야만이 내 종전의 뼈아픈 실패를 보상받는 것이다.' 라는 절박한 명제가 나를 그 정도로 예측이 되지 않는 독불장군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참, 지금 생각하면 창피한 일도 있었고 민망하기도 하지만, 그땐 그랬다. 젊음의 열정과 자존심과 객기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전력을 투구하여 회사생활을 해나가는 중에 또한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의 마케팅 석사과정 또한 그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두가지 다 제대로 하기 위하여는 열심히 해도 벅찬 일인데 회사에서 그 정도로 진을 빼서 일하니 학교 공부에 아무래도 집중도가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몸 하나 가지고는 도저히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급기야 석사논문 제출 자격시험의 필수과목중의 하나인 'Operation Research' 시험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나는 다시 공부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민끝에 대학원을 일단 한학기 휴학 하기로 하고 업무 보강을 위하여 한학기 서강대 영어 연수원에 등록하였다. 영국인인 Mr. Edward 교수와 함께한 한학기는 나의 영어 강화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한 그때는 일요일이 되면 미8군 Memorial Church의 Episcopal Church (성공회) Choir(찬양대) 멤버로 활동하였다. 매 주일 아침 7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용산의 미8군 North main

gate를 통과하였다. 내 포니2 차 앞유리에는 패스가 붙어 있어서 언제나 자유롭게 통과했다. 30분정도 연습을 하고 미사 시간에 찬양을 드렸다. 예배가 끝나면 자유롭게 커피와 빵등을 먹으며 미국인들과 교제 하였다. 당시 슐츠 국무 장관의 전 보좌관 출신과도 자주 얘기했었는데 그때 세계 정세 분석과 특히 중동정세에 대해 정확한 진단을 내리는 것을 보고 과연 미국이 세계를 경영하는 강대국이구나 하는 것을 많이 느꼈다. 나의 관심은 한반도나 북한, 한일 , 한중 관계 등이 주 관심사인데 그는 세계 전략을 얘기하기 때문이었다.

 

후의 얘기지만 미8군 성공회교회에서 7년간 찬양대 멤버로 활동했던 경험은 영어의 강화 향상이나 음악적인 면 외에 내 어린시절 부터 이어온 태생적 기독교인, 이른바 Born Christian 으로서의 신앙관은 물론 내 인생 전체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나는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님에 의해 유아세례를 받은후 평생 교회에 다녔고 신앙의 형태에 대해 의문을 가져 본적이 없었다. 성공회는 영국 정교회인데 형식은 가톨릭식 미사이고 내용은 개신교 식이었다. 그 중도적인 형태는 내 체질에 딱 맞았다. 그런데 헌금 생활에 있어서 한국 교회와는 너무나 다른 면을 보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미국 교회에서는 한국과 같은 십일조 헌금에 대한 부담은 전혀 주지 않았다. 어느날 오산에 있는 신부님집에 우리 찬양대원들이 놀러 갔다. 맛있는 음식을 잔뜩 준비해 주셔서 배불리 먹고 신부님과 신앙이야기도 하였는데 나는 십일조나 각종 헌금을 그토록 강조하는 곳은 한국교회 뿐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당시 나는 대한 예수교장로회 합동측 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해 신년 예산 구조를 따져보니 연간 예산의 35 퍼센트가 이런 저런 명목으로 목사님에게 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 점에 동의 하지 못하고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제직회에서 소란만 야기하고 결국은 그 일로 인해 후에 그 교회를 떠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1986년 1학기를 고려대 대학원에서 휴학하고 서강대 영어 연수원에서 공부했는데 어느덧 2학기가 다가오니 고민이 다시 시작됐다. 어떻게 하든 다시 공부하여 석사논문 제출 자격시험을 치르고 논문을 쓸것인가 중도에 그만두고 말것인가의 문제였다. 아무래도 다시 공부한다는 것이 자신이 없어 결정도 못하고 있는 2학기 등록마감일을 며칠 앞둔 어느날 점심시간에 고대 대학원 후배인 신환식과 손영일이 찾아왔다. 후배라고 해도 나이가 어리지 대학원 입학 동기였다. 대학원에 입학 했을때부터 우리 셋은 같이 공부하고 시험 정보 얻는것 있으면 공유해 주며 상부상조 하였는데 이 두사람은 이미 논문까지 통과되어 석사 학위 수여식만 남겨놓고 있었다. "형  등록 안할거요?" 두 사람이 동시에 물었다. "형 우리 셋이서 같이 공부하고 생활 했었는데 형 혼자만 학위를 마치지 못하면 안되지. 말이 돼요? 우리가 도와 줄테니까 힘을 내요 형." 하고 대학원 복학을 강권하는 것이었다. 같이 점심을 먹으며 심사 숙고하다가 두 후배 권유에 힘입어 드디어 복학 하기로 결정하였다.

 

내가 회사일에 정신 없으니 비교적 시간 여유가 있는 두사람이 기출문제 정보등을 많이 구해주고 해서 결국 석사학위 논문 제출 자격시험의 전 과목을 패스 하였다.정말 환식이와 영일이의 권유와 도움이 아니었으면 석사를 마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환식이는 그때 대학원 공부에만 전념하고 있었고 영일이는 공군사관학교 화학 교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엘리트들이었다.

 

그 바쁜 1986년 하반기에 나는 대학원 논문을 쓰기 시작하였다. 지도교수는 고대 경영대학원 원장님이신 김동기 교수셨다. 논문은 내가 하고 있는 마케팅 실무에 직결되는 '다국적 기업의 제약 마케팅에 대한 연구, -14개 다국적 제약 기업의 마케팅을 중심으로-' 였다. 바쁜 틈을 내어 설문지를 작성하고 14개 외자기업 마케팅 책임자들을 직접 만나 면담 조사하였다. 경쟁사 관계에 있는 마케팅 PM에게 자사의 마케팅 현황을 항목별로 세세히 알려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다행히 모두들 좋은 논문 쓰기 바란다면서 협조해 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마운 분들 이었다.

 

논문은 주로 업무가 끝나고 모두 퇴근한 후에 사무실에서 썼다. 집에 가면 집중이 잘 되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아예 집에 가지않고 새벽까지 쓰다가 사무실 바닥에 가져다 놓은 담요를 깔고 눈을 붙였다. 아침에 직원들 출근 하기전에 화장실에서 씻고 와이셔츠를 갈아입고 아침 일을 시작하곤 하였다. 참 그때는 힘겨운 날들이었다. 천신 만고 끝에 논문을 완성하여 지도교수의 지도와 수정과 결재의 과정을 마치고 인쇄하여 제출하였다. 그때 쓴 논문은 지금도 국회 도서관에 보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