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동아제약 생활 말기는 그야말로 최악의 사태였으며 갈곳도 없이 내몰린 코너에서 죽음의 냄새를 맛본 생쥐와도 같았다. 그 급박한 과정의 미친듯한 상태에서 중장비학원에 대해 누구에게 얘기 해볼 기회도 갖지않고 자문 받아볼 생각도 못해 보았다. 기계의 기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의 분야에 대해 갑작스럽게 혼자서 내린 잘못된 판단으로 모든 것을 던저 인수했던 중장비학원을 포기하였다. 그 사건이 가져다준 내 인생의 상처는 무덤에 들어갈때까지도 잊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억울한 마음에 가슴이 두근거리며 막혀 버린다. 월급쟁이가 금쪽처럼 모은돈 4000만원, 지금의 20억 정도를 날려버렸다면 살아 있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지도 모른다. 20억이란 그때 대치동 선경아파트를 분양하고 있었다. 분양 받아보라는 권유도 있고해서 모델 하우스에 가서 구경하고 상담 받았다. 분양을 받을까 말까 망설였는데 31평 분양가가 3700만원이었다. 지금 매매 20억이다.
그 수렁에서 기어 나온 것은 로슈라는 다국적 기업에 들어갈 기회가 열리고 그곳에서 내 혼신의 육체와 영혼을 바쳐 오로지 마케팅 목표에 몰입했던 시기가 결정적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로슈에 첫 지원을 했을때 만일 합격 되었더라면 그후의 생활은 또다른 방향으로 나갔을지도 모른다. 처음 모집 직책은 Training Manager(연수담당 과장) 였기 때문이다. TM은 모든 직원을 연수 훈련 시키는 중요한 직책이긴 하지만 경영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핵심 직책은 아니다.
첫번째에 떨어지고 두번째에 합격 했던 것은 전세계 로슈 그룹의 명운을 걸고 발매한 최중요 핵심 제품 Rocephin(로세핀)의 Product Manager(제품 마케팅 담당 책임자) 직책이였다. 다국적 기업의 마케팅 부서란 국내 기업의 조직 관점에서 본다면 종합기획실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종합 기획실은 전략을 수립하나 예산권은 갖고 있지 않다. 다국적기업의 마케팅부 PM은 자기 영역 분야의 모든 전략을 수립하고 배정된 예산권을 갖고 실행하며 통제한다. 요컨대 회사조직의 핵심 요직인 것이다. 그때 로슈의 PM은 치료 영역에 따라 5개 분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내가 맡은 항생제 영역은 가장 큰 예산을 갖고있는 핵심중의 핵심 PM 분야였다.
어느 머리좋은 천재가 이 시기의 내 인생에 대한 씨나리오를 썼다면 이렇게 치밀한 프로젝트의 진행과 시간 계획을 짤 수 있었을까. 그런 천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동아제약 말기부터 나를 인생의 최 저점 지옥으로 몰아넣고 그곳에서 두번도 맛볼 수 없는 인생의 상처를 입게한후 그 상처 속에서 삶을 통째로 반전시켜 세계수준의 새 삶으로 꽃 피우게되는 신 궤도에 진입하게 하였다면 그것이 인간의 머리와 능력으로 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알 수없는 하나님이 구성하여 부여하신 기적외에 다름이 아니다. 나는 그 시기를 돌아보면 볼 수록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 일련의 일정들은 내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평생을 살아도 그 감사를 다 드릴 수 없을 것이다.
1984년 6월 29일 금요일 동아제약 생활을 끝내고 주말을 지낸 다음 회사 이직시의 휴식시간도 없이7월 2일 월요일 즉시 가슴에 부푼 꿈을 안고 한국 로슈 마케팅부에 첫 출근 하였다. 회사의 명운을 걸고 발매 준비중인 신제품 세파로스포린 3세대 항생제 로세핀의 PM(프로덕트 매니져)이었다. 입사한 7월이 우일중장비에 운영비 250만원씩이 들어가는 것은 두달째 였다. 나는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지만 우일과 로슈 두 생활을 지탱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출혈이 계속되는 우일을 포기해야 했다. 아차하다가는 두가지 영역 모두 실패할 가능성이 컸다. 양손에 떡을 쥘수 없고 두마리의 토끼를 쫒을 수는 없었다. 나는 고통의 결단을 내려 하나를 포기 했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리고 업무에 매진할 무렵 어느날 종근당 창업주이신 이종근 회장님이 찾으신다는 연락이 왔다. 한국로슈(Roche Korea)설립시에는 스위스 로슈와 종근당이 각각 50 퍼센트씩 출자하여 설립한 현지 합작법인이었다. 그러니 주인이 둘이나 마찬가지였다. 종근당 빌딩 13층 회장실로 올라가 회장님 앞에 앉았다. "당신네 로슈 사장이나 부사장이 모두 당신이 좋다고해서 뽑은 모양인데 내 한가지 물어보겠네. 당신 언제 그만둘거야?" 회장님의 첫 질문은 좀 황당했다. 그런데 그렇게 물어보시는데는 그 연유가 좀 있었다. 내가 입사하기 며칠전 회사 경영의 핵심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닌 마케팅 매니져가 갑자기 사직한 것이었다. 회사로서는 그런 황당한 충격이 있을 수 없었다. 회장님께서 첫 출근한 PM에게 언제 그만 둘 거냐고 질문하신것은 그런 내막이었다.
당시만 해도 외자계 회사 출신들은 국내회사 출신들에 비해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하고 조금만 좋은 조건으로 타회사에서 오라하면 근무하던 회사에는 아무런 미련 없이 가볍게 떠난다는 좋지 않은 선입견이 있었다. 그리고 그 선입견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기도 했다. 이종근 회장님은 바로 그런 관점에서 질문하시는 것이었다. 회사의 최고 중요한 제품의 마케팅 책임자를 뽑았다는데 또 지난번 마케팅 매니져처럼 할만하면 갈 사람인지 아닌지 그 판단을 하고 싶으셨던 듯하다.
나는 갑자기 민망하기도하고 뭐라 드릴 말씀이 없어서 "회장님, 혹시 제 이력서 가지고 계십니까?"하고 반문하여 여쭈었다. 이 회장님은 책상위의 서류를 보시고 "응 여기 있구만." 하시더니 잠시 이력서를 훑어 보시는 것이었다. 나는 " 회장님, 제 이력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이회사 저회사 왔다 갔다 하는 성향이 아닙니다. 저는 전문 치료제 마케팅에서 기필코 성공하겠다는 간절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로슈에 온 것입니다. 회장님, 저의 성공을 지켜봐 주십시오."하고 신념에 찬 어조로 말씀 드렸다.
그것은 그저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실제로 내가슴에 품고있는 꿈과 야망이었다. 나에게 로슈는 아픈 상처를 딛고 서있는 절벽위였다. 나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여기서 성공하지 못한다면 절벽에서 나르는것 외에는 없었다. 회장님께서는 나의 태도를 보시고 결의가 느껴지셨는지 "그래 얘기 들어보니 믿음이 가는구먼. 새로 설립된 한국로슈는 이제 당신들의 회사야. 당신 생각처럼 꼭 한번 성공해 봐." 하시면서 철제 캐비넷 속에서 박스 하나를 꺼내 오셨다. "이거 별건 아닌데 갖다 써. 그럼 내려 가봐. 내 지켜 볼테니까 열심히 해봐." 하시면서 주셨다. 나는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물러 나왔다. 주신것은 아마 누가 가져다 드린것인지 MBC 창사 기념 몇 주년의 대형 침대 커버 타올이었다.
업무는 점차 점입가경으로 숨막히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영업의 MSR생활을 7년동안 하였고 마케팅 석사과정에 있다고는 하나 실무 경력이 없으므로 내가 수립한 마케팅 전략이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 판단 하기가 어려웠다. 1984년 10월 태국의 방콕으로 첫 해외 출장을 나갔다. 세계 로슈 그룹의 AAA(Asia, Africa & Australia)지역 마케팅 회의였다. 스위스 바슬의 본사에서 국제 Product Manager 들이 나와 Rocephin(로세핀)등 주요 신제품의 세계 마케팅 전략을 설명하였다. 그후에는 AAA의 각국 PM들이 각각 자기나라의 로세핀 Launching Plan(발매 계획)을 설명하니 나 또한 한국에서의 Rocephin 전략에 대해서 프레센테이션 하였다.
그때 참가했던 국가는 스위스로슈 본사 외에 일본로슈, 한국로슈, 홍콩로슈, 태국로슈, 오스트레일리아로슈, 뉴질랜드로슈, 파키스탄로슈, 타이완료슈 등이었다. 지금이야 컴퓨터 ppt와 동영상으로 제작하여 화려하게 프레센테이션 하지만 그때는 아직 컴퓨터가 도입되기 전의 구식이니 Overhead Projector로 발표 하였다. 나는 내 전략이 어느 정도인지 아직 긴가민가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본사의 국제PM 베어 씨로 부터 인상깊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출장중에 특이하게 경험했던 것은 태국에 대한 여행이었다. 그때 출장은 나혼자가 아니라 윤형석 차장과 같이 갔었는데 윤차장님은 외국어대 태국어과 출신이었다. 태국에 동문들이 많이 있었는데 여행사 대표로 있는 동문이 우리 둘을 위해 특별히 직원을 배치하여 회의 세션만 끝나고 나면 매일 로비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매일 저녁 풀 대접을 받으니 그런 호사가 없었다. 모든 회의 일정이 끝난후에는 전용차로 1박2일 파타야 여행까지 하였다. 윤차장님 덕분에 나까지 최고의 대접을 받았던 것은 미안하긴 하였지만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었다.
그런데 출장에서 돌아와 회사에 출근하니 집행부사장인 Dr. Kestemann이 부시장실로 불렀다. 한국로슈가 스위스 로슈와 종근당의 50퍼센트 50퍼센트의 합작기업이간 하지만 경영권은 거의 스위스 로슈측에 있으니 Dr. Kestemann은 실제적인 경영 책임자였다. 부사장님은 출장의 경과를 대략 물어보신다음 "Mr. Soh, Dr. Altobeg who is Pharma Head of world Roche group will visit our company. He wants to hear Rocephin Strategic Launching Plan in this
time. You are Product Manager of our comany. Can you present your launching plan?
You have only week . It's not so enough time. Please finalize your plan. (소용순씨, 세계 로슈 그룹의 제약분야 책임자인 닥터 알토벡이 우리 회사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그분이 우리회사의 '로세핀 전략 발매 계획'에 대해 듣고 싶어 하십니다. 소용순 씨가 우리회사의 로세핀 PM이니 계획 발표를 할 수 있겠습니까? 준비할 시간이 한주밖에 없어요. 충분한 시간이 아니니 서둘러 계획을 완성하기 바랍니다.)"
뜻빢에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이것은 하고 않하고의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내가 해야 하는 발표였다. 닥터 알토벡은 세계 로슈의 제약 분야를 총괄하는 엄청난 고위직 분으로서 통상적으로는 한국은 들르지 않고 일본로슈의 경영계획을 듣고 상하이에 들러 중국로슈의 경영계획을 듣는 것이 통상적이 아시아 출장 코스 였다. 그런데 이번에 특별히 한국 로슈의 로세핀 발매에 흥미를 갖고 계셔서 들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로세핀은 로슈그룹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신제품이었고 한국의 중요성도 그만큼 대두되고 있는 시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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