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어나 저 강을 건너라

1987년 3박자 대박 축복이 터지다

Billy Soh 雲 響 2020. 4. 10. 21:18

엎치락 뒷치락 다사다난했던 1986년이 저물고 1987년의 새해가 밝았다. 새해는 인생의 진로를 확고히 굳히느냐 마느냐하는 몇개의 대형 이슈가 겹쳐있는 또 한번 고비의 해였다. 새해 첫 주일 마지막으로 D교회에 나가 아무쪼록 금년 한해를 잘 넘길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 하였다.


첫번째 고비는 내 직장 생활에서의 진급 고비였다. 사실 직장에서의 진급이란 직장 생활의 모든것을 평가 받는 고비이다. 아무리 잘난척하고 스스로 성과를 과시한다한들 진급에서 누락 된다면 그것은 회사로부터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조직 생활에서 진급 누락되는 것보다 더 쓰라린 상처는 없다고해도 과언은 아니다. 나는 이미 전사에서의 아픈 경험이 있기때문이다. 어느덧 나도 한국로슈에 PM 과장으로 입사한지 3년차였다. 제대로 된다면 차장으로 진급할 케이스였다. 진급의 해가 되자 긴장이 되었다. 2월이 되었다. 어느날 진급 사정의 부서장 회의가 열리니 조마조마 하고 있었는데 이헌구 부장님께서 나오시더니 나의 차장 진급이 결정되었다고 미리 통보해 주셨다.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었다.


두번째 고비는 석사 논문심사의 통과였다. 산학병진의 고달픈 생활을 극복하고 논문을 제출했지만 과연 그 논문이 통과되어 석사학위를 받게 될 것인가 불안하기만 했다.


세번째 고비는 신축 자가 아파트 입주 문제였다. 당시 아내의 미술학원은 유치원과 미술학원으로 분리하여 호조의 경영 상황이었으나 벌써 몇년을 개봉역 앞 원풍 아파트에서 살았으니 24평은 아이들이 커가면서 불편해졌다. 1년전 나는 부동산 추세를 부단히 예측하며 광명시 하안동 신축 아파트 단지 입주권을 매입했었는데 13단지 31평에 무사히 입주가 결정 되었다. 이제까지 장안아파트를 팔아 아내의 유치원을 매입하느라고 쪼들리며 생활해 왔는데 처음으로 제대로 된 새집에 입주하게 된것이다. 이사하는날 너무나 뿌듯하고 가슴이 벅찼다. 남들은 부모님의 지원을 받아 집을 사고 신혼부터 편안한 생활을 하는 지인들도 있었지만 아내와 나는 그 누구의 지원하나 받지 않고 자립하여 아내는 안정된 자기 유치원 원장으로 생활하고 가족은 새 아파트로 입주하게 되었으니 어찌 가슴이 벅차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사하는 날이 석사논문 심사일이었다. 나는 원풍아파트에서 이삿짐을 싸 이사 차량이 하안 13단지에 도착하는 것만 보고 짐 들이는 것은 아내에게 맡겨 놓은채 부랴 부랴 고대 경영대학원으로 갔다. 불안하게 기다리던 심사회의가 끝나고 지도교수님으로부터 통과됐다는 말씀을 들었을때 정말 뛸듯이 기뻤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집을 정리하고 있었다. 논문 통과의 기쁨을 같이 나누며 짐정리하는 것은 힘든줄도 몰랐다.


2월20일에 고려대 석사 학위 수여식이 있었다. 어머니와 우리 가족은 물론 처가 부모님과 여동생 내외까지 와서 축하해 주니 마음은 두둥실 떠오르듯 기뻤다. 이렇게 북극성이 직렬로 늘어서듯이 세가지의 중대한 고비가 모두 통과 되었다. 이제 인생은 다음 고비에 이를때까지 한동안 평지를 달릴 것이었다.


처음 미술학원을 인수할 무렵에 아내는 엄두가 나지 않아 많이 망설였는데 경영은 내가 도와 줄테니 당신은 가르치기만 하라는 말로 설득을 하였었다. 그런데 막상 현실 생활에서는 나도 내일 하기에 급급하여 실제적으로는 그다지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기껏 도움이래봐야 2학기 말에 작품 전시회를 준비할때 회사 마치고 미술학원에 가서 약간 거들어 주고 밤늦게 끝나면 교사 선생님들의 집을 돌며 태워다 드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재롱잔치때 싼타 할아버지 역할을하여 싼타복을 입고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고 산타 연기를 해주는 정도였다. 그러니 혼자 모든일을 해내야하는 아내에게 할말이 없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내에게는 언제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다.


렇게 생활에서의 3박자 대박 축복이 터지며 인생의 평탄한 개활지를 장애물 없이 달리는 1987년에 또다른 삶의 측면인 신앙 생활에 있어서는 흔들리는 방황의 해였다. 벌써 몇년 동안 미8군 성공회 교회에 다니며 미 군종 신부님들과 대화를 나누고 기독교의 본질과 한국교회의 잘못된 점에 대하여 많은 의문과 사색을 하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성의 한국 교회에 마음의 동의를 할 수가 없어서 당시 다니고 있던 광명시의 D교회를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목사님에게는 자세히 말씀 드릴 수가 없어서 그냥 집안 형편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되었다고 빗대어 말씀 드리고 교회를 나왔다.


1987년 1월 첫주일부터 아침에는 미8군 교회에 가고 10시 반쯤 끝나면 매주 다른 교회를 찾아 다니고 예배를 드리며 참된 믿음의 교회를 찾아보려 순회하였다. 교파별로도 안가본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규모적으로도 큰 교회 적은 교회 할것없이 방문하여 뒤에 앉아 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교회를 찾기가 어려웠다. 내가 찾는 교회는 어떤 교회였던가.


선 한국교회 특히 개교회 중심 제도인 장로교회의 지나친 물질 주의를 배격하는 교회였다. 그러나 매년 몇천명의 신학생들이 쏟아져 나오는 한국교계의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교회를 찾을 수 있겠는가 신학대학 졸업생들은 모두 직업을 가져야 되며 생계를 이어가기 위하여는 헌금을 외치지 않을 수없고 무조건 큰 교회를 만들기 위하여 갖은 선교수단을 다 쓸 수 밖에 없었다. 예배 형식 또한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경건한 예배라기 보다는 축복의 기복적 측면을 강조하고 세상의 음악회나 친목회가 되어 박수치며 성도들의 맺힌 스트레스를 시원하게 풀어주는 오락처럼 변질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시원하게 해줘야 성도들이 모이고 교회가 이른바 부흥하며 헌금이 더 걷히고 그러면 더 땅을 사서 교회를 크게 짓고 그런 순환이 계속 돌아가는 것이었다.


또한 유년 시절부터 어떤 질문도 해보지 않고 무난히 신앙생활 해온 나였기에 너무 기복적이고 개인의 성결한 생활을 강조하는 교회도 원하지 않았다. 세례요한의 엣세네파처럼 사막에서 낙타띠를 띠고 석청을 따먹으며 세상과 단절하고 성결한 생활을 하는것. 그것이 중요하지 않은것은 아니지만 그러면 이 세상에 대하여는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그 시절 민주화 운동이 어느정도 이루어 지고 있었다고는해도 아직 혼란스럽고 부조리가 넘치는 사악한 세상인데 개인의 성결한 생활만을 통하여 무엇을 어찌하겠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비록 나는 용기가 없고 가족을 생각하여 민주화 운동에 몸으로 투신하지 못한 성실한 직업인 테크노크라트였지만 마음만은 기독교가 현실참여를 외면한 개인의 성결만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은 현실의 문제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일년을 돌아다녔어도 마땅한 교회를 찾지못하고 12월27일 그 해의 마지막 주일이 되었다. 나는 이러다가 교적도 없는 떠돌이 교인이 되는것은 아닐까하는 두려운 생각도 들었다. 그 마지막 주일에는 아내 유치원의 원감선생님 남편분이 목회하시는 광명시 한광교회를 찾아갔다. 아내와 같이 주일 대예배를 드린후에 노목사님 사택으로 들어가 차한잔을 나누며 환담하는 중에 지난 일년간 다녀왔던 교회에대해 말씀 드렸다. "방황하며 제게 맞는 교회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는데 결국 오늘까지 찾지를 못했습니다. 너무 걱정이 되네요."히고 말씀 드렸다. 그러나 노목사님도 마땅히 해주실 말씀이 없으신지 "아 그러세요. 참 어떻게 해야하나." 하시며 답을 주시지 못하였다. 그저 다른 얘기만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날 저녁 식사 후에 갑자기 노목사님 부부가 우리집에 오셨다. 아마 낮에 내 생각을 들으시고 마땅한 충고를 해 주시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셨던것 같았다. "집사님 성격을 내가 잘 아는데 아무리 돌아다녀도 요즘 같은 세태에 집사님 성향에 맞는 교회 찾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그런데 딱 한군데 한번만 더 가보시면 어떨까 하는 교회가 있긴한데 .." 하고 망설이시는 것이었다. "구로구청 앞 건물 3층에 새로 생겼는데 '갈릴리교회'라구요. 여기가 안맞으신다면 아마 집사님에게 맞는 교회는 없을 겁니다.인명진목사라고 제 동기인데 한번 만나 보세요" 한참후 하시는 말씀이셨다.


인명진목사의 성함은 들은 기억이 났다. 도시산업선교회라고 한참 언론에서 회자 되었으며 진실은 모르지만 일부에서는 기업에 사람들을 침투시켜 노조를 결성케하고 기업을 쓰러뜨리려는 이른바 빨갱이 집단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튼 모처럼 노목사님께서 추천해 주시는 분이니 새해에 한번 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