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병원 연간 입찰에서 주력제품이 탈락하고 실적이 저조한후 영업담당자로서 회사 생활의 흥미를 점차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 허탈감을 메우려고 회사 생활 이외의 시간에는 영어 공부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동산 게임에 몰입하게 되었다. 목표로 찍은 세곡동 삼각지대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파고 들어 드디어 목표 하나를 잡았다. 농로에 접한 구옥 소위 '용마루'였다. 1982년 9월, 아내에게 가져다 주는 급여나 보너스 외에 내가 따로 저축해 두었던 비자금 700만원으로 이 가옥대장에만 있는 오막살이 '용마루'를 매입하였다. 몇년 지나면 기필코 이집이 가치를 나타내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것은 집에 걸어놓은 대형 지도에서 들리는 틀림없는 물소리 바람소리였던 것이다.
내 예측에는 틀림이 없었다. 차 한대도 지나가기 어려운 비포장 농로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팽창하는 서울의 도시계획이 개포동과 수서 로타리를 연결하는 라인에서 멈춰질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얼마가지 않아 세곡동 정비계획이 발표 되었다. 논 밭과 갈대로 무성하던 세곡동 탄천의 삼각지대는 중장비의 캐터필러 소리가 울려 퍼지며 새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매입한 '용마루' 가격도 뛰기 시작하였다. 700만원에 산 오막살이가 금새 1000만원이 되고 1200만원이 되었다.영어 공부도 계획대로 순탄하게 진행중이었다. 다만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회사생활이었다.
서울대병원 연간 입찰에서 주력 제품인 세파메진 1g을 유한양행에 빼앗기고 남은 것은 세파메진 0.5g 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술후 1일 2g씩을 투여하는데 0.5g을 4바이알씩 써달라고 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변하였으니 어쩔 수 없이 그런 궁색한 영업 활동을 해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처방하는 닥터에 대하여 영업을 하는 담당자의 입장이 약해 질 수 밖에 없었다. 한달에 한두번은 처방 닥터들과 회식을 나가게 되는데 그때 잘 가던 곳은 강남의 삼정호텔 지하 룸싸롱이었다. 나는 그 무렵 내가 영업에 적합한 성향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절실히 느꼈다.
1차 룸싸롱에 가서 아가씨들을 앉혀놓고 술을 마시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직업이 그러니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차에 압구정동의 아모르라는 외국인 아가씨들이 있는 비밀 클럽에 가서 난잡하게 술을 마시고 3차까지 안내해 주어야 하는 입장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어느날 나는 닥터들과 같이 접대 술을 마셔 취한 중에도 그 더러운 뒷치닦거리를 끝까지 다 해 준 다음 집에 돌아와 혼자 어둠 속에 누워 울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며 살고 있는가 하는 자괴감에 가슴은 한 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죽어도 이런 일은 싫었다. 그런일 까지도 서슴없이 바라는 고객들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먼 훗날의 얘기이지만 그때의 레지던트들이었던 그 닥터들이 각 분야별로 교수가 되고 원장이 되고 TV의 명의 프로그램에 나와 강의하는 것을 보면 정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물론 이것은 나의 개인적 성향 탓인지도 무른다. 옛 조선 시대부터 선비들 사회에서 '배꼽 아래 일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말라.' 는 말도 있었으니 그 고객들은 그런 행위들에 대하여 아무 특이한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들의 취향이고 왜 내가 그 쓰레기들의 뒷치닦거리 까지를 해줘야 하는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비참한 자괴감이었던 것이다.
그 때부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영업직을 탈출하여 마케팅 전략 부서로 가겠다는 나의 실제적인 노력이 시작 되었다. 영어 공부와 함께 경영학 공부에도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때 다니던 학원이 종로 2가 뒷길의 공평학원 경영학 반이었다. 희망하는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의 필기 시험 과목은 영어와 경영학이었다. 나는 경영대학원에 들어가 마케팅 석사가 되고 싶었다.
1983년 새해가 밝았다. 회사의 정기 인사 이동에서 나는 전에 병원 3과에서 부산으로 내려 가기 전에 경기 북부 지역을 인계해준 적이 있는 중대 약대 출신 후배 권오규 주임에게 서울대학 병원을 인계하였다. 직장 생활에서 인수 인계를 한번만 해도 인연인데 두번씩이나 인수인계를 한다는 것은 참 대단한 인연이었다. 그렇지만 권주임은 인성이 부드럽고 겸손하며 내가 좋아하는 후배였다. 서울대학병원을 넘겨 준대신 나는 부천 성모자애병원, 수원 빈센트병원등을 인수 받았다. 그 과정 중에서 이미 나의 마음에는 회사에 대한 애정이나 충성심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주어진 최소한의 업무를 하고 나머지의 시간과 정신력은 오로지 나의 이직 준비를 위한 능력 개발에 집중투자하고 있었던 것이다.
1983년에는 여름 휴가도 가지 않고 개봉동 원풍 아파트 앞 사립 도서실에서 공부만 하였다.
10월에 남 몰래 고대 경영대학원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섣불리 공개 할 수가 없었다. 기획이나 경리등 내근직이라면 모르지만 외근인 영업직에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경영대학원에 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영업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질 수 있으므로 싫어하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1984년 새해가 되고 금새 2월이 되었다. 3월이 입학이니 이제는 더 미룰 수가 없었다. 경영대학원에 간다는 것을 보고 해야 했다. 어느날 과장인 L부장에게 "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혹시 점심 시간 괜찮으세요?" 하고 요청하여 당시 면목동에 있던 병원부 사무실에서 신설동으로 나왔다. 점심을 사드린 후에 커피 한잔을 하며 "제가 공부를 좀더 하고 싶어서요 경영대학원에 갈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정중히 말씀 드렸다. L부장은 " 아 공부하는것 좋지. 그랬었구만 . 회사 업무 지장 가지 않게 하고 공부 잘 하기 바래." 하고 허락해 주니 나도 마음이 가벼웠다.
그런데 회사생활과 경영대학원 공부 양쪽을 다 지장 없이 계속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일이 아니었다. 고대 경영대학원은 타 대학 경영대학원과는 달리 1학점당 주 수업이 2시간이며 학점을 다 따기 위해서는 월화 목금 주 4일을 꼬박 수업을 들어야 하는 아주 타이트한 수업일정이었다. 나는 그때 내가 눈이 나쁜줄 처음 알았다. 회사에서 빠져 나오기도 시간이 빠듯하여 겨우 저녁 6시 수업시간에 교실에 도착하면 이미 뒷자리 밖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뒤에 앉아서 수업을 들으니 교수님 말씀도 집중이 안되고 더우기 판서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안경을 맞춰서 끼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6시에 수업에 들어가기 위하서는 5시에는 회사에서 퇴근해야 하는데 그때 퇴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얼마나 눈치가 보였겠는가. L부장은 말 할것도 없고 종합병원 1과에 같이 있는 3명의 동기들도 점차 못마땅한 눈치를 보이고 있었다. 남이 잘되는것 다 배아파하는게 세상인데 누가 공부한다고 일찍 퇴근하는 사람 좋아하겠는가. 모두 바쁜데 저 혼자 공부해서 석사 딴다고 일찍 나가니 미운털이 박힐 것도 당연했다. 점차 L부장의 시비가 잦아졌다. 5시에 학교 가려고 가방만 챙기면 "소주임 이리와봐" 하고 업무 회의를 하자며 시간을 끌고 주저 앉히는 것이었다. 그렇때마다 나는 속이 부글고리고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점차 나도 "내일 아침에 하면 안됩니까?" 하고 불퉁거리며 말을 하니 조직의 상하 관계인데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와중에도 4월에 과장 진급시험이 있었다. 역시 영어와 경영학과 제품학 시험인데 나는 대학원 과목과도 겹치는 시험이라 무난하개 치루었다. 나는 정말 합격하고 싶었다. 만일 합격만 된다면 새롭게 심기 일전하여 회사생활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5월초 합격자 발표가 있기 전에 꿈을 꾸었다. 내가 어떤 산 꼭대기에 서 있었다. 저 멀리 건너편으론 다른 산 정상이 건너다 보였다. 갑자기 내 앞에서 어마어마한 시커먼 구렁이인지 용인지가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건너편 산 봉우리까지 가로질러 다리처럼 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용위에 올라타는 꿈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런 꿈은 꾸어 본적이 없다. 신기한 꿈이었다. 나는 그 꿈이 뭔가 과장 시험에 합격할것같은 영감을 준다고 생각했다. 어마어마한 꿈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매사에 아전인수라고 했던가. 영업 실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시험은 잘 본 편이었기 때문에 기대를 했었다.
그러나 발표가 나와 보니 꿈은 정반대 였다. 실패한 것이다. 나는 내가 시험에 떨어진다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엄청난 실망과 좌절이 몰려 왔다. 4명의 같은 종합병원1과 동기중 합격은 단 한명 뿐이었다. 그 상황에서 L부장이 시비를 걸어왔다. 학교든 회사든 하나만 택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학교는 결코 포기 할 수 없었다. 학교는 내 인생 미래 계획을 위한 노력의 과정이며 회사는 현재의 생활의 여건 이었기 때문이다. 미래의 꿈 없이 오늘의 상황 호전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어느날 아침 영업 출장을 나가기 전인데 본사에 가 계시전 정해국 과장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주임 출장 나갈때 잠깐 여기 좀 들러봐"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일인가 하고 본사에 갔다. 소 회의실로 들어 갔더니 정과장님이 조그만 신문 스크랩 쪽지를 주시는 것이었다. '한국로슈 사원모집' 광고였다. 마케팅 부서의 Training Manager(직원 연수 담당 과장) 모집 광고였다. " 단신 회사 생활 아무래도 어려워 보이니 여기 응시 해봐. 종근당 하고 합자회사인데 스위스 로슈이니만큼 전망이 있을거야." 하고 말씀해 주셨다. 나를 아껴 주시는 상사이시니 그 말씀대로 지원을 하였다. 충정로에 있는 종근당빌딩의 11층 회사에 가서 독일인 집행 부사장 Dr. Kestermann과 종근당 측 이영호 사장님과 1차 면접 하고 합격하여 2차 면접까지 하였는데 마지막에 두 사람 남은 과정의 최종 선택에서 내가 탈락하고 말았다. 정말 그런 낭패와 좌절이 없었다.
어느날 아침에는 SP Korea의 마케팅 매니져로 있던 김광호 대학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선배는 벌써 외자계 회사의 꽃이라하는 마케팅 매니져 까지 되었으니 잘나가고 있었다. 나는 선배를 만나서 지금 고대 대학원에서 마케팅 석사과정을 전공하고 있는데 귀사의 마케팅 Product Manager 로 꼭 뽑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선배는 수긍하였지만 차동연 집행부사장 면접에서 또 떨어지고 말았다. '영업에 7년이나 근무하여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유연한 두뇌 마케팅에 근무하기에는 머리가 굳었다고 생각하는것 같았다. 채용권자가 그리 결정하니 아무리 사정해봤자 될일이 아니었다. 정말 왼쪽을 보니 낭떠러지고 오른쪽을 보니 절벽에 선 기분이었다. 동아제약은 모든 분위기가 코너로 몰아가 그만 둘 시점이 다가오는데 갈곳은 없으니 가슴은 바윗돌이 짓누르듯 답답하고 갈곳을 찿을 수가 없었다.
내 일생일대에 씻을 수 없는 대 실패가 이런 궁지의 상황에서 일어났다. 사람이 출구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 몰리니 가당치도 않은 판단의 함정에 빠지게 된 것이었다. 갈데가 없으니 운전면허중을 따려고 다니던 자동차 학원에 찾아가 가르치던 강사를 설득하여 사표를 내게 하였다. '중장비 학원'을 인수 하자고 권유한 것이었다. 나는 자금을 대고 그 사람은 원생들을 가르치고 경영하는 책임자로 내세운 것이었다.
며칠후 신문에 다시 한국 로슈의 모집 광고가 났다. 이번에는 마케팅의 Product Manager 모집 광고였다. 지난번 떨어져서 자신감은 좀 없었지만 다시 도전해 보기로 하였다. 그때는 내가 아직 영문 타이핑도 못하니 절친인 전종준의 신세계 백화점 뒤 오파상 사무실에 찾아가 타이핑을 쳐달라 하였다. 친구가 "야 아무리 예쁜 여자도 한번 싫다하면 그만인데 지난번 떨어뜨린 회사에 또 지원한단 말이냐. 집어쳐라" 하고 짜증을 내는 것이었다. 나는 " 야 잔소리 말고 어서 이력서나 쳐줘" 하니 친구가 마지못해 쳐 주었다. 나는 명동의 중앙 우체국에서 이력서를 한국로슈로 발송하고 부디 잘되기만을 기도 하였다.
며칠후 로슈에서 연락이 왔다. 면접하러 오라는 것이었다. 정해진 날에 가서 먼저 닥터 케스터만을 만나니 사무실에서 반갑게 나오며 악수를 청하였다. "Mr. Soh, very nice to see you
again. (소용순 씨, 다시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I wanted you last time already. I don't
need more interview with you. I wish you have good interview with CKD side. I hope to
work with you.(나는 이미 지난번에 소용순 씨를 뽑기 바랬어요. 나하고는 더 면접 할 필요 없습니다. 종근당 측과 면접 잘 하세요. 꼭 같이 일할 수 있길 바랍니다.)" 닥터 케스터만 과는 이미 면접을 통과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종근당측 대표이사인 이영호 사장님실로 들어가 면접 자리에 앉았다. "Would you detail
about Il Dong Shiomarin? (일동제약 시오마린에 대하여 디테일 해보세요.)" 다국적기업이니만큼 이영호 사장님도 영어로 면접을 시작하셨다. 일동제약의 시오마린은 제3세대 Cephalosporin 항생제로서 당시 최신의 항생제 였다. 나는 동아제약의 같은 제3세대 세파로스포린 항생제 Ceftizoxime 제제 에포세린 영업에 집중했던 적이 있으므로 그 경쟁품인 Moxalactam 제제인 시오마린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었다. 당시 아직 유창하진 않지만 영어는 군생활에서도 판문점의 미군부대 교환소대장으로 근무했고 지금도 계속 공부하고 있으므로 시오마린의 적응증, 작용기전, 제품의 특정점, 부작용과 취약점 등에 대해 영어로 빼놓지 않고 설명 하였다. 이영호 사장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며 제품의 학술적 내용에 대해서는 더 묻지 않으시고 입사후의 각오나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나 조직생활의 가치관에 대한 내용등을 물으셨다.
끝나고 나오며 예감은 괜찮았다. 왜 그리 항생제에 대한 내용을 물으시나 그때는 궁금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면접은 바로 로슈가 회심의 신제품으로 발매 예정인 제3세대 세파로스포린 항생제 Ceftriaxone 제제 Rocephin(로세핀)의 Product Manager(제품 마케팅 책임자)를 뽑는 것이었다.
면접후의 예감은 좋았다해도 나는 이미 실패한 경험이 있으므로 마음은 불안하고 초조하였다. 그 면접과는 별도로 진행하고 있던 우일중장비 학원의 인수 계획은 그대로 계속 추진하여 드디어 계약을 성사시켰다.인수 자금은 700만원에 샀던 세곡동 용마루를 2400만원에 매각하고 잔금은 동아제약 퇴직금으로 지불할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내 일생일대에 있어서 씻을 수 없는 가장 잘못한 판단으로 엄청난 상처를 남긴 사건이 된다.
며칠후 로슈에서 "합격"이라는 통보가 왔다. 나는 너무나 기쁘고 흥분하여 가슴이 가라앉지 않았다. 어찌 됐든 이제 동아제약 퇴직은 결정 된 셈이다. 나의 갈 길은 정해진 것이다. 1984년 6월 22일 동아제약 병원부 사무실이 면목동에서 용두동 본사 2층으로 이사하는 날이었다. 나는 사직서를 써서 이미 속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과장 진급에 떨어지고 증오심에 불타던 회사를 오늘 그만 두겠다고 사직서를 던지는 날이었다. 이미 갈곳이 정해저 있으니 내심은 자신 만만했다. 아침에 잠시 면목동 사무실에 마지막으로 들르니 모든 동료들은 이사짐 싸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때만 해도 회사도 포장 이사가 아니라 직접 하는 이사였다. 나는 이사에 관심도 없으니 잠깐 보고 바로 나왔다. 장안평 중고 자동차 매매소에 가서 우일중장비학원 경영을 맡길 사람을 만나 사업에 필요한 포니2 승용차를 샀다. 당시 면허를 딴지 얼마 되지 않았었다.
세계적인 대 제약회사 로슈에 합격이라는 일생일대의 경사와 동시에 인생 최대의 흉사가 다가오고 있었으니 참,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인생의 날줄과 씨줄은 상상할 수도 없는 극적인 시간과 공간에 겹쳐 짜여져서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 그 시간에는 그 결말을 아직 알 수없었다.
산 베이지색 포니2 숭용차를 중장비학원 경영자에게 맡겨놓고 오후 5시쯤 용두동 본사에 들어 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동기들이 막 이사짐 정리를 끝내놓고 정문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너 이사하는데 하루종일 어디 갔다 오는거냐? 넌 이제 죽었다. 어서 L부장한테 들어가봐." 하며 겁주듯이 하고 나갔다. 나는 "그래?" 하고 웃으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아마 동기들도 웃는 나를 보고 이상하다 생각했을 것이다. 들어가니 직원들은 없고 직속 상사인 L부장과 다른 부장 둘이서 앉아 있었다. 아무말도 없이 의자에 털석 앉으니 L부장이 미친 눈빛이 되며 "소주임, 일로 와봐"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L부장을 노려보며 "왜요?" 하고 태연하게 반문하였다. 이건 조직 속에서 일어날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하는 상황이었다. 회사가 이사하는날 하루종일 보이지도 않더니 다 끝나고 들어와 상사가 오라하니 '왜요?'하고 반문하는 것은 심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L부장은 눈치를 못채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부장 앞으로 갔다. 그는 도끼눈을 뜨고 나를 노려보며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 순간에 참았던 평소의 증오심이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다짜고짜 속주머니에서 사직서 봉투를 꺼내 부장의 눈앞 책상위를 치며 던졌다. "이 **야, 너보기 싫어서 그만둔다. 됐어? 이 ***야 !"하고 천둥이 치듯이 소리를 지르며 발로 책상을 찼다. 그 순간 L부장은 얼굴이 하옇게 질려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한순간이 지나서 그 체격좋은 사람이 질린듯이 "소주임 왜 이러는 거야?" 하고 당황한 듯이 중얼댔다. "니가 나 씹어대는 *같은 꼴 보기 싫어 그만 둔다고 **야. 됐어?" 하고 내가 윽박 질렀다. 평소의 감정이 한번에 폭발해 나온 것이다. 더 이상 상대하며 말하고 싶지도 않아서 사무실을 나와 버리고 말았다. 운전학원으로 다시 가서 포니2를 처음 운전하여 개봉동 원풍아파트 집에 까지 몰고 왔다.
이튿날 아침 회사에 갔더니 난리가 났다. 어제 일이 소문이 퍼진 것이었다. L부장의 평소에 기고만장하던 건방진 모습이 완전히 풀이 죽어 있었다. 물로 나도 화가 폭발하며 일반인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100 배의 폭력성으로 제압을 하니 아마도 그 부장도 세상에 태어나 그런 꼴은 처음 봤을 것이다. 잠시후 심승일 병원부 이사가 부른다고 연락이 와서 이사실로 들어갔다. 사실은 심이사도 평소에 내 생각으로는 '저 **도 인간이 아닌 인격 파탄자구만' 하고 생각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실적이 안오르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며 사무실의 라지에타 박스를 뒷발로 차며 고함을 지르고 했던 것이다. 나도 인격이 부족한 사람이라 폭발하면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치지만 심이사나 L부장을 보면서 이 회사나 영업 분야를 어서 떠나야 되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던 것도 사실이다. 저런 상사는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심이사의 기분 풀고 회사 일 계속 하라는 회유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런 회유에 넘어 갈거라면 애초에 그렇게 폭발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튿날 부터 즉시 거래처 인계를 시작하여 28일에 끝났다. 그동안 인수인계하며 나도 마음을 좀 식히고 가라앉히며 송별회도 그룹별로 여러번 하였다. L부장도 그동안 자기가 지나치게 했었다고 여러번 사과 하였다. 나도 인간인지라 지난번 미안했었다고 사과하며 그런대로 동아제약 생활을 마무리 하였다.
세계적 제약그룹 스위스 로슈의 한국 법인에 입사하여 눈부신 새 출발을 앞두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인수한 우일중장비 학원이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미 '용마루'를 판돈 2400만원과 동아제약 퇴직금 1400만원을 주고 인수 하였는데 첫달부터 250만원씩 쌩돈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때는 중동 건설붐이 끝나고 중장비 학원은 완전히 사양길 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남의 말만 믿고 막차를 탄 것이었다. 원생은 들어오지 않고 경비만 깨져나가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새 회사에 츨근 하여 업무에 집중 할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하늘이 노래 지는 것이었다.
이 추세라면 천금같은 집마져 얼마 안가 날아갈 판이었다. 첫달을 지내고 나는 신속히 결단을 내렸다. 모든것을 포기하고 총액 4000 만원을 포기하고 빠져 나오고 말았다. 팔수도 없고 내가 끌고 나온 경영 원장을 내 쫒을 수도 없었다. 가슴을 칼로 도리듯이 아팠지만 더이상 물려 들어가지 않으려면 그 방법 밖엔 없었다. 나는 모든것을 포기하고 손 뗄테니 알아서하라 하고 포니2하고 몸만 나왔다. 당시 대치동에 분양중인 선경아파트 31평이 3700만원이었으니 그보다 더 큰 어마어마한 돈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지금 돈가치로 치면 20억이 넘는 엄청난 돈이었다. 죽어도 잊을 수 없는 상처였다.
망해버린 그 사건 이후로 나는 잠을 못자고 밤중에 벌떡 벌떡 일어나 소파에 나가 앉아 밤을 새우곤 했다. 심장이 떨려 죽을 것만 같았다. 그 상처를 잊으려고 한국로슈의 직장일에 죽을 힘으로 매달렸다. 그런 한쪽 인생의 실패가 없었다면 그 정도로 전력투구 하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 회사생활은 꽃이 피듯 화려하게 피어났다. '하나님은 한 문을 닫으시면 다른 한 문을 열어주신다' 는 속담이 그대로 내게서 맞았었나 보다. 그후에 아내나 형제간이 나의 그 심각한 실패를 알고 "사람 죽는 일도 생기는데 사람 않상하고 끝났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 하고 위로를 계속하니 그 말에 힘입어 조금씩 잊으려고 노력했다. 어마어마한 비싼 수업료를 내고 인생을 배운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이 실패를 기어코 반전시켜 회복하리라 이빨을 물고 다짐하기를 수도 없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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