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어나 저 강을 건너라

병원3과에서 서울대학교병원 담당까지

Billy Soh 雲 響 2020. 3. 17. 23:36

1년 만에 컴백하여 병원3과로 돌아오니 과장은 원재연 과장님으로 바뀌어 있었다. 원과장님은 성품이 아주 느긋하고 좋은 분으로 나와는 컴비가 아주 잘 맞았다. 나는 부산으로 가기 전처럼 지방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고 한국병원 해정병원 등 세미병원을 담당하며 과 전체 운영에 과장님을 보좌하였다. 전체적으로 안정된 영업 현황이었으며 분위기 또한 화기애애 하였다.


아내가 경영하는 미술학원 또한 규모는 적어도 내실있는 운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1982년 3월 가까운 거리에 있던 색동미술학원 원장님이 경영에 무리가 있어 아내에게 인수하기를 제안했다. 색동은 학원의 크기도 크고 전통이 있는 곳이었지만 원장님이 여의도에서도 미술학원 운영을 하고 계시니 하나를 정리 하기로 결정하신 것이었다. 자금에 어려움이 많이 있었지만 결국 그 학원을 인수하였다. 이사를 하고 정리하니 전 보다는 한결 자리가 잡힌 큰 미술학원이 되었다. 미술학원을 처음 인수하기까지는 집을 팔아서 자금을 마련하고 내가 전면에서 뛰었지만 그 후로는 아내의 부담과 계획으로 은행 융자금을 쓰는 일이 많았다. 아내가 얼마나 열심히 가르치고 경영하였는지 처음 예란을 인수하였을때 20명의 원생이 150명까지 되었다. 그때는 광명시로 승격이 되었는데 관내에서 유치원하면 경기유치원이었고, 미술학원하면 예란이라는 호평을 받았었다.


민희네 문간방에서 살다가 광명아파트 13평으로 집도 옮기었다. 오래된 주공 아파트로 좁긴했지만 방은 2개였다. 거처도 안정되고 아내의 예란미술학원도 더욱 안정되어가고 있었다. 어느날 기다리고 기다리던 전화가 드디어 나왔다. 물론 청색 전화 였지만 614-4042 이던 첫 전화 번호 만큼은 아무리 세월이 가도 잊어 버리지 않는다. 처음 전화기를 떡하니 서랍장위에 놓았을때 얼마나 흐뭇 했던가. 드디어 우리도 전화를 놓게 된것이다. 미술학원 운영의 가장 어려운 행사는 연말에 해야하는 작품전시회와 재롱잔치였다. 그 시기가 되면 아내의 일이 힘들어지니 나는 회사생활을 하지만 퇴근후에 가서 도와 주기도 하였다. 그 두 행사에 따라서 다음해 원아모집이 좌우되니 원장인 아내의 신경이 예민해 질 수 밖에 없었다.


회사에 인사 변화가 다가왔다. 제약회사 영업의 핵심은 종합병원 영업이며 전국 종합병원 영업의 꽃은 서울대학병원이었다. 서울대병원 임상 각과의 처방 약물은 전국 모든 종합병원 처방의 지침이 되는 상황이었다. 가톨릭 계열 병원이나 세브란스 계열 병원등 모든 종합병원은 한사람이 두 세개의 계열 병원을 담당하나 서울대병원만은 유일하게 한개의 병원만 담당하고 있었다. 그만큼 병원영업 전체에 미치는 영향과 상징성이 컸기 때문이다. 서울대병원 담당자는 거의 과장 진급을 하는 코스였다. 그해에도 서울대 병원 담당자가 진급하여 개인 병의원 과장으로 나가게 되어 새로 담당자를 선임해야할 상황이 되었다. 누가 새로운 서울대 담당자가 될것인가. 논란에 논란이 거듭 되었으나 결국 회사는 소용순 주임이 담당하기로 결정하였다. 나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미 종합병원부에서 갈고 닦은 인재들도 많은데 아직 개인 병의원 부서의 주임인 내게로 낙점이 된것은 모두 의외였다. 나는 병원3과 업무를 모두 인계하고 종합병원1과로 이동 하였다.


1982년 1월. 그렇게 각광받는 서울대병원 담당자가 되었다. 그러나 인생만사는 새옹지마이며 호사다마라 했던가. 동아제약은 그 해의 서울대학병원 연간 입찰에서 대 실패를 하고 말았다. 연간 입찰이란 1년간 그 병원에서 사용할 약품을 선택하는 입찰이다. 일년 농사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싸움이다. 응찰은 제약회사에서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있는 도매상을 지정하고  납품권을 주어 그 도매상이 입찰에 응하는 것이다. 아직 특허 기간내에 있는 다국적 기업의 신제품은 대부분 필수적으로 병원에서 사용해야하나 경쟁품이 없는 유일한 제품이니 각 도매상은 다국적 기업에 그 제품의 납품권을 따기 위하여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그런 제품은 납품권만 따면 땅집고 헤엄치기로 이윤이 남으니 말이다. 그러나 시판된후 15년 정도 지나 국제 특허가 만료되면 2, 30개 정도의 국내 회사에서 일시에 카피 제품이 쏟아져 나온다.


카피 제품이란 브랜드 가치는 좀 떨어지나 일단 성분은 동일 성분이며 Bioavailability(생체이용율) 시험에서 오리지널 제품과 동등하다는 시험결과를 식약청으로 부터 인정 받은 제품들이다. 동일 성분 카피 제품이 그렇게 많으니 서울대학병원에 납품하려는 성분명 입찰 경쟁은 피를 튀기는 싸움이다. 덤핑입찰을 하여 완전히 가격을 후려쳐서 응찰하니 그 결과는 누가 먹을지 예측도 어려웠다. 그토록 각 회사가 도매상을 내세워 출혈경쟁하는 것은 서울대 남품의 효과는 전국의 대학병원에 파급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지방의 적은 대학병원에서는 서울대학병원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정보만으로도 그 제품의 가치를 인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해 서울대 입찰에서 최대의 관심사는 세파로스포린계 항생제인 세파메진(세파졸린 제제)이었다. 세파메진은 일본 후지사와 제약에서 개발하고 국내에서는 동아제약이 판매하는 오리지널 제품이었으나 이미 여러 회사에서 카피 제품을 출시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주력 경쟁회사는 오리지널인 동아제약의 세파메진과 유한양행의 카피인 유한 세파졸린 이었다. 치열한 정보전으로 얼마의 단가에 들어가야하느냐가 관건인데 경쟁이 심화되면 양사 모두 출혈이 심한 상황이었다. 동아와 유한 양사의 영업총수가 입찰 전날 밤 만나서 신사협정을 체결하였다. 서로 얼마의 선 이하로는 출혈 하지 말자는 신사협정이었다.


그러나 입찰 당일 결과를 개봉해보니 상상을 초월하는 저가에 응찰한 유한양행의 승리로 나타났다. 신사협정이고 뭐고 회사의 생사를 가름하는 입찰 경쟁에서 그런 언약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입찰에서 납품권을 잃어 버리고 나면 내년도에 다시 낙찰을 받을때까지 1년간은 서울대에서 그 제품은 쫒겨나게 되는 것이다. 전사의 모든 역량을 결집하여 입찰에 응하는 전략의 성패는 담당자 한사람의 업무범위를 벗어난 것이었다. 응찰 가격 전략은 본사의 기획 부서와 지정 도매상의 예측 정보와 영업총수 선에서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내가 서울대를 담당하게 되자마자 가장 큰 주력 제품을 잃어 버리게 된 것이다. 이런 불운이 없었다. 그러나 주사위는 던져 졌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해에 내 실적은 필연적으로 저조했다. 모두가 왜 저조한지는 알지만 그러나 어찌 됐든 담당자로서 부서에 미안하고 월말 영업 마감을 할때면 동료들에게도 미안하였다.


그때 병원부의 선임과인 병원1과의 과장은 본사 의약실에서 세파메진 PM으로 근무하다 내려온 L부장이었다. 성격이 칼칼하여 나와는 부딪침이 많았다. 물론 내 성격도 칼칼한 상사에게 부드럽게 대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회사의 입찰 정책 실패로 서울대 실적을 잃어버린 것이었지만 그 어려움은 점차 나에게로 영향을 미쳐왔다. 나는 업무 의욕을 완전히 잃어 버렸다. 서울대에 가도 그다지 영업 활동을 할 거리도 많지 않으니 가끔 시간을 내어 부동산 분야의 내 개인 일을 보는 경우도 있었다. 업무에서의 소외감을 내 개인 부동산 분야에서 충족해 보려는 보상심리도 있었다.


또한 업무의 침체기를 내 영어실력 강화의 기회로 삼아야 되겠다고 생각 하였다. 그 시기에 종로 2가통 학원가에 안다녀본 학원이 없을 정도였다. YMCA 영어학원에서는 송성문의 정통 종합 영어를 다시 공부하고 파고다학원, 코리아 헤럴드 학원, 공평학원 등 학원가를 섭렵하며 회사만 끝나면 저녁 시간에는 집으로 바로 퇴근하지 아니하고 공부에 집중 하였던 것이다.


그 무렵에는 병원과의 영업 비용이 풍부했다. 매출의 몇십퍼센트 정도가 영업 비용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우리 종합병원 1과는 명실 공히 동아제약 병원부의 선임과이기 때문에 고참 주임인 동기가 나를 포함해 네명이 포진하고 있었다. 과장과 동기 세명은 모두 술을 좋아하고 노는 것을 좋아 하였다. 술마시고 놀 경비는 언제나 풍부하니 나를 뺀 과장과 동기 셋의 네명은 거의 매일처럼 강남의 고급 술집에 가서 술마시고 놀았다. 나는 그들과 어울리지 않고 스스로 왕따를 자청하여 영어 학원으로 달려가곤 했던 것이다. 그들과 어울리기 싫었던 이유는 첫째 나는 술담배를 싫어 하였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형은 술 취해 게걸대며 헛소리 하고 술냄새 마늘냄새 푹푹 풍기며 다가 앉는 사람이다.


인간미가 좀 없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싫은건 어쩔 수없는 것이다. 둘째,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궁극적으로 영업직이 나의 평생 직업이 아니라는 결심을 한 것이었다. 대학원에 가서 경영학 마케팅을 전공하고 기획부서에서 두뇌를  활용하는 분야로 진출하고 싶은 것이 누구에게도 말하진 않지만 끈질긴 가슴속의 희망이었다. 그러니 나는 가야할 길이 멀고 영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데 술마시는 과장과 동기들과 무슨 친근한 마음이 있어 어울리고 싶었겠는가. 나는 영업 생활 전체로 보면 실적이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성격을 생각할때 결코 영업직에 맞는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서비스 정신이 나는 없다. 좀 썰렁한 성격으로 영업을 위해 억지로 지어서 하는 것이지 진심으로 고객 서비스를 하는 성격이 아닌것이다.


처음에는 과장이나 동기들이 " 그래, 넌 학원가지? 공부 열심히 해라" 하고 무심히 넘겼지만 매번 술 모임에 참가하지 않고 빠져 나가는 나와 점점 관계가 소원해지기 시작하였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내 무의식 속에는 '술 타령이나 하는 친구들' 하고 무시하는 잠재의식이 있었고 그 친구들은 '짜식 별 볼일도 없는 놈이 맨날 무슨 공부야' 하고 역시 무시하는 마음과 또는 질시의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광명 아파트에서 1년여 생활한후 1982년 여름 개봉역 앞의 원풍아파트 24평으로 이사하였다. 당시만해도 원풍아파트는 주공이 아닌 민영 아파트로서 그 주변에서는 좀 수준이 있는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였다. 출퇴근시 개봉역에서 내려 그 옆을 지나다니면서 언제나 저기로 가나 하고 부러워 했었는데 드디어 원풍으로 들어가게 된것이다. 방은 세개인데 주방에 붙은 방은 아주 적었다. 아이들도 한결 좋은 조건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우리 집에서는 가족의 생일이 돌아오면 어른이든 애들이든 똑같이 생일 축하 행사를 한다. 장안아파트 시절부터 이미 그런 가정문화가 생겨 있었다. 일단 생일에는 외식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케익에 촛불을 키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후 케익 커팅식을 한다. 그때는 생일자가 커팅 칼을 잡고 다른 모든 가족들은 생일자의 손 위에 손을 같이 잡고 케익을 자른후 모두 박수를 친다. 그리고 생일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축하와 감사의 기도를 대표로 드린다. 다음은 선물 증정 시간이다. 무엇이 됐든 선물이나 또는 축하금 봉투를 상위에 펼쳐 놓고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생일자가 축하 카드를 하나 하나 읽어 내려 가는 것이다. 그 모든 과정들을 그때는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을 해 두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모두 배가 불러도 생일 케익은 한조각씩은 꼭 같이 먹는다. 그러면 생일 축하 가족행사가 끝나는 것이다.


나는 어린시절부터 교회에서는 어린이 성가대로 봉사해 왔지만 성인이 된 후에도 거의 중단 없이 성가대나 합창단 활동을 해왔다. 음악은 내 인생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성가대나 노래 선교단 외에도 장안 아파트부터 같이 활동했던 남성4중창단이 있었다. 은발을 휘날릴때까지 같이 하자고 약속하고 활동하고 있었다. 내가 제일 맏이이고 둘째가 조흥은행에 근무하던 권완상, 세째는 음악 지도를 담당하는 이상호 였고 넷째 막내는 문성열 이었다. 문성열은 현재 여주교회의 담임목사이다. 일주일에 한번 교회등 연습장소에서 열심히 연습하고 여러 교회의 찬양예배나 결혼식 환갑잔치 등의 예배에서도 초청을 받는대로 공연 하였다. 우리는 무반주 아카펠라 연주로 주요 곡들은 '자 이제 손을 잡아요', '거룩한 시은소에', 나의 기쁨이 되시는 나의 주여', '하늘가는 밝은 길이', '기도의 시간' 등 많았다. 연습 외에도 서로 형제와 같은 우애를 쌓으려고 속리산 등에 여행을 가기도 하고 주로 우리집에서 철야 단합대회를 하기도 하였다.


원풍아파트에 살때 단합대회를 하는 날은 잠시 밖에 외출했다가 같이 집으로 돌아올때 아파트 경내를 걸으며 자연스럽게 4중창을 하곤 했는데 천국의 소리와 같은 남성 중창이 아파트 경내에 울려 퍼지면 "이게 웬 음악 소리인가" 하고 각 가정에서들 베란다를 열고 고개를 내밀어 듣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가깝게 지내며 멋지게 늙을때 까지 같이 하자고 약속하였는데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하고 말았다. 물론 한참 직장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이니 나와 들째 완상이가 일본 근무로 떠나게 되어 물리적으로 같이 하기 어려운 환경이 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사이가 뜬것은 서로의 사고방식 차이가 원인이 되었다.


우리 네 사람은 별 문제가 없었으나 나와 완상이는 결혼을 하였고 상호와 성열이는 당시는 아직 미혼이었는데 어느해 여름에 동해안으로 놀러 갔다 오는 길에 완상이 아내와 상호간에 매너를 둘러싸고 심각한 이견이 생긴게 멀어지게 된 실제적인 원인이 되었다. 너무나 음악을 사랑하였는데 같이 하지 못한 것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아쉬움이다, 물론 완상이는 지금도 한국남성합창단에서 활동하고 상호는 코리아남성합창단에서 활동하고 있다. 나는 중창단 활동이 중단된 후에 직장생활 외의 모든 시간을 부동산 투자 게임과 영어 공부 쪽으로 몰두하게 되니 자연히 더이상 중창을 같이할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무렵 어느날 나는 종로2가의 한국지리원에 가서 복덕방에서 보는 대형 벽걸이용 서울시내 부동산 전도를 샀다. 그 큰 지도를 원풍아파트 작은방 벽에 붙였다. 서울의 현재 모든 도로와 개발 현황아 표시되어 있을뿐만아니라 향후의 계획도 표시되어 있었다. 회사가 끝나면 밤에 돌아와 그 지도를 바라보는 것이 나의 취미였다. 그 대형 지도를 오랫동안 응시 하고 있으면 지도 속에서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가 들려 왔다. 다음 단계의 서울시 확산과 개발이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지 눈앞에 펴쳐지는 것이었다. 현재의 풍경속에서 10년후에 변화할 눈부신 신풍경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강남구를 좋아했다. 그때까지 강남구의 개발은 개포동이 끝이었다. 나는 그 개포동에서 부터 아직 개발이 이뤄지지 않은 그 외곽지역을 발로 밟으며 돌아 다녔다. 수서 로타리에서 탄천변에 이르는 논길과 마을의 시골길을 기웃 기웃 구경을 하고 다녔다. 그리고 대모산에 올라가 그 주변 전체를 관망하였다.


드디어 나는 투자 가치가 있는 한 지역을 발견하였다. 잠실에서의 개발 확산은 성남 가는 송파대로의 길을 따라서 진행중이었다. 강남에서의 끝은 개포동이었다. 그 사이에는 탄천이 흐르고 그 일대는 아직 논이었다. 아직도 흙먼지가 나는 세곡동 로타리로부터 수서까지 이르는 탄천변의 삼각지역을 지목한 것이다. 대형 지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 삼각 지역이 개발되는 것은 몇년 걸리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그곳에 투자를 해야 하겠는데 아직 개발되지 않은 원주민 마을도 괜찮은 집은 이미 내 능력으로는 사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별수 없이 내가 투자 대상을 삼은것은 '용마루'였다. '용마루'란 부동산에서 쓰는 용어로 허가 받은 주택은 아니지만 아주 옛날부터 있었던 무허가 구옥으로 구청의 가옥대장에는 나와있는 허름한 집이었다. 마을이 후에 도시 정비법에 의해 개발될때 정식 허가 가옥은 멸실후 좋은 택지를 환지 보상 받게 되지만 가옥대장에만 나와있는 구옥인 이른바 '용마루'는 그 평가 금액에 따라 추가 부담금을 내고 환지를 받거나 후면 택지등 선호도가 떨어지는 지역의 환지를 받는 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