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에서 진급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회사 생활이 힘들고 괴로워도 침고 지속 하는것은 진급의 기대감이 에너지가 되기 때문이다. 진급이란 단순히 급여가 오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것이며 명분과 자존심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1980년 처음으로 해외연수를 마치고 돌아온후 7월 1일에 주임진급자가 발표 되었다. 실적 평가, 시험 성적 및 인성 평가 등이 진급 사정의 중요 요건 들이다. 나는 나름대로 평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였기에 기대하고 있었는데 역시 기대대로 합격되니 온가족이 같이 기뻐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발령지가 부산지점으로 난 것이었다. 부산은 잘 가본적도 없는 낯선 타지이며 이미 아내가 미술학원을 시작하여 가족이 같이 갈 수도 없는데 사정이 난처했다. 나는 어떻게든 바꿔보려고 재 상신하고 노력하였으나 회사는 들어주지 않았다. 부산지점에는 동기가 3명인데 그중 김상식 주임 한명만 진급하여 서울로 올라와 나와 맞바꾸기로 된 것이었다. 경기북부 지역을 인계하고 이런 저런일을 하며 꾸물거리다가 7월 15일이 되어서야 부산지점에 도착하니 정두찬 지점장님이 노발대발 하며 "소주임 너 필요 없다. 발령난지 15일만에 오는놈이 세상에 어디있나?" 하고 야단이었다. 그런대로 무마되어 병원과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나는 진급하였으니 떨어진 동기 두명을 내년에는 어떻게라도 진급 시켜봐야지 않겠냐며 탁대근 병원과장이 얘기하였다. 내 거래처를 보니 그다지 좋지 않은 지역이었다. 부산지점 동네에서는 서울에서 나이도 어린데 주임이 내려 왔다고 어떤 사람인가 하고 호기심어린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병원과 탁과장님은 서울 여의도가 집인데 혼자 내려와서 여관에서 잠만 자고 식사는 매식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고, 나는 하숙집을 정하여 생활하니 아침 저녁은 하숙집에서 식사하였다.
주말이 되면 토요일 12시 우등열차로 상경하여 귀가하였다. 새마을이면 4시간 걸리는데 우등열차는 5시간 반이 걸리었다. 매주 부산 서울간을 오가며 주말 부부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서울에 와서 주일 하루를 보내고 나면 밤 11시 30분 우등열차 침대차를 타고 내려갔다. 월요일 새벽 5시쯤 부산역에 내려 한주일을 시작하면 피곤하였다. 그렇게 오르내리다 보니 딸 첫돐도 제대로 상을 차려 주질 못하고 그냥 가족끼리 식사하고 새옷입혀 집에서 사진 밖에 못 찍었다. 딸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자기는 돐 잔치도 않해 줬다고 섭섭해 하였다.
내 거래처는 한지역에 있는것이 아니고 활성화가 잘 되지 않은 준종합 병원 규모들이니 여러곳에 산재해 있었다. 위생병원, 구호병원, 해동병원, 춘해병원, 일신병원, 울산고려병원 등 이었다. 울산고려병원이 동강병원으로 오픈할때 그런대로 활성화는 되었고 해동병원과 위생병원이 약간의 개선은 있었지만 그다지 괄목할만한 업적은 아니었다. 내가 사정이 있어 서울에 가지 못하는 주말에는 아내가 아들을 데리고 내려 오는 일도 있었다.
양정 입구의 동아제약 부산 지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하숙하고 있었는데 하숙집 6살 딸 아이를 바로 집앞에서 사고로 잃고 나서 집안이 넋을 잃으니 하숙을 옮길 수 밖에 없었다. 회사와 바로 붙은 건물에 제일온천 캬바레, 목욕탕, 여관, 이발소, 미장원, 수퍼등 가족 친척들이 운영하고 있는 단지가 있었다. 그 안집에서 방을 새로 도배해놓고 내가 거기서 하숙해 주기를 바랬다. 초등학교 5학년 짜리 아들이 있는데 같이 방을 좀 써달라는 것이었다. 생활 습관을 바로잡고 학습에 도움이 좀 될까하고 바라는 것이었지만 나는 학생 가르치는 것은 학생 시절부터 많이 했기 때문에 이제 그건 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방만 아들하고 같이 쓰는 조건으로 하숙을 옮겼다.
저녁에 업무가 끝나고 나면 일본어 공부도 좀 하고 책도 보고 싶었지만 혼자 여관 생활 하는 과장님의 식사 상대를 해주는 일이 많아 맘대로 시간 활용하기는 어려웠다. 참 그때 캬바레 안집에서 생횔하면서 생소했던 캬바레와 제비(전문 춤꾼)들의 생리도 처음 알았다. 제비들은 대여섯명 되는데 캬바레 문열기전 오후 5시 경이면 모두 수퍼 옆방에 모여서 그날의 영업(?)을 준비 하였다. 수첩에 깨알같이 써놓은 거래처(아줌마들)에 일주일 정도의 간격으로 전화를 하여 나오도록 하는 것이었다. 우리도 병원 영업을 하는직업이었지만 어찌됐든 그 분들이 아줌마들을 중요도에 따라 A, B, C 급으로 분류하여 철저히 거래처 관리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배우는 점도 있었다.
나는 기회 있는대로 서울 근무로 다시 돌아갈 것을 지점장님에게 건의 하였다. 1981년이 되었다. 년초에 서울에 올라와 서초구 강남 성모병원 맞은편에 있던 김종혁 영업상무님 댁을 찾아갔다. 1월1일이라 부장급 이상 분들이 세배를 와서 떡국을 먹으며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거기에 같이 낄 직급도 아니었으므로 모두가 저친구 왜 찾아왔나 하고 쳐다보는 눈초리가 보기 민망하였다. 그러나 선친이 늘 하시던 '남자는 비후 치례를 해야힌다 (자신의 생각하는 대로 나가기 위해서는 좀 뻔뻔한 기와 배짱이 있어야 한다. 쭈삣거리고 수줍음 타서는 안된다. 언제나 당당하거라)'는 말씀을 생각하며 상무님께 한말씀 드리기를 원했다. 다른 윗사람들의 눈초리 때문에 내가 찾아 뵌 목적을 소홀히 할수는 없었던 것이다. 작은 방에서 상무님을 따로 뵙고 "부산 지점에 내려가 있는 소용순 입니다. 가정 형편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서울로 좀 올라오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간청하였다. 서울에서는 모시고 있던 정해국 과장님이 또 밀어 주셨다. 여러분의 도움으로 하루도 틀림없는 1년만에 1981년 7월 1일 부로 근무하던 병원 3과 주임으로 다시 컴백에 성공하였다.
그런데 아직 부산 지점에 있던 5월 어느날 이었다. 나는 죽을 고비를 당했다. 계절이 만일 겨울이었다면 이 글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전날에도 술을 한잔 했기에 나는 몸이 엄청 피곤하였다. 나는 한번 술이 취하면 그 후유증이 3일은 간다. 그래서 여간하면 술을 취하게 마시지는 않는 것이다. 그날도 일을 마친후 사무실에서 안나가고 있으면 술 좋아 하시는 탁과장님에게 걸릴것 같아서 일을 마치자 마자 "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하고 퇴근하였다. 하숙집이 제일 온천탕이니 집에 오자 마자 열탕으로 들어가서 숙취를 풀고 있었다. 그런데 입구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더니 세상에 탁과장님이 탕안에까지 나를 찾으러 오셨다. 또 술친구가 없었나 보다. "야 소주임, 너 어느새 여기로 도망왔어. 빨리 나와."하고 불러 내는 것이었다.
과장님이 부르니 별수 없이 끌려나와 하숙집에서 밥도 먹지 못하고 과장님과 같이 중국집에 가서 잡채밥을 먹었다. 물론 과장님은 밥만 먹지 않는건 당연하다. 둘이서 고량주 한병을 반주하니 나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다시 또 핑하니 취했다. 거기서 끝났으면 무사했을 것이다. 식당에서 내려오면서 과장님이 " 야 소주임, 식사했으면 입가심은 해야하는거 아니야? 우리 맥주 딱 한병씩만 하자." 하니 또 그말을 물리치지 못하고 가게방에 들어가 업소용 큰맥주 한병씩을 마셨다. 벌써 몸이 많이 늘어져서 이젠 정말 들어가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캬바레 지배인이 내려오더니 "아이구 소주임 탁과장님 모시고 캬바레 올라 오소. 술이야 머 맘대로 묵으이소." 하고 또 권하는것 아닌가. 과장님이 또 그 말에 솔깃하여 나를 잡아끄니 안올라 갈 수가 없었다.
그날은 저세상을 가기 위하여 모든것이 우연처럼 맞아 떨어졌다, 캬바레에 올라가서 제비들이 춤추는 것을 보았다. 그건 남자가 봐도 눈앞의 환상이다. 여자가 춤바람에 미치면 남편도 자식도 부모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제비의 춤솜씨를 보면 '아 맞는 말이 구나' 하고 이해가 갈것이다. 나와 탁과장님은 춤을 못추니 맥주를 마시며 구경만 하고 있었다. 남자가 봐도 뿅가는데 제비가 직접 춤을 추어주는 여자는 어떨 것인가. 거의 반 환각 상태라고 보아도 틀린 말은 아니다. 남여의 몸이 밀착 되었다 떨어지고, 짝 부드러운 반동을 주어 당겨 왼쪽 오른쪽으로 휙휙 돌리며 툭 튕겨 밀어주는 순간의 짜릿한 쾌감으로 여자는 거의 무아지경이 되는 것이다. 나 또한 술에 아주 가서 정신은 몽롱해져 오고 있었다. 그때 부산지점 약국과의 두세명 선배들이 들어왔다. 약업계에서는 병원과는 본래 약간의 엘리트 의식이 있다. 약국 영업 업무는 그만큼 더 거칠고 고된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 많은 선배들을 캬바레에서 또 우연히 만났으니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맥주를 더 시켜서 부어라 마셔라 하니 나는 이제 인사 불성이 되었다. 이미 술인지 물인지 아무런 차이도 느끼지 못하고 그저 앞에 잔이 차있으면 무조건 비우고 있었다. 서른 한살 이었다. 평소에 가까운 한 선배가 자기 집으로 가서 한잔 더 하자고 팔을 끌었다. 그 선배의 집은 회사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 아마 무의식 중이라도 젊은 혈기에 선배 집에 가서 한잔 더하고 통금전에 돌아 오리라는 자신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느새 다른 사람들은 다 떨어지고 둘만 남아서 비틀 거리며 선배의 집까지 걸었다. 밤 11시쯤 되었나 보다. 집으로 들어가니 선배의 말에 따라 형수가 조니 워카 블랙을 내 왔다. 40도짜리 양주를 맥주잔을 달래서 둘이서 찰랑찰랑 넘치게 따랐다. 선배와 둘이서 호기 좋게 "위하여~ !"를 외치며 원샷으로 비웠다. 세상이 빙빙돌고 어떤 생각도 없었다. 형수가 자고 내일 아침에 같이 출근 하라고 말렸지만 역시 객기를 부리며 "내가 누굽니까. 천하에 소용순 입니다. 집에 가야지요. 걱정 마십시오 형수님" 하고 큰소리를 치고 그 집에서 나왔다. 골목을 걸어 나왔다. 기억은 거기까지 뿐이다. 골목 담을 짚어가며 걸어 나온것까지이다.
온몸이 싸늘한 기운에 어렴풋이 정신이 들었다. 습관적으로 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차고 있었다. 새벽 4시였다. '내가 어디 있는 거지?' 하고 눈을 좀더뜨고 고개를 들어보니 사람 그림자도 없는 어느 길 가운데에 누워 있었다. 앞에는 로타리가 있고 눈부신 하얀 수은등 가로등이 길게 뻗어진 대로였다. 좀 더 정신이 났다. 술을 마시고 선배 집에서 나왔던 기억이 희미하게 났다. 4시간 정도 길에 누워서 잔것이었다. 순간에 정신이 들어 상반신을 일으켰다. 내 모습을 보니 팬티만 입고 있었다. 발은 피투성이 였다. 집에 온것으로 생각하고 습관처럼 모든 옷을 벗고 팬티만 입고 잠든 것이었다. 구두를 벗고 양말도 벗고 없었다. 그 상태로 더 걷다가 돌부리나 보도 불럭을 찬것인지 발이 피 투성이였던 것이다. 아픈것 보다도 더 겁이 나는 것은 '야 이러다 아침이 되면 어떡하나. 내가 미친놈 취급을 받을텐데." 하는 생각이었다. 모든 신경이 깨어나 급해지며 빨리 집으로 가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통금이 이제 막 해제 되었으니 택시는 잡을 수 있겠지 했다. 일어나서 비틀거리며 팬티바람으로 기다리는데 택시 불빛이 다가왔다. 길가에서 손을 들며 소리를 질러 택시를 세웠으나 서 주지 않았다.
나는 더럭 겁이 났다. 어떤 택시가 이 첫새벽에 팬티만 입은 놈을 보고 세워 주겠는가. 재수 없다고 휙 핸들을 꺾어 가버리는 것이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생각했다. 또 택시가 다가왔다. 길 가운데로 달려나가 팔을 벌려 택시를 막았다. 휙 핸들을 틀어 지나가려 하자 다시 팔을 벌려 그쪽으로 앞을 막았다. 별수 없이 택시가 서서 뮤리창을 내리더니 "새벽부터 재수 없게 웬 미친놈이고" 하며 소리치는 것이었다. 나는 열린 창문으로 다가가 " 아저씨 저 미친놈 아닙니다. 나쁜놈도 아녜요. 술을 마시고 어떻게 이렇게 됐는데 택시값 두배 드릴께요. 데려다 주세요" 하고 소리를 질렀더니 별수 없다는 듯이 "타소" 하는 것이었다. "양정 제일온천 캬바레요"하고 행선지를 알렸다.
하숙집에 도착하니 택시비는 800원이었다. 새벽에 문을 두드려 아주머니를 소리쳐 불렀다. 잠결에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아주머니가 나오셨다. 다짜고짜 "아주머니 이천원만 주세요" 했더니 가지고 나오셨다. 무조건 택시 기사에게 이천원을 주고 고맙다고 인사하였다. 아주머니 가 내 모습을 보고 질겁을 하셨다. 어찌됐든 집에 왔으니 대략 맨발을 닦고 내 방으로 들어가 정신없이 잠에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회사는 어찌 됐는지도 몰랐다. 출근을 않으니 탁과장님이 걱정이 되셨는지 동기를 보냈다. 말도 못하고 떨어져 있으니 가서 전했을 것이다. 점심때쯤 돼서 아주머니가 깨우셨다. "빈속으로 자믄 않된다. 전복죽 끓였으니 좀 묵고 자소." 하고 억지로 깨우셨다. 아침에 부전 시장에 나가 전복을 사다가 지극 정성으로 끓이신 것이었다. 들어가질 않으나 몇 숫가락 뜬 후에 다시 잠에 떨어졌다. 깨어난 것은 어둑해질 때였다. 목욕탕 뜨거운 물에 들어가 땀을 빼고 정신을 가다듬어 어제밤 일을 기억해 보려해도 아무런 생각도 나지를 않았다.
마지막 기억은 비틀거리며 선배집에서 나와 골목을 걸어 나온 순간까지였다. 골목 어귀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꺽어 길을 제대로 잡았다면 비틀거리며 걸어도 10분 정도면 집에 돌아올 거리였다. 그러나 아마도 완쪽으로 꺽어 집과는 반대 방향으로 걸었을 것이다. 아무리 걸어도 집이 나오질 않으니 어느 순간에 무의식 속에서 집에 다 온것으로 생각하고, 아니면 술기운에 몸이 더워서 다 벗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집을 나가서 아무튼 반대 방향으로 800원 택시 요금 나오는 거리를 수소문 했다. 파출소들을 방문해 어제밤 길에서 자는 취객 신고가 없었는지 문의했다. 진 하늘색 체크무늬 양복이 어디 없었는지도 물었다. 어떤 파출소에서도 그런 일 없었다는 것이다. 로타리가 있는 넓은 도로에 하얀 수은 가로등이 있는 거리가 어디있는가를 물었다.
모두가 그런 거리는 부산에 없다는 것이었다.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돌아가는 로타리 앞에 일직선으로 뻗은 수은 가로등 거리가 분명히 눈에 선한데 부산에는 그런 거리가 없다니 그런 답답함이 없었다. 그게 천국으로 가는 길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그때가 만일 겨울 이었다면 나는 1시간 이내로 동사했을 것이다. 오월이었기에 천국으로 가는 길 앞에서 다시 이승으로 돌아와 깨어 났던 것이다. 젊은 날의 객기가 만든 위험 천만한 행동이었다. 그후로 나는 길가에 쓰러진 취객도 함부로 생각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흔들어 깨워 주기도 하고 저 사람도 무슨 사정이 있겠지 하고 안쓰러운 생각을 하며 지나가곤 하였다.
어찌됐든 만 1년의 부산 생활은 다시 경험 하기 어려운 시간들이었다. 하숙집은 가족 친척이 운영하는 여흥 단지처럼 돼 있으니 어느 집이나 들어가서 TV를 보고 있으면 "소주임 밥 묵으소" 하며 밥상을 차려 내왔다. 졸리면 아무 집에서나 자면 이불을 덮어주고 나중에야 내 방으로 오곤 하였다. 내가 양정을 떠나는 날 밤, 낮부터 거래처에서 송별의 술을 마셔 비틀 거리는데 택시타는 곳까지 온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서 너무나 섭섭해하며 송별해 주었다. 여러 사람들로 부터 그런 사랑과 보살핌을 받아 본적은 그 전에도 후에도 없는 유일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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