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해가 바뀌자 장안 아파트 2단지가 한창 건설 중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나는 작년에 원매자 이름의 입주권을 샀다가 원매자한테 포기각서와 인감중명을 받지 못해 혼이 났었던 일을 벌써 잊어버렸던 것일까, 겨우 부동산을 통하여 해결하고 10월에 입주한지 석달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또다시 지금 건설이 다 돼가는 장안아파트 2단지 14평 짜리로 바꾸고 싶은 욕망이 살아났다. 방법은 또 전과 동일한 방법 밖에는 없었다. 한번 고난도 극복했으니 까짓거 또 한번 저질러보지 뭐 하는 심정으로 입주한지 얼마 안된 아파트를 800만원에 팔고 전세로 앉으며 14평 아파트 입주권 '물딱지'를 다시 샀다. 이번만 또 한번 잘 넘겨보자 하고 스스로 독하게 다짐했다.
이번에도 9월 말까지 원매자 포기각서와 인감증명을 제출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 원매자의 거주지를 찾아내야 하는데 그의 주소가 불분명한 것이다. 동사무소에 가서 이사간 주소 이전지를 물어서 획인하는 것인데 이사간 주소지로 찾아 갔더니 거기서 다시 이사 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대개 하루벌어 하루 먹는 분들이니 주소지니 뭐니 관심도 없이 이사는 가고 주소 이전은 않하는 분들도 많았던 것이다. 이건 보통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작년에 한번 어려움을 겪었다고는 하지만 이건 소재지를 못찾으니 어떤 방법도 없었다.
그 와중에도 내 영업 성적은 날로 우수해져서 전국 최우수에 오르기도 했다. 지점에서는 거의 매달 최우수 병원영업 상을 받기도 했다. 조금 위로가 되는건 아파트 문제가 어려운데 그래도 영업이 잘 풀리고 있으니 마음의 여유를 갖고 원매자를 찾아 보자고 몇번이나 스스로 다짐했다. 그러나 8월 1일 회사 전체의 여름 휴가가 시작 되기전 나는 마음이 뛰었다. 다른 직원들은 동해안이니 서해안이니 놀러가는 휴가계획 짜기에 마음이 들떠있는데 나는 홀로 가슴에 긴장이 높아가고 있었다. 주말까지 낀 3박 4일 여름휴가 동안에 이 아파트 원매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어떡하나하는 걱정에 가슴은 답답하기만 했다.
휴가 첫날 원매자가 처음 이사간 곳을 찾아갔다. 그곳을 다 뒤지면 누군가 원매자를 아는 사람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었다. 답십리 어느 동네를 다 뒤지며 수소문을 하는데 드디어 원매자를 아는 사람을 찾아냈다. 하지만 어디로 갔는지 주소는 확실히 모르겠고 그 사람 고향이 평택시 오성면 당 무슨리로 알고있다고 했다. 그 정도만 알아냈어도 엄청난 성과였다. 즉시 평택시로 버스를 타고 달렸다. 역시 궁즉시통이었다. 오성면사무소까지 가 확인하니 당거리라고 있었다. 다시 버스를 기다려 당거리에 들어가니 완전 농촌 마을 벽촌이었다. 원매자 이름을 대고 동네분에게 물으니 즉시 집을 알려 주었다. 하루종일 여기까지 찾아 오다 보니 저녁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들일들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이제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 각서와 인감증명을 또 거절 당하면 어떻게 할까 하고 긴장하고 가슴이 두근 두근하며 집 앞에서 기다리는데 한참후 집 주인인듯한 아저씨가 허름한 일옷 차림에 삽을 들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모르는 젊은 사람이 집앞에 서있는 것을 보고 "누구신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에서 왔는데요. 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들어가서 말씀 드릴까요?" 했더니 "그러세요" 하며 들어갔다. 나는 사가지고 간 케익 상자와 과자등 커다란 봉투를 마루위에 내려 놓으니 벌써 아저씨가 왜 왔는지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제가 입주권을 사서요 .." 했더니 "알아요. 왜 왔는지 .." 하며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왜 왔는지 설명할 필요도 없이 서로 명확하게 알았는데 서로의 마음속을 헤아리며 한동안 둘다 아무 말도 없었다. 한동한 침묵이 흐른 후에 아저씨가 먼 산을 바라 보시더니, "젊은 분이 살아 볼려고 애쓰시는데 어떡하겠어요. 우리야 이미 입주 포기 하고 팔아 먹었었는데.. 해 드려야지. 내일 아침에 면사무소에서 봐요."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이 확 밝게 열리는 것 같으며 '아 살았구나'하는 생각 밖에 없었다. 아저씨가 "뭘 이런걸 사왔어요." 하고 인사를 하시는데 나는 그정도가 문제가 아니었다. "별것도 아닌데요." 하고 인사드리며 내일 아침 9시에 오성면사뭇소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나는 막 버스를 타고 나와 오성면 소재지 여관에서 잤다. 아침 일찍 일어나 채비하고 9시에 면사무소로 갔더니 조금 후에 아저씨가 오셨다. 나는 준비해간 포기 각서 양식에 인감 도장을 받고 각서용 인감 증명까지 받았다. 나는 아저씨에게 진심어린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아내도 "이제 살았네. 고생 많았어요." 하고 위로해 주었다. 다음날 주택공사에 서류를 제출 하고 나서 휴유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주님께 감사를 드렸다.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건널 수 없는 강물이 앞을 가로 막았을때 좌절하여 주저앉아 있는 나를 일으키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셨다. 나는 그럴 때마다 멀리서 '둥 둥 둥' 하고 누군가 북소리를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때 조용히 다가 오셔서 실망해 주저앉은 나를 일으켜 세우시고 손을 잡아 강을 건너게 해주셨던 분은 언제나 주님이셨다. 이번일도 그렇게 주님의 인도로 해결한 것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14평 아파트인 장안아파트 52동 406호로 이사했다. 매년 숨막히게 달려온 모험의 결과로 소형아파트단지이지만 그중에서는 가장 큰 아파트로 이사를 온것이다. 가슴이 뿌듯했다. 요즘은 이사한다고 해도 주인은 거의 아무것도 손대지 않고 귀중품이나 중요 문서등만 미리 챙겨 가지고 있으면 되지만 그때만 해도 요즘과 같은 포장이사는 없었다. 라면 박스등 일반 재활용 박스를 이사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오면 주인도 같이 짐을 싸서 트럭에 싣고 이사짐만 옮겨서 집안에 넣어주면 정리는 완전히 주인 몫이었다.
그날도 이사짐하는 사람들이 짐들을 모두 집안에 넣어주고 간뒤 하나 하나 박스를 풀어 가며 정리 하고 있었다. 그때 아내는 둘째 임신 9개월로 만삭이었기 때문에 일은 할 수 없고 짐 정리 하는 내 곁에서 어떻게 정리해 달라고 얘기만 하고 있었다. 정리하다 보니 저녁시간이 지난지도 몰랐다. 짜장면이나 먹고하자고 배달을 시켰다. 배달이 오는 동안에 일단 TV나 좀 볼까하고 전원과 안테나를 연결하였다. 신혼때는 미쳐 TV도 못샀었는데 결혼한 해 초여름에 전농동 로타리에서 신일 선풍기 사고 1년 지나 대한 전선에서 새로 나온 개구리 모델 TV 빨간색을 청량리에서 산 것이었다. 물론 그때까지 우리나라엔 컬러 TV는 없고 모두가 흑백이었다. 하지만 처음 샀을때 '야 우리도 이제 TV가 있구나' 하고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가.
그 시절에는 전화 있는 집은 꽤 살만한 집이었다. 나는 전화있는 집이 너무나 부러웠다. 전화도 백색전화 청색전화로 구분돼 있었는데 그것은 전화기 색갈이 아니라 전화가입의 차별화 였다. 백색전화는 매매가 가능하고 비싼 전화였다. 청색전화는 신청한 명의의 사람만 사용이 가능하고 매매할 수는 없었다. 드디어 우리도 전화를 신청했다. 물론 처음에 신청하는 것은 언제나 청색 전화 이지만 대기자가 많기 때문에 언제나 나올지 알수 없었다.
아무튼 배달 온 짜장면을 먹으며 TV를 보니 조용필이 신곡 '창밖의 여자'를 발표하고 있었다. 나는 그 노래를 듣는 순간 노래가 마음에 들었다. '야 저 노래 힛트 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쑈 프로그램이 끝나고 9시 뉴스가 시작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삽교천 행사에 참석한 장면이 맨처음 메인 뉴스로 나오고 있었다. 짐정리 할 게 쌓였으니 뉴스를 대충 보고 TV를 끈뒤 다시 정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어차피 지금 다 하지도 못하는 거니까 내일 또 하지 생각하고 우선 잠자리 부터 차웠다. 아내와 첫애와 나 세식구 잘 자리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 하는데 신설동에서 내려 동화빌딩 사무실로 들어가려니까 "호외요 호외 !" 하고 신문 호외가 마구 뿌려 지고 있었다. 하나 주워보니 <대통령 유고>라고 제목이 되어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가 동료 후배 들과 같이 모여 서서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유고라니?"하고 서로 의아한 표정으로 사무실에서 웅성 거렸다. 그게 10월 27일 아침 일반에게 처음 알려진 <10.26 박대통령 시해 사건>의 처음 상황이었다. 그날 저녁이 되어서야 19년 동안 우리나라를 이끌어온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것을 알았다. 어제 저녁 이사짐을 정리하며 짜장면을 먹을 때 보았던 9시 뉴스. 그 시간에 박대통령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전두환 소장이라는 합동수사본부장이 나와서 굳은 표정으로 시해 사건의 전말을 발표하였다. 모든 기존의 질서가 멈추고 온나라가 정적에 쌓여 버린것 같았다. 그렇게 세상은 바뀌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정국은 요동치며 소란 하였지만 서민들의 생활은 어떻게든 또다시 펑온을 찾아 흘러가고 있었다. 신혼 초기 수년동안 경제적으로 많은 편의를 보았던 것은 바로 한국의 독특한 사금융제도인 '계' 라는 것이었다. 계주 개인을 믿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상당한 위험 부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계주가 계돈을 가지고 도주하는 사고가 가끔 보도 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정말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면 서로 상부 상조힌는 계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동지점 병원과 후배인 오규범씨는 나와 같이 장안 아파트에 살았다. 같이 생활 하다 보니 서로 신뢰가 있어서 청량리 미주 아파트에 사시는 오규범씨 누님이 하시는 계에 가입하게 되었다. 대부분 고급 공무원들끼리 하는 계라서 정말 신뢰하는 '계'였는데 어찌 해서 나도 끼게 된것은 행운이었다.
'계'란 대략 20개월 정도에 걸쳐서 진행 되는데 만일 계원이 10명이라면 앞번호 하나 뒷번호 하나를 배정받게 되는 것이다. 매월 같은 날짜에 곗돈을 계주에게 갖다 주면 1번은 계주가 받고 2번부터 앞번호 하나를 받고 10번 이후의 번호 하나를 받는데 물론 순번에 따라 내는 곗돈 액수는 다르다. 나는 통상 앞번호 하나를 받아서 집늘리는데 투자하였다. 앞번호가 내는 돈은 좀 많지만 투자한 부동산이 오르는 액수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높으니 그래서 덕을 많이 본것이었다. 후순위는 늦게는 타지만 금액이 낮으니 그 또한 할 만했다. 어찌됐든 그렇게 두 싸이클 정도 '계'를 하여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이다.
1979년 나의 영업은 최고조의 정상을 달렸다. 매월 마감을 하고나서 다음달 1일이 되면 나는 목표의 20퍼센트 정도는 이미 전달에 주문을 받아 놓고 있었다. 그러니 매월초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으며 영업 시간에 부동산 등 내가 알아보아야 할 물건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그와 관련된 부동산을 만나기도 하였다. 매월 말일 영업을 마감하는데 내가 들어가지 않으면 마감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내 담당 지역은 경기 북부 시골이기 때문에 전거래처를 다 돌아 월말 수금까지를 끝내고 회사에 들어가면 밤 아홉시나 열시쯤 되었다. 내가 최고참이었기 때문에 서울 지역이나 가까운 지역을 담당하는 담당하는 후배들은 모든 마감을 끝내놓고 과장님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빼고 과의 영업 목표가 부족한 달에는 내가 들어가면 분위기가 썰렁하였다. 내가 늦게 들어가 지친 표정으로 현찰이 빵빵하게 든 가방을 내려 놓으면 정해국 과장님이 "어이 영업도 잘못하는 사람들이 뭐하고 있어. 소용순 씨 돈이나 세어 주라구" 하고 후배들을 힐책하곤 하였다.
1979년도 저물어가는 12월 어느날 저녁에 오랫만에 친구 재억이가 장안 아파트에 놀러 왔다. 재억이는 사회 조직 생활은 하지를 않고 대학을 졸업한 후부터 어머니를 도와 음악학원을 하고 있었다. 나는 비록 영업이 순조롭다고는 해도 회사생활의 잠재적 불안감은 언제나 갖고 있었다. 아내는 만삭이 되어 살림만 하는 것도 힘들어 하고 있을때였다. 나의 불안감을 아는 재억이가 아내에게 미술학원을 해볼것을 권유하였다. 아내는 사실 그때 둘째를 출산 하고 나면 다시 교직에 복직하고 싶어서 순위고사 준비를 하고 있던때였다. 아내는 중등학교 미술 교사 자격증을 갖고 있으니 유아나 초등학생 중심인 미술학원을 해보라는 말에는 그다지 내켜하지 않았다. 그때는 그냥 그런 정도로 얘기 나누고 친구는 돌아갔다.
대망의 1980년이 밝았다. 본래 아내의 출산이 12월 말경이었는데 1주일 정도가 지난 1월 8일 아침에 약간의 진통이 시작 되었다. 전날 부터 쏟아지던 눈이 발목까지 빠지도록 쌓였는데 아침에도 함박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어머니와 처외할머니가 계셔서 큰애를 맡겨놓고 출근길에 아내를 조심 조심 부축하여 아파트 앞에서 택시를 타고 제기동 경동시장 근처에 아내가 다니고 있던 윤헌식 산부인과로 갔다. 아직 진통이 그렇게 심한 정도는 아니어서 일단 간호사에게 인계를 하고 출근하였다. 오전 11시쯤 출장을 나와 병원으로 가니 아내는 촉진제 옥시토신 점적을 맞고 있었다. 옆 침대에 입원한 산모 아주머니가 "그집은 배를 보니 아들 같은데" 하셨다. 진통이 점차 심해저 견딜 수 없게 되니 아내는 분만실로 들어갔다. 분만실 앞에서 초조하게 기디라고 있는데 아내의 진통 소리가 점점 심하게 들리더니 오후 1시 30분쯤 되었을까 "응애~ "하는 힘찬 아기 울음 소리가 들렸다. 같이 듣던 다른 아주머니들도 울음 소리가 엄청 크니 " 아이구 아들인가 보네" 하였다. 그런데 조금후에 간호사가 나오더니 "공주님 순산 하셨습니다" 하였다. 사내앤줄로 알고 있었는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약간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참, 남아 선호 사상의 영향을 나도 받고 있었나 보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딸이었던게 얼마나 다행이었던가. 아들만 둘이면 집안이 너무나 삭막할뻔 하였다.
딸아이는 첫째의 아들과는 달리 건강한 몸을 가지고 태어났다. 예방주사 맞는것 외에는 병원에 가본일도 별로 없었다. 같은 남매간이라도 어떻게 그리 다를까. 우유 한병을 숨도 쉬지않고 한숨에 뚝딱 먹어 치우곤 하였다. 첫째 때는 먹다 말다해서 한병 먹는데도 꽤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내 영업은 그 무렵에는 언제나 톱 수준이었다. A급 거래처들이 즐비했다. 의정부 신천병원, 성모병원, 동두천 성모병원, 보산리 골목안의 중앙의원, 남산의원, 부인의원, 포천 평화의 모친의원, 신광의원, 와수리의 삼광의원, 철원의 금성의원, 일동의 중앙의원, 현리의 현리의원, 교문리의 중앙의원, 현대의원, 장현의 장현의원, 퇴계원의 서민의원 등이 나를 믿고 신뢰하는 원장님들이었다. 특히 내가 디테일하는 고급 항생제를 믿고 많이 써 주셨다.
2월초에 재억이로 부터 전화가 왔다, 소하읍 광명리에 예란미술학원이 매물로 나왔는데 인수하면 어떠냐는 것이었다. 물론 여유 자금은 없고 만일 인수 하려면 집을 팔아 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결정을 하기는 그리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인수해 보라는 친구의 권유도 있고 나도 현재는 영업이 순조로워서 잘 나가고 있지만 영업 환경이란 언제라도 변화할 수가 있는것이기 때문에 가정의 경제적 안정을 위해서는 인수해 보고 싶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인수 한다면 아내의 이름으로 해야 할 뿐 아니라 아내가 경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내의 생각이 중요 했다. 둘째를 낳고 아직 한달 남짓 밖에 안지났는데 자기 몸이 힘드니 인수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나는 기회가 언제나 있는게 아니라서 가능하면 해 보자고 졸랐다. 많은 생각끝에 아내가 마음을 먹었다. 끝까지 거부 하다가 나중에 나에게 원망 듣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한다.
광명리에 있는 미술학원을 재억이와 같이 찾아가 보고 장안평에 돌아와 14평 짜리 아파트를 1400만원에 내놓으니 며칠 않가 계약이 되었다. 계약금을 가지고 예란 미술학원에 가 매매 계약을 체결 하였다. 드디어 집을 팔고 전혀 새로운 형태의 생활을 시작하려니 가슴이 두근 두근하였다. 그러나 주사위는 이미 던져젔다. 2월 말에 집판돈 잔금을 전부 쏟아붓고 나니 단칸 셋방 얻을 돈밖에 남지 않았다. 아내가 힘들어 하였지만 아이 둘에 처외할머니까지 모시고 광명리 개봉극장 뒤의 민희네 집이라는 개인주택 문간방 하나에 겨우 세를 얻어 머리 둘곳만은 마련하여 이사하였다. 3월 2일 개학을 하기 며칠 전에 재억이 ,매제 양서방, 재천이 처남과 나 넷이서 밤을 새워 미술 학원 내부를 개조하여 겨우 개학 준비를 마쳤다. 아내는 J공고에서 퇴직하고 첫애 낳고 둘째애 해산한지 두달만에 다시 사회 생활을 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예란미술학원은 개봉극장 맞은편의 작은 빌딩 2층에 있는데 100미터도 안되는 거리에 상당히 큰 색동 미술학원이 있었다. 규모나 시설면에서 아내가 많이 떨어졌다. 그러나 아내는 교사 출신으로서 성격은 고지식하고 성실하니 아이들을 얼마나 열심히 지도 하였는지 그 근방에서 평은 좋은 편이었다.
그해 4월에는 주임 진급시험이 있었다. 임사후 만3년이 지나면 진급시험을 치루는데 과목은 경영학 영어 제품학의 세과목이었다. 시험 성적은 물론 중요 하지만 보다 더 근본 적인 것은 영업 실적이었다. 나는 틈틈히 열심히 공부하여 시험도 잘 치루고 영업 성적도 최상급이니 시험을 치루고 나서는 합격의 결과를 기대하고 있었다. 발표는 통상 매년 7월 1일이었다. 5월초부터는 온나라가 데모로 엄청난 난리가 났다. 전두환 정권을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데모였다. 그 시끄러웠던 어느날 관리부에 있던 한형호 동기한테서 전화가 왔다. 뜬금없이 "소용순씨 좋은 소식 있던데?" 했다. 나는 아무것도 생각 나는게 없어서 "응? 무슨 좋은일?" 하고 반문을 하였다. 한형호씨는 본사 관리부에서 근무하니 정보가 빠른 모양이었다. "파니마이신, 비스타마이신 등 메이지세이카 제품 실적이 전국3위에 들은것 같애. 해외연수에 선발 되었더리구."하고 뜻밖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다.
5월 17일경부터는 전남 광주 일원에서 대 혼란 사건이 터진것 같았다. 매일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어 많은 사상자가 난것 같은데 방송이 통제되고 있으니 자세한 내막은 알 수가 없었다. 오히려 외신에서 각국으로 비상 상황을 타전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내국인들은 모르고 있으니 그저 폭력 시위가 엄청나나 보다 하고만 생각하였다.
그때는 아직 통행금지제도가 있었으며 여행 자유화는 시행되기도 전이어서 여권도 잘 나오지 않을때였다. 해외여행이란 특별한 여건에 있는 사람들이나 가는거지 일반인들은 생각하기 어려운 때였다. 그런데 메이지세이카 초청 연수팀에 선발된 인원들은 6월 1일 드디어 김포공항에서 출발하였다. 인원은 김학오 굉주 지점장, 본사의 이성욱 경리부장, 전주지점 종합병원 김선준 주임, 종합병원 2과의 정진호 주임, 부산지점 병원과의 박우성씨 그리고 서울 병원3과의 나 이렇게 6명이었다. 거의가 다 처음 해외에 나가는 것이니 모두 마음이 들떠 있었다. 우리를 인도하는 팀장은 메이지세이카 국제부 소속인 우치지마상이었다. 우치지마상은 일찍 한국으로 와서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완벽하게 우리를 준비 시키고 김포공항에서 같이 출발 하였다. 첫 도착지는 타이페이였다.
당시 타이완은 우리보다 훨씬 더 잘사는 나라였다. 비행기가 개항한지 1년 정도밖에 안된 중정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우리나라 김포공항과는 비교가 인되게 깨끗한 신식 공항 청사였다. 공항에서 호텔로 들어가는 연변의 집들도 잘 정돈된 상태였다. 우리도 여름으로 들어가는데 대만은 아열대 기후이니 더웁기는 무척 더웠다. 대만에서는 메이지세이카 대만 지사장이 같이 나와 우리팀을 완벽하게 접대하였다. 호텔은 신아대반점(New Asia Hotel)으로 지은지 얼마 안된 고급호텔이었다. 나는 전주지점 김주임과 룸메이트가 되어 처음 방에 들어가서 TV를 켰는데 세상에 컬러 TV가 나오는게 아닌가 우리는 깜짝 놀라며 신기해 했다. '대만도 우리보다 잘사는구나' 하고 실감이 갔다. 우리나라는 거리에서 보아도 사람들이 무표정하고 분위기가 무거운데 대만은 이미 통행 금지도 없고 사람들의 표정이 엄청 밝았다. 심지어 밤이 늦어 새벽이 가까워 올때까지 하하 허허 웃으며 먹고 마시는 사람들도 있었다. 참 처음 접하는 외국 풍경이라 그런지 모든것이 다르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조식은 호텔에서하고 전용 차량에 탑승하여 중산박물관, 고산족 관광지 등 타이완의 주요 지점들을 관광하고 중식과 석식은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 하였다. 국내에서 영업 할 때는 힘들었지만 일본 제휴회사의 초청을 받아서 완전히 VIP접대를 받으니 그런 호사가 없었다. 하루 일정이 끝나 호텔로 돌아오면 위의 두 부장님들은 방으로 들어 가시고 우리 네사람은 야시장에 나가서 처음보는 종합 열대과즙을 마셔보기도하고 큰방에 같이 모여 놀았다. 정말 초호화판 접대를 받았던 것이다.
3일간의 타이완 일정이 끝나고 비행기로 일본으로 출발 하였다. 오오사카 공항에 내리니 밤이었다. 공항 밖으로 나오며 깜짝 놀랐다. 서울에서는 전력을 아낀다고 등화를 관제하며 가로등도 밤시간이 되면 일부를 끈다음 드문드문 키며 네온싸인 등은 거의 사용하지 못했다. 일본에 대한 첫인상은 '야~ 정말 일본은 잘사는 구나' 하는 탄성이었다. 공항 밖이 온통 불야성 이었다. 각종 호화 찬란한 색의 네온싸인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정말 산골 촌놈이 서울에 처음 내린것 보다 더한 충격이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세이카 동경 본사 국제부에서 한사람이 더 나와 우치지마상을 보조하였다. 오오사카 시내는 물론, 나라, 코오베, 쿄오토 등 관광지를 다닐때마다 끊임 없이 사진을 찍어 주었다.
칸사이 일정을 마치고 신칸센을 타고 토오쿄오로 이동하였다. 시속 200킬로의 고속 열차를 타니 신기하였다. 내 눈에 비친 토오쿄오는 정말 서울과는 비교 안되는 국제 도시였다. 긴자3초우메에서 쇼핑을 하고 아키하바라에서 소니 워크맨과 닛콘 1.7 카메라를 샀다. 사진 전문가나 쓰는 고급 카메라를 욕심껏 샀지만 나는 사진 취미가 별로 없으니 후에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다. 신주쿠 교우엔, 니주우바시, 닛코우의 토우쇼우구우, 신주쿠, 요코하마, 하코네 등 칸토우 지역의 주요 관광지를 구경하였다. 하루는 긴자에 있는 메이지세카 본사를 견학하고 사장님과 미팅을 가졌다. 자사제품 영업 우수자들로서 그야말로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사장님은 우리 여섯명 모두에게 일본 명예의 상징인 사무라이의 철제 투구를 선물하였다. 그 철제 투구는 집안 어딘가에 아직도 있을 것이다.
본사 견학후는 공장 견학을 하였다. 모든 제품 라인이 컴퓨터로 통제되는 자동화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깊은 인상을 준것은 공장 폐수 처리 시스템이었다. 생산시설에서 막 나오는 폐수는 먹물처럼 새까만 독한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카다란 양어장 같은 수조 시설이 6단계가 있었다. 규정된 정화 장치를 각 단계에서 거치는데 점점 맑아지는 물이 마지막 6단계에 가면 비단 잉어가 자라는 양어장이었다. 그곳에서 강물로 흘려 보낸다는 설명이었다. 환경의 중요성과 정화 과정을 철저히 지키는 시설을 보고 정말 큰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그때의 일본에 대한 부러움과 감동이 훗날 내가 일본으로 전근하고자 하는 열망이 되었는지 모른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마지막날 하네다 공항으로 출발하기전에 7일간 찍었던 사진으로 만든 각자의 앨범을 선물 받았다. 어느새 모든 사람의 앨범을 사진에 설명까지 곁들여 만들었는지 너무 감동적인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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