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어나 저 강을 건너라

동아제약 생활과 첫 아들 태어나다. 부동산의 세계에 눈뜨다

Billy Soh 雲 響 2020. 3. 9. 21:54

교실에선 공부잘 하는놈이 최고, 운동장에선 운동 잘하는 놈이 최고다. 골프장 가면 깡패든 건달이든 교수든 그저 골프 잘 치는 사람이 왕이다. 골프 못치는 사람보면 왠지 멍청하게 보이는 것이다. 영업에선 당연히 장사 잘하는 사람이 최고다. 제아무리 잘나고 학벌좋고 똑똑해 봤자 실적 없으면 바보된다. 나는 동아제약 동지점 병원과로 배치받아 처음 담당한 지역이 성동구의 금호동 왕십리 신당동 지역의 병의원 영업 담당이었다. 대개 이지역을 담당하면 실적이 안올라 얼마안가 사직하는 지역이다. 꿈을 가지고 입사했는데 현실의 냉혹한 장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물론 영업하는 사람이 시장 탓을 한다면 서예가가 붓을 탓하는 것과 마찬가지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해도 신입사원에다 영업마인드가 아직 철저하지도 않은 나에게 성동구의 일부 지역은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시장이었다.


아내는 신혼 초 1학기 까지는 J공고에서 교직 생활을 계속 하였다. 1학년 여고생 담임을 맡아서 시작한후 계속 같은반을 데리고 올라가 어느덧 제자들은 여고 3학년이 되었다.웬만하면 담임했던 반을 졸업이라도 시키는게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학교가 지방이니 토요일에 올라 왔다가 월요일 새벽에 내가 서울역 앞 속리고속 터미널 까지 데려다 주면 거기서 출근하는 생활이었다. 아내의 체력이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던차에 첫아이를 임신하니 입덧이 엄청 심하여 전혀 먹지를 못하였다. 별 수가 없이 여름 방학이 끝나는 8월 말일 자로 퇴직하기로 결정 하였다. 아내는 여름이 지나며 직장 생활을 정리하고 올라오게 되었다.


나의 회사 생활은 전국 병원부 200명중 실적 순위가 언제나 하위 10퍼센트에서 맴돌았다. 장교 출신 이라는 자존심은 완전히 무너지고 하루 하루 생활 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회사 생활이 그렇게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한쪽 파트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암사 주공아파트 9평 짜리가 4월 초에 80만원에 사서 5월초 결혼할때 100만원이 되었는데 결혼 후에 하루밤 자고 나면 3~5만원씩 오르는 것이었다. 내 월급이 한달에 10만원인데 2, 3일에 한달 월급이 오르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잘 몰랐지만 때는 마침 제1차 중동붐을 타고 한국 경제는 목하 고속 성장을 기록하며 부동산은 상상을 초월하게 상승하고 있는 것이었다.


결혼 전에 망설였던것처럼 만일 조금더 벌어서 1년 후쯤 결혼하기로 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었다. 아무리 돈을 모은다 한들 집값이 올라가는 것을 어떻게 따라 가겠는가. 양가 의견을 순종하여 결혼 연기를 했더라면 아마도 서울 생활은 어렵고 의정부나 부천 등 서울 외곽 지역으로 나가서 신혼 생활을 출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시절의 사회는 그렇게 급박하게 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평생에 내가 한일 중에서 가장 잘한일은 수년전 잡았던 결혼 일자 계획을 주변의 말 듣지 않고 밀어붇여 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빈주먹과 고집스런 실행력 하나밖에 없던 상황에서 먼훗날 오랜 세월에 걸쳐 어떤 기적으로 나타날지는 아무도 상상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인간적 머리로만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내 평생을 인도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기적이었다.


9월 초에 한집사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 소선생, 지금 아파트 부동산에 내놔. 계약이 되는 대로 나에게 전화해."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비록 작은 집이라 해도 모처럼 안정된 결혼 생활을 하고있는 소중한 아파트인데 내놓으라 하니 긴장이 되었다. 한집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니 어쩔수 없이 내놓았다. 며칠후에 작자가 있다하여 부동산에 나갔더니 320만원에 계약을 한다 하였다. 나는 내심 정말 놀랐다. 산지 5개월만에 80만원이 320만원이 된것이다. 나는 계약금 30만원을 받고 나와 즉시 한집사님에게 전화를 드렸다. 한집사님은 " 내일 낮에 소선생 시간좀 안되나? 어떻게든 시간 좀 내서 장안평에 새로 지은 주공 아파트로 가. 거기 10평 짜리 아파트가 있는데 무조건 내일 계약을 해." 하시는 것이었다.


이튿날 오전에 영업을 나와 일단 동대문구 장안동의 주공 아파트로 갔다. 이곳은 전에 쓰레기를 매립했던 벌판인데 그곳을 5층짜리 소형 평수 주공아파트 단지로 건설한 것이었다. 쓰레기 냄새에 파리가 몰려든다하여 신문에서 '파리아파트' 라고 비꼰적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 입주도 다 안된 새 아파트였다. 나는 한집사님의 지시에 따라 10평 짜리를 무조건 360만원에 계약 하였다. 그런데 층이 5층이라 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부동산에 간곡히 부탁하여 그집의 계약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가장 좋은 위치인 23동 302호를 400만원에 다시 계약 하였다.

1977년 암사 주공아파트에서 4개월 28일을 살고 같은해 10월 5일 장안아파트로 이사하였다. 이 모든 일들은 한집사님이 계시지 않았으면 알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신앙으로 말하면 한집사님은 이 세상에서 나의 생활을 풍성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이 준비하신 축복의 사자였다.


신혼 초기에는 언제나 10월이 이사하는 달처럼 되었다. 한집사님에게서 두번을 배우고 나니 점차 부동산의 세계에 대해서 눈이 떠지는것 같았다. 직장에서 일은 언제나 열심히 해야 되겠지만 직장에서 월급 받은 돈을 저축하는것 만으로 돈을 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물론 월급에서 저축하여 종자돈을 만드는 성실함은 말할 팔요도 없는 기본이겠지만 더 중요한것은 그 종자돈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부동산에 투자하여 관리하여 불리느냐가 말할 수 없이 중요한 안목과 역량이었다. 부동산을 깨달은 순간에 나는 이제 혼자서 뛰기 시작했다. 시간이 나는 대로 집앞 상가에 몇군데 부동산과 안면을 트고 여러가지 변화하는 정보도 배우고 수시로 상담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퇴근하여 신설동에서 53번이나 54번 버스를 타면 청량리를 거처 장안아파트 앞에서 내렸다. 집에 들어가는 길가에는 각종 손수레 장사하시는 분들이 카바이트 불을 켜고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집에 들어가면서 과일도 사고 호떡이나 붕어빵을 살때도 있었다. 지금은 그런 장사 하시는 분들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으니 참 세태도 많이 변한 것이다.


1978년 4월 5일 식목일은 국정 공휴일이었다. 아내가 만삭이 되어 오늘 내일 하니 어머니가 올라와 계셨다. 그런데 나는 마침 그날 휴일이라 이만원 목사님이 운영하시는 군자동의 삼원 미술원에서 '에바다노래선교단'의 웍샵이 있어 아침에 집을 나갔다. 저녁에야 집에 들어오니 어머니가 질색을 하시며 "아니 어디를 갔다가 이제 오냐. 아침에 너 나간 다음에 조금있다가 에미가 양수가 터져서 바로 병원으로 갔는데" 하고 야단치시는 것이었다. 나는 헐레벌떡 아내가 다니던 보문동의 박진하 산부인과로 달려갔다. 아내는 아직 진통 중이었다. 이제 오냐고 원망하니 너무나 미안했다. 하필 내가 나가자 마자 일이 그렇게 됐던 것이다.


밤새 진통을 하는 아내곁에서 지키다 졸다가 했는데 아무래도 처 외할머니를 빨리 모셔와야 할 것 같아서 아침 일찍 일어나 할머니 댁으로 갔다. 신림동 까지 갔다가 할머니를 모시고 오니 아침 열시쯤이나 되었다.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니 간호사가 반색을 하며 " 아이구 이제 오세요. 아침 7시 27분에 출산 하셨어요. 왕자님 입니다. 축하 합니다."하였다. 할머니랑 들어가니 벌써 아기를 씻겨서 누여 놓았다. 아내는 기진해 있었으니 나는 "아이구 고생했어 고생했어."하는 말만 했다. 첫 아기라 나는 무엇 보다도 건강한 아기를 낳기만 바랬던 것이다. 아들이고 딸이고는 그다지 상관하지 않았지만 막상 아들이라 하니 정말 터질 듯이 기분이 더 좋았다. 대략 할머니에게 아내를 맡기고 회사에 출근하여 첫아들을 낳았다고 보고하니 모두들 축하한다며 같이 기뻐해 주었다.


장안 아파트에 와서도 주일이면 교회는 학생 시절부터 다니던 자양교회를 계속 나갔다. 그때는 내가 성가대도 지휘하고 있었다. 장안 아파트에서는 자양동까지 가는 버스가 없었으므로 버스를 타려면 중랑천 뚝방으로 올라가 천변으로 내려가서 줄배로 중랑천을 건너 동이로에서 자양동 가는 버스를 타야 했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아직 얼마나 어려웠던 시절인지 중랑천 양쪽에 말뚝을 박아 줄을 매어놓고 손님이 하나든 둘이든 쪽배에 타면 20원씩을 받고 그 밧줄을 잡아당겨 쪽배를 이쪽 저쪽으로 건네 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 밧줄을 당겨 쪽배를 건네주는 사람은 어른이 아니라 열 서너살 정도의 아이였다. 학교도 못가고 때절은 얼굴로 그 일을 하는데 홀어머니와 함께 그 뚝방에 굴을 파고 그 속에 가마니를 깔고 거기서 살았다. 겨울이면 얼어붙는 추위에 떨었을 것이다. 흘낏 들여다 보면 때절은 이불 쪼가리들이 굴속에 보이곤 했다. 그들을 볼때마다 너무나 안돼 보였지만 어찌 할 수도 없었다. 사회가 아직은 그런 어려운 세상이었던 것이다.


아들은 잘 자랐지만 애기때 병치레가 많아서 동네 지나가는 감기란 감기는 다 붙들고는 했다. 태어난지 3개월 정도 되었을때 8월초 여름휴가가 됐는데 아이가 갓난이니 어디 멀리는 못가고 아내와 아기를 데리고 팔당댐 아래의 강건너편에 텐트를 치고 지내려고 놀러 갔다. 하루밤을 자는데 아이가 어떻게나 밤새 우는지 더 견디기가 어려웠다. 옆의 텐트에 계기던 사십대 분들도 "애기가 어디 아픈가 봐요. 어서 집으로 가보는게 나을것 같은데." 하고 걱정을 해주셨다. 별수 없이 짐을 챙겨 다시 집으로 돌아오니 그때는 아이가 다행히 괜찮아졌다. 10월초에 아이가 설사를 하는데 약을 먹여도 잘 낫지가 않았다. 이틑날 아침 출근길에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나와 성 바오로 병원 소아과에 진료를 보게했다. 출근하여 한참 바쁘게 업무를 보고 있는데 아내가 울면서 전화를 했다. "선생님이 오늘이 고비래요. 맘 단단히 먹으래요. 어떡해."하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소리야. 애기 설사좀 하는데 오늘이 고비라니." 하고 화가가서 즉시 바오로 병원으로 쫒아갔다. 아내는 여기서 입원을 시켜야 할지 어쩔지 몰라 당황하며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을 보니 힘없이 안겨 있었다. 설사를 하니 탈수가 된것 같았다. 나는 기분이 나뻐서 "가자 여긴 않되겠어."하고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나왔다. 내가 잘 아는 제기동의 이순흥 소아과 개인 의원으로 갔다. 원장님을 뵙고 아들을 보이니 원장님이 "주사좀 맞히고 약 먹이면 괜찮아 질거야. 사흘 후에도 덜 나으면 다시 데리고 와봐요" 하시는 것이었다. 집으로 데리고 와서 안정시키고 약을 먹이니 점점 좋아졌다. 사흘 후 되니 완전히 나았다. 나는 이순흥 소아과에 들러 애기 괜찮아 졌다고 감사 인사를 드렸다. 그후 부터는 바오로 병원에는 일체 가지 않았다. 아니, 애기 설사해서 아픈것을 가지고 환자가족 안심시키기는 커녕 오늘이 고비니 맘 단단히 드시라고? 무슨 헛소리를 했던 것인가.


영업은 언제나 힘들지만 그런대로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다. 그래도 순위가 중위이상으로 올라가기는 힘들었다. 과내에서는 내 목표가 달성 안되면 과 전체 목표가 달성 않되는 상황이니 매월 말일에 마감할 때는 과 전체 목표를 달성 하기 위하여 다른 선배들이 조금씩 더 끊어야 하는 민폐를 끼치고 있었다. 그러니 과장이나 주임뿐 아니라 선배들에게도 언제나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그러던중 1978년 1월 경기도 북부를 담당하던 서울대 출신의 29기 전기 박해웅 동기가 영업이 너무 힘들어 매일 쌍코피를 쏟다가 도저히 견디지를 못하고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과에서는 그 지역을 중대 출신의 29기 후기인 신기동 동기에게 맡겼다.


그런데 이 동기도 견디기가 어려웠던지 몇달 가지않아 7월달에 제약업계가 아닌 타 업계로 간다고 사직서를 제출 하였다. 어느날 아침 오창수 주임이 나를 불러 커피 한잔 하자고 하였다. 나는 뭔가 심상찮은 낌새를 느끼며 2층 동화다방으로 따라 내려가니 "당신이 영업이 계속 저조하니 이번에 경기 북부로 한번 들어가 봐. 만일 그 선택이 어렵다면 회사 생활은 어려워질것 같은데" 하고 은근한 협박처럼 말을 하였다. 경기북부는 벌써 몇사람째 그만두고 나가는 사지인데 나를 거기로 들어 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일 못가겠다고 하면 짤릴 기세 같았다. 나는 다른 방법이 없었으므로 "알았습니다. 들어가 보죠. 한번 도전해 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내 지역 성동구 일부는 임시로 다른 선배에게 인계를 해주고 바로 신기동에게 경기 북부를 인수 받기 시작하였다.  


경기 북부 지역이라함은 의정부 덕정 동두천 전곡 라인과, 포천 운천 문혜리 신수리 와수리 철원 라인, 그리고 교문리 덕소 청평 가평 현리 라인이었다. 지역이 넓고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직행 버스를 타도 철원까지 비포장 도로를 포함하여 털털 거리고 달리면 3시간 가까운 거리였다. 과연 전임자들이 그 넓은 지역을 관리 하기에 지쳐 코피를 쏟고 그만둘만 했다.


내가 그 넓은 지역을 담당하여 새로운 도전 정신으로 패기있게 뛰기 시작하며 영업 실적은 전임자들 과는 다르게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나는 대한민국 국방부가 보증하는 육군 장교 출신이 아닌가 하는 자존심으로 뛰니 체력은 자신있었다. 피곤하긴 했지만 그렇게 못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7월 영업을 마감하고 8월 1일이 되었다. 토요일이었다. 그때도 아직은 내가 가장 밑 후배였다. 제약회사는 말일날 죽일듯 난리를 치며 영업이 마감되고 나면 1일부터는 갑자기 끈이 풀어진듯 모든 분위기가 며칠은 헐렁하게 쉬는 습성이었다. 출근하여 대략 정리를 하고 나니 과장이 오창수 주임에게 조용히 지시하였다. " 다들 같이 나가서 사우나들 하고 거기로 먼저들 가있어. 난 지점장님하고 마감 미팅 한후에 바로 갈테니까." 하는 것이었다. 7월에 마감이 완전히 잘 되었으므로 분위기가 회기애애 아주 좋았다.


나는 쭐래 쭐래 선배들을 따라가 사우나를 개운하게 마치고 택시를 타고 가서 내리니 정릉 청수장 골짜기 였다. 전에도 와본적이 있는건지 선배들이 능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자리라고 해야 식당안이 아니라 골짜기 시원한 곳을 평평하게 골라놓고 대발과 자리를 깔고 술상이 놓여 있는 곳이었다. 인원은 8명인데 소주를 한박스 24병을 갖다 쌓아 놓았다. 닭도리탕과 백숙등 안주를 푸짐하게 차리고 있으니 과장도 도착하여 회식이 시작 되었다. 물론 파트너 아가씨들이 같이 돌려 앉아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나는 그런 회식 자리는 난생처음 보았으며 그후에도 본적이 없었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으니 이리빼고 저리빼고 요령껏 마시는 척하며 안마시고 있었다. 점차 술이 들어가기 시작하며 각종 상상도 못할 방법으로 술을 마시는데 이건 완전히 몬도가네 난장 파티나 마찬가지였다. 점심전 부터 시작한 회식이 오후 3시쯤 되자 갖다놓은 소주 한 박스가 다 없어지고 한박스가 다시 들어왔다. 과장 이하 모두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맨정신으로 그들을 보니 미치광이도 이런 미치광이들이 없었다. 아가씨들도 거기에 맞장구를 치는데 나중에는 전원이 일어나 냄비나 술주전자를 꽹과리처럼 막대기로 두들겨 대면서 함성을 지르고 아가씨들을 눕혀놓은 주변을 빙빙 돌기 시작하였다. 마치 식인종 토인들의 광란 파티 같았다.


지성인은 그만두고 도저히 인간이라고 할수도 없이 난잡한 방법으로 주술을 하듯이 도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목표만 달성되면 영업 비용이 쓰고 남도록 넘쳐나니 과장이 돈은 얼마든지 가지고 있었다. 아가씨들이 특별한 서비스를 할때마다 과장이 새로 바꿔온 빠들 빠들한 만원짜리 신권을 아가씨들한테 찔러주니 아가씨들도 신이 나서 돈을 벌려고 별 짓을 다 하는 것이었다. 나는 맨정신이니 그들을 보면서 구토가 나올려고 하였다. 영업이란 직업이 아무리 치열한 경쟁과 힘든 세계라고 하지만 이렇게 까지 하는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6시쯤 되어 그곳의 자리를 대략 마감하고 택시를 나눠타고 2차는 동대문 창신동 입구 근처 오른쪽에 있는 룸싸롱 신성홀로 이동하였다.


신성홀에 가서도 또 파트너 아가씨들을 새로 앉혀놓고 이번에는 맥주를 마시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밴드를 불러서 노래를 부르는데 너무들 취하여 제정신들이 아니니 게걸대기만하지 아무도 노래를 먼저 시작하지를 않았다. 나는 맨정신일 뿐더러 노래를 좋아하니 조금 기다리다가 먼저 노래를 하기로 생각하고 밴드에게 부탁하여 한곡을 뽑았다. 그런데 노래가 끝나고 나자 장석붕 주임이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야 소용순이. 너 임마 건방지게 먼저 노래를 불러? 너 선배들도 안보여?" 하고 취한 눈을 부릅뜨는것 아닌가. 나는 선배들에게 언제나 겸손하게 대했지만 그때만은 참가가 어려웠다. "아무도 노래를 안부르니 쫄병이 먼저 한곡 한겁니다. 그게 그렇게 잘못한건가요?"하면서 반항하니 그때부터 분위기가 험악해 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장선배에 대해서 말은 않했지만 평소에 내심 그다지 좋지 않은 감정도 있었는데 장선배가 워낙 튀는 성격이니 다른 사람들도 약간은 비슷한 생각들이 있었다. 분위기가 싸늘해 지는데 장선배 바로 밑인 이승열 선배가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어이 소용순씨 당신 왜 가만히 있어? 장선배 받아버려. 썅 지가 뭔데 노래 먼저 한거 가지고 다 갈구고 그래." 하면서 평소에 장선배에 대한 감정까지 섞어 나를 부추기는 것이었다. 나는 룸에 들어가서 그때부터 말도 없이 술을 들이키기 시작하였다. 분위기가 않좋았지만 모두들 혼자 술 마시는 나를 모른척하고 난잡하게 노래를 부르고 술들을 들이켜대고 있었다. 나는 술이 약한편이니 얼마안가 인사불성이 되어 쓰러졌다.


그러다 한참 후에 일어나 다시 술을 들이키며 장선배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 진짜 오늘 기분 더럽습니다. 무슨 노래 가지고 다 사람을 잡습니까?" 그런 행동은 그 시절 조직 문화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부터 술판이 어떻게 끝났는지 나는 양복 상의도 팽개치고 구두도 벗어던지고 선배들에게 업혀 같이 택시를 타고 장안아파트 집으로 왔다. 혼자 걷지도 못하고 쓰러지니 잠실 사는 장선배와 이선배가 부축해 같이 택시를 타고 가는 길에 조금 돌아 집에까지 데려다 준 것이다. 아내가 문을 열고 그런 모습을 보더니 질겁을 했다. 상의는 그래도 누군가가 가져다가 방에 던져 줬는데 구두는 한짝만 신고 있었다. 장선배가 계단을 돌아 내려가면서 공갈치며 소리쳤다 "소용순이 너 임마 월요일날 보자구" 참, 평생에 두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몬도가네의 하루였다.


1978년 9월 초에 1년전에 400만원에 샀던 장안아파트 23동 302호를 가까운 복덕방과 수차례 상담하여 전세로 깔고 앉아 600만원에 팔고 그 계약금과 중도금으로 1평 많은 11평 아파트 입주권을 700만원에 샀다. 현금 여유 자금을 쥐고 있지 않은 사람은 그런 방법 밖에는 없었다. 입주시에는 전세를 빼서 추가 입주비 잔액을 내고 입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입주권은 대개 철거민들에게 보상한 것이지만 그분들은 추가 부담금을 내고 실제로 입주를 할 만한 여력이 안되는 분들이 많았다. 그러니 부동산 시장에는 입주권 매매가 성행 하였는데 그것을 소위 '물딱지'라 하였다. 문제는 그 입주권이 원래 철거민의 이름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상당한 위험성이 있었다.


입주 전에 원매인의 포기각서와 인감증명을 주택공사에 제출하지 못하면 입주할 수가 없고 모든 계약금은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확실치가 않고 위험한 모험이기 때문에 그런 '물딱지'라는 별칭이 붙은것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나는 위험도 무릅쓰고 그 계획을 실행 하였다. 한평이라도 더 넓은 데로 가고자 하는 열망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이다. 10월에 입주를 앞두고 8월 말까지 원매자의 포기 각서와 인감증명을 제출하라는 공고가 떴다. 다행히 원매자는 전농동에 살고 있는것으로 찾을 수가 있었다. 원매자를 만나 포기각서와 인감중명을 부탁한다고 사정을 하니 원매자는 싸늘하게 돌아서며 못해주겠다는 것이었다.


팔때는 정상적인 댓가를 받고 팔았겠지만 입주시점에서 그냥은 못해주겠다고 심보가 바뀐것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못살고 댁에는 그래도 나아서 그런데 들어가니 생각해서 100만원을 더 내라는 것이었다. 이건 엄청난 요구였다. 나는 도저히 말이 통하지를 않아서 그냥 물러 나왔다. 그나마 전재산을 투자한 것인데 다 날라갈것같아 불안해서 잠도 오지 않았다. 아내와 같이 걱정과 고민만 하지 대책이 없었다. 며칠후 아내가 갓난이를 없고 다시 찾아가 눈물로 사정하였다. 그러나 어떤 말에도 씨가 먹히지 않았다. 고약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도저히 요구대로 100만원을 줄 여유는 없었다. 너무나 해결책이 보이지 않으니 궁하면 통한다고 입주권을 샀던 부동산을 찾아가 상의했다. 그런데 부동산은 의외로 간단하게 " 받아 드릴께요. 비용은 20만원으로 생각하세요." 하는 것이었다. 나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하고 기다리니 이틀만에 부동산에서 받아 놨다고 전화가 왔다. 나는 20만원을 들고 가 찾아다 주택공사에 제출 하였다. 사람 사는데 다른 재주도 여러가지였다. 나는 못하는것을 부동산은 간단히 해결했던 것이다.


그런 어려움을 무난히 극복하고 1978년10월 25일에 11평으로 이사하였다. 참, 부동산의 세상은 알면 알수록 기묘하고 상상하기 어려운 세상이었지만 자주 집앞 부동산에 들려 배움으로서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었다. 제약회사는 아침에 출근하면 1일 영업 출장비를 매일 받는다. 당시 동아제약은 매일 2500원이었다. 교통비 점심값 구두닦이 또는 거래처에 선물 등을 사도록 하는 비용이었는데 통상 1500원 정도면 하루 영업은 충분했다. 나머지는 많진 않지만 모을 수가 있었고 급여는 완전히 아내에게 갖다 주니 내가 내근직처럼 급여에서 손벌려 다시 받아쓴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때는 25일 월급날이 되면 경리과에서 월급을 동전까지 계산하여 직원별로 봉투에 넣어 봉하여 바구니에 담아가지고 왔다. 나는 그 봉투를 뜯지도 않고 동전까지 그대로 아내에게 갖다주었다. 지독히 아껴서 생활하였지만 월급날만은 아내를 저녁에 신설동 사무실 근처로 나오라해서 일식집에가서 초밥을 먹는 것이 유일한 외식이라면 외식이었다. 그때는 그것만 해도 큰것이었다. 아내는 교직에 있다가 퇴직하여 아이를 낳고 집에서 살림만 하려니 많이 답답해 했다.


해가 바뀌니 1979년이 되었다. 몇개월 되지 않는 기간에 동지점 병원과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석태 과장이 천호동에 시장약국이라고 개업하여 퇴직하시고 광주지점에 근무하시던 조선대 약대 출신 정해국 과장님이 신임 과장으로 진급하여 부임해 오셨다. 장석붕 주임은 새로 창설된 종합병원과로 이동하고 많은 선배들이 이민가거나 개업한다고 회사를 떠났다. 후배들이 많이 들어오고 갑자기 내가 과에 주임 없이 최고참 사원이 되었다. 그 동안에 경기 북부의 내 담당 지역의 영업은 더욱 살아나 모두가 포기하고 물러났던 전통을 완전히 뒤집어 놓고 있었다. 초년병 시절에 그리도 하위에서 헤매던 순위가 3년만에 상위 5퍼센트 이내로 뛰어 올랐다. 내가 특히 잘하던 품목은 대부분 항생제 계열이었다. 내 지역이 군 주둔 지역이 많으니 지역의 특성을 최대한 살린 결과였다.


그때는 수술후 감염예방이나 통상적인 지역 의원 정도에서 볼수 있는 감염증이라면 기본으로 주사하는 것이 바이알당 400원 정도하는 가나마이신이었다. 동아제약은 이 아미노글라이코싸이드 계열의 항생제를 차별화 하여 제품 라인이 잘 구성되어 있었다. 가나마이신 다음의 조금 비싼것은 600원의 가넨도마이신, 그 다음은 1400원의 리보스타마이신 제제인 비스타마이신이며 일반 항생제에 잘 듣지 않는 독한 슈도모나스 아루기노사(Pseudomonas aeruginosa, 녹농균)까지 확실한 살균 작용을 나타내는 2000원의 파니마이신까지의 라인이었다. 이 제품라인은 일본의 메이지세이카(명치제과) 의약품 사업부 제품으로 동아제약은 한국내에서의 판매 에이젼트였다. 그뿐만 아니라 새로 출시한 일본 후지사와제약회사 제품인 세파졸린 제제 세파메진은 1g에 대박 4000원이었다. 당시 최고가 고급 항생제였다. 생활 수준이 높은 서울 거래처에서도 판매가 쉽지 않은 제품이었다. 나는 이 제품도 상당한 거래처에 사입하였다.


제약업계에서는 닥터에게 제품의 학술적 설명을 하는것을 디테일링이라 하는데 나는 영업의 서비스 매너로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아 제품을 쓰게하는 방식의 영업 형태에는 그다지 잘 하지 못하고 자신도 없었다. 그러나 제품의 특성과 차별 포인트를 철저히 공부하여 학술 디테일 하는면에서는 자신이 있었다. 신입사원 초기부터 모든 문헌을 완전히 공부하여 제품의 작용 메카니즘과 그에 따른 특 장점을 철저히 연구한후 디테일할 내용을 8절지에 스토리 텔링으로 작성하고 그것을 완전히 암기하였다. 그러니 언제 어느때나 누구 앞에서나 확신에 찬 어조로 디테일링을 할 수가 있었다. 영업 서비스는 약점이지만 학술력은 나의 강점이었다.


그 학술력의 강점과 마케팅 포인트를 결합하여 그 시골 경기 북부 지역에 영업 평가 포인트 시스템에 가장 점수가 많은 비싼 신제품 비스타마이신 파니마이신 세파메진을 꽤 많이 깔았던 것이다. 400원짜리 항생제 쓰는 것이 전 병의원의 추세인데 2000원짜리 파니마이신 4000원짜리 세파메진을 일장 디테일하면 대부분의 원장님들은 "여보 동아제약! 당신 누구 병원 망하게 할일 있어? 그런 약 쓰면 우리 병원 비싸다고 소문나서 망한다니까" 하고 짜증부터 내는 것이었다. "원장님 그야 제가 잘 알죠. 그거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이런 비싼 약을 아무에게나 쓸 수는 없죠. 하지만 원장님 환자 보시다 보면 통상적인 항생제에 듣지 않아서 고민되시는 환자도 있잖아요? 오래 낫지 않으면 환자는 점점 불만 쌓여 가죠. 그럼 원장님도 신경 쓰이시고 귀찮으시잖아요. 그런 환자한테 일단 제품의 효과와 가격을 말씀 하셔서 이해 하는 환자에게만 한번 써 보시라는 거죠. 뭐 그런 케이스가 많지는 않겠지만 일단 시험을 한번 해 보세요." 하고 진심으로 말씀 드리며 "일단 20바이알 보내 드려 볼께요" 하면 "안돼 안돼 그럼 5바이알 만 보내봐" 하신다.


"5바이알은 보내기도 어려워요. 알았어요. 10바이알 보낼께요." 하는 식으로 약물을 처음으로 경험 하게 했던 것이다. 원장님들이 사실 자존심때문에 말씀을 않하셔서 그렇지 잘 낫지 않아서 어려운 환자 경험은 누구나 갖고 있기 마련 이었다. 일단 경험을 하고 나면 어느 원장님이든지 거의 소량이라도 비치해 놓으려고 재주문이 들어왔다. 다음에 가서 " 원장님 어떠셨어요? 혹시 파니마이신 써보셨어요? 세파메진 써보셨어요?" 하고 물으면 대부분은 "비싸서 그렇지 약효는 괜찬네" 하시는 것이었다. "그러게 어려운 환자만 쓰시라는 거죠. 아니면 돈 좀 있는데 빨리 낫기 바라는 환자도 괜찮아요" 이런 식으로 영업하여 고가 항생제를 내가 그 경기 북부 시골에서 전국 상위권으로 팔았던 것이다.


성공적인 치료 사례를 경험하신 원장님에게는 'Case Report(증례 보고서)' 카드를 작성하게 했다. 그 레포트 작성을 하는 과정에 처방의로서 약물에 대한 소신이 더 강해저서 계속 처방 재주문 효과를 나타내며, 그 증례 보고서를 모아 증례집으로 만들면 아직 쓰지 않으시는 원장님들에게 훌륭한 프로모션 자료가 되었던 것이다. 그 증례집을 써주신 원장님에게는 또한 성의로 선물도 갖다 드리니 관계가 더욱 돈독해 졌다. 교문리에 계시는 H의원 원장님은 인품이 훌륭하시고 환자가 엄청 많으신데 고가 항생제를 아주 적합한 환자에게 적시에  선택하여 치료 효과를 많이 보고 계셨다. 원장님과 나중에는 형제간처럼 가깝게 지냈는데 성공 증례는 많으시지만 증례카드 쓸 시간이 없으셨다. 어느 추운 겨울밤 병원문 다 닫은후 같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엎드려 원장님은 차트만 가져 오서서 말씀 하시고 내가 차트를 보며 증례 보고서를 작성한 적도 많았다. 그때의 그런 활동과 경험들을 누가 알았으랴. 훗날 내가 다국적 기업에서 항생제 전문 Product Manager(제품 마케팅 경영자)가 되었을때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그때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