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어나 저 강을 건너라

돈도 없이 집을 사고 결혼의 꿈을 이루다.

Billy Soh 雲 響 2020. 3. 7. 23:53

전에 이야기 한적이 있지만 나는 학생시절이었던 1972, 3년 무렵에 결혼 날짜를 잡아 놓은 적이 있었다. R에게 여러번 얘기했었지만 나로서는 많은 생각 끝에 했던 얘기였었다. 앞으로도 수년후의 일을 어떻게 그리 생각 할 수 있었을까. 1976년 6월 30일 전역 - 7월에 바로 취직 - 1년간 돈벌어서 - 1977년 5월 첫 주말 토요일 정오 12시에 결혼. 그것이 내가 잡아놓은 일정이었다. 모든 일정이 대략 그대로 맞아서 진행 되었고 어느새 세월이 흘러 1977년 3월이 되었다. 1년간 벌어 돈을 모아 결혼 하겠다는 계획이었지만 사실 결혼을 할 수있는 준비는 거의 된것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결혼 하려면 최소한 집 얻을 돈 몇백만원 정도는 남자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 정도 돈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R도 마찬가지 였다. J공고 교사로서 3년째 되었지만 아직 결혼 자금이 되기에는 많이 부족했던 것이다. 처가에서도 조금 미뤘다가 형편이 좀 좋아지면 그때 하라고 적극 만류했다. 우리집에서는 도와 줄 수 있는 아무런 형편이 되지 않으니 아예 이래라 저래라 말할 수도 없어서 어머니와 가족들은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나도 여러가지 생각이 많았다. 밀어부칠 용기도 꺽이고 점차 자신감이 없어졌다. 몇날 며칠인가를 잠을 설치며 고민하였다. 어떻게라도 결혼을 진행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미루고 형편이 나아지면 해야할 것인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였다. 수없는 생각후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무엇보다도 인생의 대사인 결혼을 앞두고 비록 아무런 실제적 준비도 없이 학생 시절에 잡은 결심이었지만 나는 스스로 잡았던 인생의 새출발인 결혼 계획을 미룰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 하였다. 또한 형편이 나아지면 한다고 그러지만 1년을 미룬다고 형편이 얼마나 나아 진다는 보장도 없었다. 나는 밀어부치기로 결심하고 R에게 계획대로 가야한다고 설득 하였다.


R도 무리라 생각했지만 내가 워낙 막무가내로 밀어 부치니 엉거주춤 따라 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모든것을 오직 둘이서 해결해야 했다. R은 나보다 오래 봉급을 받고 있었으니 그래도 형편이 좀 나았던지 혼수감이라고 처음으로 냉장고를 사서 외할머니 댁에 맡겨 놓았다. 물론 요즘같은 투도어 대형 냉장고가 아닌 자그마한 중형 냉장고였다(그때는 투도어 냉장고란 있지도 않았다). 당시 아직 냉장고 있는 집도 많지 않을때였다. 처음으로 냉장고를 사서 할머니 댁에 설치를 하고 냉동실에 젤로를 얼려서 먹는데 너무나 신기했다. 집에서 젤로를 만들다니. 할머니 댁은 신림동에 있었는데 방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런데 주말에 R이 올라오면 나와 어디 딴데 가지 말라고 할머니가 여기와서 얘기하고 자라고 하셨다. 나는 염치도 좋게 그저 '할머니 고맙습니다' 하고  R이 오면 돌아다니디가 들어와 할머니 계신 옆에서 자곤 하였다. 할머니 댁에 가려고 그 골목에 들어서면 커다란 보라색 라일락꽃 나무 있는 집이 골목 어귀에 있었다. 4월에 라일락 꽃이 피는 계절에 그 골목에 들어서면 진한 라일락 향기가 그 근방에 온통 가득하였다. 그 향기에 취해 가슴이 설레던 기억이 엇그제 같다. 


결혼 전에 R의 집에서는 어머님과 동생들까지는 우리가 결혼 할 것을 알고 있었으나 아버님께는 아직 허락도 받지 못한 상태 였다. 장인 어른은 안동김씨 익원공파의 후손으로 가문에 대한 자긍심이 엄청 나셨다. 물론 조선시대 수백년에 걸처서 나라를 주물러온 안동김씨이니 그런 생각 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셨겠지만 보통 분들보다도 훨신 적극적으로 종친회장도 역임하시며 안동김씨에 대한 자존감이 강하셨던 분이셨다. 1977년 5월 첫째 토요일인 7일 12시에 결혼 날짜를 잡아놓고 4월 중순에야 상도동의 다방에서 장인 어른을 처음 뵈었는데 "자네 집안은 어떤 집안인가?" 하고 물어 보시는 것이었다. 나는 "지방의 양반 지주 집안입니다." 하고 대략 집안의 내력을 말씀 드렸더니 "나는 이 결혼을 아직 허락하지 않았네." 하시는 것이었다. 그 후에 장모님과 가족들이 설득하여 아버님이 허락은 하셨지만 그날의 말씀을 생각하면 간담이 서늘하였다.


나는 회사를 다니며 주말에는 R을 만나 이것 저것 결혼 준비를 하고  R이 자라난 상도동 송학대교회를 예식장으로 결정한 후 방관덕 담임 목사님을 찾아뵙고 장소 허락과 주례까지 부탁 드렸다. 방목사님은 R을 어렸을때부터 자라는걸 보아오셨기 때문에 흔쾌히 주례를 해 주시겠다고 허락 하셨다. 식장과 주례는 해결이 됐지만 뭐니 뭐니해도 가장 큰 문제는 남자가 해결해야할 신혼집 문제였다. 나는 3월말에 신설동 동화빌딩 사무실 근처에서 방한칸에 부억딸린 전세방을 알아 보았더니 120만원이었다. 그때 내가 가진 돈은 취직후 저축한 것까지 다 합쳐 70만원 밖에 안되니 방한칸 얻기에도 모자랐다. 어디 변두리로 나가서 얻어야 되나 어째야 하나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마음이 답답하기만 하였다. 하도 고민이 되니 갑자기 잠실에 입주 알바를 했던 한집사님이 생각났다. 부동산을 하고 계시니 혹시 어디에 방을 얻어아 할지 가르쳐 주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4월 초에 "집사님, 저 결혼을 하려고 하는데요 여기 신설동에서 부억딸린 방하나를 알아보니 120만원이라네요. 돈이 부족하니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디 변두리에 좀 얻을데가 있을까요?" 하고 전화를 드리니 "아 그래? 그럼 소선생 돈이 얼마나 있어?" 하고 물어보시는 것이었다. "현재 70만원 있습니다." 그랬더니 잠시후 한집사님이 " 소선생 오늘 몇시에 퇴근하나?" 하고 물어 보시는 것이었다. 나는 " 저녁 6시경이면 나올 수 있읍니다." 했더니 "그래 그럼 잘됐네. 퇴근하면 즉시 암사동으로 가. 거기 가면 주공아파트가 있어. 그 앞에서 내려서 아무 복덕방이나 들어가면 매물로 나와 있는 9평자리 아파트가 있을거야. 그 아파트를 무조건 오늘 내로 계약해. 계약금을 10만원 정도 준비해서 가라구. 가서 계약 하고 나한테 다시 전화해."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 9평짜리 아파트가 얼마인지도 모르고 철부지가 돼서 아무 생각도 없이 무조건 한집사님이 얘기하시는 대로 계약금 10만원을 준비해서 퇴근하자마자 암사동으로 갔다.


부동산에 들어가 물으니 아닌게 아니라 9평짜리 아파트가 84만원에 매물로 나와 있었다. 무조건 계약을 해라 하셨으니 계약은 해야 하겠는데 현재 가진돈 70만원에 한달 월급을 거의 그대로 더한다해도 84만원은 빠듯하였다. 나는 계약을 하겠다 해놓고 일단 나오신 주인과 복덕방에게 사정사정 하였다. "결혼 할려고 하는데 돈이 부족해요. 4만원을 깎고 80만원에 꼭 좀 해주세요." 하고 말하니 지금 가격이 강세라며 여간해서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계약서를 앞에 놓고 들어 줄때까지 계속 같은 말로 졸랐다. 그 간절한 말에 질렸는지 드디어 주인이 그렇게 하자고 동의를 하였다.


나는 일단 계약서를 쓴후 계약금을 지불하고 영수증을 받아서 복덕방을 나와 로 공중 전화에 들어가 한집사님에게 "지금 84만원인데 4만원 깎아서 80만원에 겨우 계약을 했습니다." 하고 말씀 드렸다. "아이구 잘했네. 이젠 됐어. 거기 작아도 방이 두개니까 신혼 살림 시작하기는 괜찮을 거야. 그리고 전망도 있어."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전망이 있는지 어떤지 아무것도 모르니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아무튼 결혼하여 들어갈 곳이 생겼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뿌듯 하였다. 세상에 아파트가 신설동의 방한칸 전세보다도 싸니 참 이상하게도 생각 되었다. R에게도 공중전화로 알리니 "휴우 다행이네 잘했어요" 하며 같이 기뻐해 주었다.


4월 말에 아파트 잔금까지 다 치루고 나니 9평짜리 꼬막만한 아파트를 남들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마음이 뿌듯했다. 전세방 하나도 어떻게 얻어야 할지 막막했었는데 내 집이라니 아니 이게 꿈이야 생시야 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R이 그래도 혼수로 마련한 장이니 화장대등이 들어가는데 앞에 부동산에 물어보니 한달 동인에 20만원이 올라 집값이 100만원이 되어 있었다. 깜빡한는 동안에 회사에서 두달을 죽어라고 일해야 받는 두달치 봉급만큼이 올라 있으니 나는 깜짝 놀랐다. 정말 뭐 이런일도 다 있나 싶었다. 그리고  만일 한달 전에 바로 그날 한집사님 말씀대로 그 집을 사지 않았었더라면 어떡할뻔 했나하고 후유하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여하간 이제 결혼 할 기본적인 준비는 되었으니 맞추었던 양복을 찾고 노량진역앞 상도동 입구 삼거리 근처에 있는 독일제과에 삼단짜리 커다란 결혼 케익도 맞추어 두었다.


드디어 수년전부터 호언장담해 두었던 1977년 5월 7일 낮 12시가 가까워 왔다. 나는 예복을 입고 결혼예배를 올릴 송학대 교회에서 가슴이 부푼채로 손님들을 맞으며  신부화장을 마친 R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0분 전쯤 정확한 시간에 택시에 탄 R과 미용사들이 도착하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대기실로 걸어 들어가는 R이 평소 모습 같지가 않았다. 본래 신부 화장을 하면 평소 모습하고는 좀 달라 보인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었다. 그 눈부신 모습이 나의 신부라니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가슴이 두근 두근하는데 정각 12시가 되었다. 방관덕 목사님의 사회 말씀에 따라 나는 신랑 입장의 첫발을 내 디뎠다. 나는 나자신과 R에게 약속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한대로 정확히 그 날짜와 시간을 지켰던 것이다.


이어서 신부 입장이 있었다. 그런데 결혼 행진곡(원래의 곡명은 혼례의 합창)은 피아노만의 연주가 아니라 내가 활동하고 있던 '에바다노래선교단' 단원들의 합창에 의해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RICHARD WANGER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Lohengrin(로엔그린)' 중에서

'혼례의 합창'을 우리말로 번역한 가사로 불렀다. 나는 먼저 앞에 서서 "행복의 문 열리어라 축복을 받은이 들어온다" 로 시작하는 합창이 울려 퍼질 때 내 가슴은 감격으로 뛰었다.


방관덕 목사님의 주례 설교후 축송 프로그램은 역시 에바다노래선교단 지휘자인 이혁주 선생 님 작사 작곡의 '나 주께 기도 드리리'의 합창이었다. 모든 결혼 예배 순서가 끝나고 마지막 신랑 신부의 행진에는 대부분 다 그렇지만 멘델스존의 '결혼 행진곡'이었다. 역시 마지막까지로 합창으로 불러 주었다.



Mendelssohn(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 중에서 '결혼 행진곡'

        출처 http://cafe.daum.net/beautiful5060/N5hr/2783?q=%EB%B0%94%EA%B7%B8%EB%84%88%20%EA%B2%B0%ED%98%BC%ED%96%89%EC%A7%84%EA%B3%A1%20%ED%95%A9%EC%B0%BD


그때는 "국민의례준칙' 이라는 정부의 법령에 의해서 결혼식을 간소하게 하라고 하객에 대한 식사를 대접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형편이 넉넉한 집안의 경우는 몰래 몰래 대접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런 도움도 없이 둘이서 준비하여 올리는 결혼식이었으니 무슨 여유가 있어 몰래 몰래 대접을 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저 식을 올린후에 교회 식당에서 3단 결혼케익 축하 커팅을 하고 차한잔에 케익 한 조각씩을 대접 한것이 전부였다. 그때는 어리고 경황이 없어 이런것 저런것 신경도 못쓰고 지나갔지만 그때 손님을 대접하지 못했던 것은 평생 결코 잊을 수 없는 부끄러움이 되었다. 수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죄송하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폐백후에 하객분들이 거의 돌아 가시고 가족들과 가까운 친척들의 환송을 받으며 신혼 여행을 출발하였다. 그때는 공항이란 현재의 김포공항 국내선 1청사 위치에먄 있었다. 청사도 지금과 같은 청시가 아니라 2층의 구식 건물이었다. 어쨌던 공항으로 갈 차는 회사의 과장님에게 부탁하여 지점장님의 새차를 쓰도록 허락 받았다. 그래도 그 차를 쓸수 있었던게 어디 였던가. 아내의 친구인 박상희씨가 공항까지 동행하였다. 그 친구는 아내의 대학 내내 절친으로서 가녀린 수선화 같은 이미지의 친구였다. 지금은 호주에 살고 있다.


그때만 해도 좀 있는 집안의 인기 신혼 여행지는 제주도였다. 그러나 우리는 제주도 씩이나 가기는 어렵고 부산 해운대로 잡았다. 참 내가 얼마나 황망하고 철이 없었는지 비행기표는 김해 공항까지 그래도 어떻게 예약 해 놓았었지만 해운대에 호텔을 예약 해 놓지 않았다. 나는 호텔도 그냥 가기만 하면 들어 가는줄 알았다. 김해 공항에서 그래도 택시를 타고 해운대의 그럴듯한 호텔로 갔는데 예약하지 않았다니까 방이 없다는 것이었다. 정말 아내에게 미안하고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별수 없이 그 옆의 조금 작은 호텔로 겨우 체크인 받아서 첫날밤을 지내게 되었다. 비록 떡벌어진 호텔에 들어가지 못해서 기분이 좀 상하긴 했지만 아내도 곧 이해해 주었다. 그날의 감격은 지금도 어제처럼 생생하다. 대학 2학년 초에 만나 7년만에 수많은 우여 곡절끝에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지의 호텔에서 드디어 둘이 있게 되니 어찌 만감이 교차하고 감격에 겨웁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드디어 결혼 했구나 이제는 아내가 내 사람이 되었구나 하는 안도감으로 온 가슴이 가득하였다.


이틑날은 아침부터 해운대 바닷가를 산책하며 사진도 찍고 하다가 남포동에 갔는데 거기서 공교롭게도 동아제약 동기생으로서 같은날 결혼한 한형호씨 부부를 만났다. 우연히 같이 부산으로 허니문을 왔던 것이다. 반갑게 만나 거기서부터는 금정산성까지 동행 하였다. 두 커플이 서로 사진도 찍어 주고 즐거운 시간을 가진후 우리는 다시 시내로 와서 하루 밤을 더 묵으며 태종대 남포동 광복동 등도 구경하고 쉬었다. 2박 3일후 김해 공항에서 다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김포 공항에 도착하였다. 그때는 결혼 한다고 회사에서 휴가를 그다지 오래 주지도 않았다. 도착하여 택시로 처음 암사동의 우리집으로 들어가니 어머니가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다음날 오후에 봉천동 처가에 인사를 드리러 갔다. 장인 장모님께 "신혼 여행 잘 다녀 왔습니다."하고 절을 올렸다.


그런데 장인 어른께서 절을 받자 마자 직은방으로 가시더니 까만색의 두껍고 무거운 보첩을 한아름 가지고 나오셨다. 앞에다 턱하고 내려 놓으시더니 펼쳐 가면서 집안의 내력을 설명하기 시작하셨다. 안동김씨가 조선시대 이래 양반인 것은 알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벼슬을 했던 조상님들을 설명하시고 "우리집안은 이런 집안이다. 아무리 현대라 하지만 가문의 내력은 잘 알고 살아야 한다." 하고 훈계의 말씀을 하셨다. 그러니 장모님은 곁에서 안절 부절 못하시고 "아니 신혼 여행 갔다 첫 인사온 사람들에게 뭐할려고 그런 소리를 해요." 하고 잔소리를 하셨다. 장인 어른께서는 성정이 괄괄하시니 "무슨 소리는 무슨 소리. 우리 식구가 되었으니 집안의 내력은 알아야 하는거지 " 하고 소리를 높이셨다. 나는 민망하여 "괜찮습니다. 아버님 잘 알았습니다." 하고 공손히 말씀 드려 수습이 되었다.


좀 우스운 얘기지만 처가에서 부모님과 처남 처제 등 온가족이 처음 저녁을 먹는데 밥이 아주 인절미에 가까운 떡밥(?) 이었다. 나는 본래 진밥을 아주 싫어하고 고슬고슬한 밥을 좋아 하는데 속으로 '웬 밥이 이리 떡밥일까' 하고 생각했지만 새신랑이 티를 낼 수도 없어서 그저 묵묵히 잘 먹었다. 나는 그날 어떻게 하다보니 한번 떡 밥이 된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그후에도 처가에 갈때마다 밥이 떡밥이었다. 알고 보니 처가의 모든 가족들은 된밥은 먹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참 좋아하는 밥 풍습도 많이 달라 처가에 갈때면 언제나 밥때문에 불편한건 어쩔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