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7월 1일. 군인의 신분이 끝나고 다시 민간인으로 돌아 왔다. 사회에 나오면서 가지고 나온것은 38만원이었다. 우선은 반갑게 R을 만나 무사 전역의 기쁨을 나누었다. 만나면 언제나 귀대 시간에 쫒기기 급급했던 생활은 이제 안해도 된다고 생각하니 그게 민간인으로서 가장 큰 기쁨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사회의 바람이 더 매섭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군에서 전역할때 내가 가지고 나온 것은 봉급을 아껴 정기저축한 38만원이었다. 당시 회사 대졸 신입사원 봉급이 구만 오천원 정도였으니 사회로 치면 딱 4개월치 봉급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도와 줄이 없는 나에게는 그것이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소위 종자돈 이었다.
7월 초순에는 "군에 무사히 다녀 왔습니다."하고 전역 인사를 다녔다. 김효신 장로님 댁을 거쳐 수원에 내려가 형을 만나고 남원으로 내려가 어머니와 큰누님을 뵈었다. 인사를 다니느라고 8만원정도를 쓰고 나니 다시 서울에 올라왔을때는 딱 30만원이 남아 있었다. 취직이 금방 되지 않으니 불안해 있는데 친구 원이 형님의 소개로 8월 1일부로 동신제약에 입사하게 되었다. 신입 동기중에는 12기 동기들이 많았다. 신입사원 교육을 받고 있는 동안에 8.18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발발하였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은 유엔군과 북한군의 초소가 서로 중첩되어 설치 되어 있었다.1970년대 초 유엔 측은 3초소를 설치하고 그 북쪽 3초소를 조망할 수 있는 조금 높은 지역에 5초소를 설치 하였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두 초소 사이에 미루나무 한 그루가 무성하게 자라 양 초소의 사이를 가리고 있었다.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 30분 경비병력 10명과 노무자 5명의 유엔사 작업반이 현장에 도착하여 나무를 자르려고 하자 북한군 지휘관 박철과 30여명의 병력이 일시에 달려들어 "죽여-" 하는 박철의 명령에 따라 도끼로 미군 보니파스 대위의 머리를 내리찍고 이어서 베렛 중위의 머리도 내리 찍었다. 4분간의 난투끝에 미군 장교 2명은 사망하고 한국군 장교 1명, 사병 4명, 미군 사병 4명 등 총 9명이 중상을 당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주한 미군의 공군력과 해군력은 강화되고 김일성에게 심각한 책임자 처벌을 요구 하였으나 그 이상의 전투로는 확전되지 않고 동년 8월 21일 오전 6시 4분경 미 2사단 병력과 한국군 제1공수 특전단 박희도 장군의 지휘하에 그 미류나무는 절단 되었다. 나는 신입사원 교육중에 그 뉴스특보를 듣고 간담이 서늘하였다. 다름 아니라 판문점은 내가 있었던 지역이며 나와 같이 교환소대장으로 근무했던 칼리어 중위도 판문점에서 근무하다가 내가 전역 무렵 본국으로 귀국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계속 판문점 근무를 하였다면 그가 죽을 수도 있는 대 사건 이었다. 나는 요즘도 업무 관계상 정부에서 초청한 인사들이나 미국에서 내한한 인사들을 인도하여 판문점에 들어갈 때마다 이 미군 3초소와 5초소 사이에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는 잘린 마루나무 그루터기의 비극을 자세히 설명하곤 한다. 분단의 비극은 아직도 한치의 변함없이 진행형인 것이다.
동신제약 신입사원 교육이 끝나고 나는 영업부에 배치되어 성북구 의원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북구는 빈곤한 지역이 많고 또 내가 아직 영업에 적합한 성격으로 훈련 된것도 아니라서 실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제약업계에 발을 내 딛게 된것은 그런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다양한 산업계 중에서 그래도 가장 경기의 흐름을 적게 타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안정성이 높다고 생각하였다. 그래도 내가 영업을 좀 했던 품목은 홍역 백신인 소아과의 라이루겐과 항생제인 헤타실린 수액제인 솔비톨 등이었다.
나는 취직하기 직전에 입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잠실 2단지의 5층 주공아파트였다. 지금은 재건축 되어 고층 아파트가 된 그곳은 그때만 해도 아직 새 아파트였다. 그곳 한집사님은 얼마전 상처를 하시고 배재중학교 2학년에 다니는 아들 하나와 쓸쓸하게 살고 계셨다. 나는 매일 저녁에 중2 학생을 가르치며 한 방에서 같이 생활 하였다. 아침에는 한집사님이 일어나서 아침 준비를 해 놓으시면 같이 먹었다. 한집사님은 아파트 앞 상가에서 부동산을 하고 계셨다. 그 때는 미처 몰랐다. 부동산을 하시는 한집사님과의 인연이 나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오늘날 내 인생의 기적은 신앙으로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축복이요,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한집사님과의 만남이 만들어준 인연의 계기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 놀라운 결과를 어떻게 인간의 머리로 상상이나 하겠는가. 그러기에 옛 성현의 말씀에도 사람과의 인연은 소중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는 만나지 말아야 할 인연으로 인하여 인생이 망하고 패가망신하며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는 경우도 있으니 모름지기 인연은 잘 살피고 판단하여 만나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살아가는 지혜이다. 아뭏든 나의 경우는 우연히 소개로 만나서 입주 아르바이트를 하게된 한집사님과의 만남은 나의 인생을 축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크나큰 인도이셨음을 고백한다.
어떤 여름날 오후에 퇴근하여 홍대앞에서 시내 버스를 타고 잠실로 출발하였다. 러쉬 아워가 돼서 버스 안은 타기도 어려울만큼 만원이었다. 그 노선은 상당히 긴 노선이었다. 영등포 노량진을 거처 흑석동 을 지나고 있는데 어떤 할머니가 찢어지듯 비명을 질렀다. 보따리 하나를 든 허름한 옷차림의 할머니가 "비개 내려줘. 비개 내려줘"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나는 비개가 어딘지도 몰랐는데 동작동 현충원(그때는 국립묘지라 불렀다.) 쪽으로 내려가는 고갯길 직전의 옛 이름이 '비개'였다. 버스 기사도 비개라는 지명을 몰라 "어디요?" 하고 소란한 차 속에서 소리치는데 다행히 승객중 한분이 옛날부터 그근방 사시는 분이었는지 기사에게 소리쳐 가르쳐 주어 그 할머니를 내려 드릴수 있었다. 고달픈 인생 살이에 대한 그 할머니의 외침과 인상은 지금도 잊어버려지지 않는다.
그날 잠실 2단지에서 내려 한집사님 댁으로 들어가는데 퇴근시간이 되니 어떤 여자들은 집앞에서 수다떨며 가장의 퇴근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젊은 임산부 새댁이 배가 만삭이 된 모습으로 남편이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뭉클하며 행복하고 부러워 보였다. 나도 어서 결혼하여 저런 가정을 갖고 싶은 생각이 가슴에 가득했다. 자신의 자식을 잉태하고 만삭이 되어 기다리고 있는 아내가 있는 그사람은 일만 끝나면 얼마나 행복하게 집으로 달려올까 하고 생각하였다.
마포구 홍대 입구에 있는 동신제약에 입사한 후에도 당분간은 잠실 한집사님 댁에서 출퇴근 하며 밤에는 학생을 가르쳤다. 그러나 신입사원 교육이 끝나고 현업에 배치되니 감당하기가 좀 어려웠다. 나는 한집사님에게 사정을 말씀 드리고 그곳을 나와 당인리 화력 발전소 인근의 상수동에 30만원짜리 전세방을 얻었다. 밥은 회사뒤에 있는 식당에서 사먹고 전세방에서는 잠만 자는 것이었다. 그래도 처음 전세방이나마 얻은 방에 크리스마스에 R이 보러왔다. 하지만 볼게 뭐 있겠는가. 썰렁한 방에 깔고 덮는 요 이불만 덩그라니 놓여있고 다른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차피 이사 가려면 옮기는 것도 일이니 다른 물건은 일체 사지 않고 있었다. 그때 크리스마스 이브에 명동에 구경 나갔다가 인파에 밀려 나오지도 못하고 꼭 같혀 버린 일도 있었다.
그런데 아무튼 그무렵 나의 생각은 이왕 제약회사에 근무하려면 큰회사로 가는 것이었다. 그래야 R에게나 후에 처가가 될 집안에도 좀 체면이 설것 같았다. 10월 초에 우연히 신문에서 동아제약 신입사원 모집 광고를 보았다. 거기에서 학군 12기 전역 장교를 우대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즉시 원서와 이력서를 제출하였다. 서류심사에 통과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정해진 날에 면접 시험을 보러 갔다. 수일후 최종 합격 연락을 받으니 뛸듯이 기뻤다. 동아 제약은 국내 1위의 톱 제약회사이며 당시는 유한양행 종근당 등으로 2, 3위의 순위가 이어지고 있었다.
동신제약에는 10월 말경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입사한지 3개월도 안되어 사직서를 제출하니 회사에서는 충격이었다. 나는 소개를 해주신 원이 형님의 체면도 있고 너무나 미안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나의 중요한 진로를 포기하고 눌러 앉을 수는 없었다. 이제야 제대로 직장을 잡았구나 하는 충족감과 함께 미래에 대한 큰 꿈을 가지고 동아제약에 첫 출근 하였다.
그리고 전세방을 바로 홍대 앞으로 옮겼다. 40만원에 옮긴 전세방은 4층 건물의 뒷쪽에 있는데 본래 방이 아니라 헛간으로 쓰던 곳을 방처럼 꾸며만 놓은 곳이었다. 보일러 피이프도 안들어가 있는 완전 맹꽁이 냉돌방이었다. 세수 하려면 한층 내려가 3층의 화장실에서 해야 했다. 1977년 1월은 유난히도 추웠다. 영하 25도 정도의 추위가 1주일 정도 계속되니 화장실 수도는 얼어 버리고 드럼통에 받아놓은 물도 얼어서 어름 덩어리가 된것을 파이프로 깨서 어름 부스러기 조각으로 문질러 세수를 하고 출근하러 나오곤 했다. 당인리 화력 들어가는 철로 건널목에 붙어있던 그 4층 빌딩은 지금은 '뉴 밸런스' 매장 건물로 변해 있는 곳이다. 거기서 부터 집을 나와 홍대앞에서 7번 버스를 타고 용두동 동아제약 까지 통근하는 것이었다.
어느날 R이 찾아와 들여다 보고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수 있나 하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방안에 놓여있던 청자 물병이 얼어 터져 깨져서 얼음 덩이가 나와 있고 이불 위에는 온갓 옷들을 다 덮어 놓아서 조금이라도 체온을 보호하려고 펴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추위나 악조건은 나는 워낙 단련이 되어 있는 몸이라 견딜 수가 있었다. 그런 험한 생활은 주인 아주머니의 모진 생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느 추운 일요일 아침에 주인 아주머니가 문을 노크했다. 왜 그러나 하고 열어보니 "지금 우리가 외출 할려고 하는데 집을 좀 나가 주세요." 하는 것이었다. 나는 참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자기가 외출하니 세든 사람도 방을 나가 외출 하라는 것이었다. 자기 안방 살림방에 자물쇠 장치가 없어서 아마 세든 사람이 도둑질이라도 할까봐 그러는 모양이었다.
나는 감정이 폭발 하고 말았다. "아니 , 세상이 이런 경우가 어디 있어요? 주인집이 외출하니 셋방 든 사람도 나가 달라고? 이거 아주 형편 없는 집이구만 . 그럴려면 세를 주지 말아야지. 내가 전세금 내고 사는데 왜 당신들 외출 한다고 나도 나가야 된다는 거요?" 하고 벽력 같이 소리를 질렀다. 주인 아주머니는 자기가 무슨 틀린 소리를 했냐며 오히려 화를 내며 "주인 나가면 셋방이 외출 하는게 당연하지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거예요? 아주 질이 안좋은 사람을 들였구먼."하고 되받아 화를 내는 것이었다.
그 일이 있은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방값을 당장 빼 주세요" 해서 하숙으로 옯겼다. R도 어떻게 이런 집에서 더이상 견디겠느냐며 옮기기를 강하게 권했다. 어차피 회사도 멀고 가까운 데로 옮길겸 용두동 하숙집으로 이사했다. 이사라 해 봤자 이불 보따리 하고 옷가방 하나였다. 용두동은 바로 회사 근처인데다가 처음으로 해보는 하숙 생활에 퇴근후에도 재미가 있었다. 서울 시청에 다니는 공무원에 단국대 음대 호른 전공 대학생, 인천의 주식회사 삼미에 막 입사한 내 또래 등 하숙집은 같이 식사 할때면 언제나 활기가 넘쳐 흘렀다.
회사에서는 신입 사원 교육을 마치고 신설동 로타리 동화빌딩(지금도 그 자리에 그 건물 그대로 있다.)에 있는 동지점 병원과로 발령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동아제약 병원과는 약사만이 가는 곳이었는데 아마도 비약사로서는 내가 처음 부임한 것이었다. 이석태 과장은 성대 약대, 담당 오창수 주임은 원광대 약대, 그 다음 장석붕 주임과 김해규씨는 성대 약대, 그외 이승렬 노명남 이재형씨 등은 중대 약대, 나와 비슷한 오성규 씨는 서울대 약대 였다. 아무튼 제약회사에서는 모든 업무의 기본이 영업 업무이니 누구나 다 영업부를 거쳐야 되었다. 나는 성동구 병 의원 담당으로 배치 받았다. 참 동지점 병원과에 첫 출근한 날 아침의 광경이 엇그제 처럼 눈에 선하다.
모두의 앞에서 인사를 하였는데 나는 장교 출신이라 인사에도 절도가 있었다. 그런데 장석붕 선배가 큰키에 터프한 외모로 머리칼을 휙 뒤로 넘기며 " 너 장교 출신이야? 난 수경사 헌병 출신이다. 잘해봐."하며 약간 삐딱하게 군기를 잡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장선배와는 그후에도 몇번의 트러블이 있었는데 그는 후에 회사를 사직하고 동대문 이화대학 병원앞에 조일약국이라고 대형 약국을 개업하여 엄청난 돈을 벌고 성남 등에 체인 약국까지 열어 대 성공 하였다. 그러나 그후 그만 누군가의 꼬임에 빠져 알지도 못하는 무슨 건축업인가에 손을 대 사기꾼에게 완전 당하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전재산을 다 잃고 빈털털이가 되어 화를 못이기고 어느날 밤중에 숨이 막혀 돌아가고 말았다. 애석한 일이었다.
제약회사는 매월 말일에 영업 마감을 하는데 목표는 언제나 달성하기 어려울 만큼 과도하게 내려오고 웬만한 사람이 아니면 거의가 말일이 돼도 실적이 목표 금액에는 모자랐다. 과장은 어떻게 해서든 목표를 달성해야 병원 부장에게 닥달을 당하지 않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표액을 다 마감하라고 아우성을 쳤다. 오창수 주임이 각자 푸쉬 세일 금액을 할당하여 장기(송장, 주문서)를 끊으라고 밀어 부쳤다. 당시에는 아직도 일본어 영업 용어 잔재가 남아 있어서 '오시우리(압매)라 하였다. 주문도 못받았는데 끊으라고 으름장을 놓으니 말일만 되면 전쟁 상태였다. 이번달 마감을 위하여 다음달 판매가 될만한 거래처에 먼저 주문서를 끊어 놓으면 다음달 영업이 초반부터 어려워지게 되니 누가 쉽게 끊으려고 하겠는가 모두가 인상을 으르릉 대며 버티고만 앉아 있었다.
그러면 왔다 갔다 하면서 끊나 않끊나 눈치를 보고 있던 과장이 "어이 오주임! 꼬량주 하고 탕수육 시켜." 하고 소리를 쳤다. 요리가 오면 각자 유리 글라스에 독한 고량주를 가득 따라서 모두 한숨에 들이키게 했다. 순식간에 정신이 몽롱해지면 주임이 "주문서 잡아. 어차피 끊을건데 어서 끊어" 했다. 모두들 포기한 심정으로 인상을 쭈그리며 장기를 끊어 내곤 하였다. 그렇게 해서 과 목표가 다 채워지면 밤중에라도 마감을 하고 중국집으로들 몰려가 떡이 될때까지 술을 푸고는 했다.
그런데 오시우리 주문서를 끊어도 어느정도 거래처 사용품목과 맞아야 하는데 사용중인 품목은 이미 거래처 창고에 쌓일만큼 갖다 놓았으니 얼토당토 않은 품목을 끊어 놓고 월초에 거래처에 주문서만 갖고 가서 은근슬쩍 송장에 인수 도장을 찍은 다음 그 물건을 비자료로 다른데 팔아 넘기기도 하였다. 그것을 '덴바이(전매)'라 하였는데 그것은 범죄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행위도 성행하였다. 또 '덴바이꾼'이라고 그런 비공식 무자료 품목만 거래하는 브로커들도 성행하고 있었다. 이름은 밝히기 어렵지만 종로 담당의 모 주임은 과 전체 목표를 고참으로서 책임지고 다른 후배 직원들의 '오시우리' 짐을 덜어 준다고 종로의 비뇨기과에 진료과목과는 관련도 없는 맥소롱 내복액 한 트럭분을 끊어서 창고에 보관 했다가 다음달 월초에 어디론가 처분하는 일도 있었다. 참 생각할수록 황당한 당시의 영업 문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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