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어나 저 강을 건너라

쌍용부대 10중대 생활

Billy Soh 雲 響 2020. 3. 3. 11:40

 남 북한의 휴전선이란 군사 분계선과 남방 한계선 북방 한계선으로 구성된다. 서해에서 바다의 경계선이 육지로 들어오면 한강 하구에서 군사 분계선이 갈라지고 그 강물 위의 경계선이 마침내 육지로 올라가 군사 분계선(MDL, Military Demarkation Line)이 이어지며 그 남쪽 2킬로미터 지점이 GOP라인이다. 그 육지 군사 분계선이 시작되는 첫 지상 구역이 바로 우리 중대의 방어 담당 구역이었다. 소위 서부전선 1번 철주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 10중대의 중대장님은 3사관학교 2기 출신이신 오해봉 대위님이셨다. 나에게 너무나 잘해 주셨던 분이며 파월 용사이셨다. 중대장 숙소 앞에는 '린'이라는 멋진 개를 키우고 계셨는데 중대 구역 순찰을 나오실때는 항공 점퍼를 입으시고 꼭 개를 데리고 다니셨다. 강인한 체력으로 키는 크지 않으나 다부진 체격을 하고 계셨다. 그때는 양담배가 귀한 시절이었는데 우리 사단은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지역이라 비교적 쉽게 양담배를 구할 수 있었다. 오 중대장님은 켄트 담배를 아주 좋아하셨는데 새 담배곽을 처음 뜯었을때 담배 필터 향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내가 맡기에도 참 좋은 느낌이었다. 운동을 좋아 하셔서 중대 연병장에서 소대별 축구 시합을 시키고 씨름판을 벌리는 일도 있었다.

 

훗날의 얘기이지만 나는 오 중대장님을 언제나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에 나온뒤 정신없이 돌아가는 사회 생활 속에서 찾아볼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찾아 보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 군대생활에서 나를 좋게 봐주시고 모든 것을 도와 주셨던 분을 뵙고 싶었던 것이다. 우연히 기회가 찾아왔다. 내가 섬기는 신도림의 갈릴리교회 후배 장로중에 3사관학교 출신이 있었다, 어느 주일날 나는 그 후배 장로에게 부탁하였다. "군시절의 오해봉 중대장님을 좀 찾아봐 주세요. 3사 2기신데 동문회를 통해서 좀 찾을 수 잊지 않을까. 아는 것은 그분 고향이 정읍군 소성면이라는 것 밖에 몰라요" 그런데 1주일 후 기적처럼 찾았다는 연락에 왔다. 너무나 반가웠다.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된 오 중대장님은 지금도 가끔씩 뵙고 있다. 여전히 강철 체력이시며 나는 한번도 못 가본 지리산 천왕봉을 몇년전에 100회 등반 하셨다는 산악회 축하 등반 사진을 보내 주신적이 있다. 참 엄청난 분이시다.

 

우리 중대 중에서도 왼쪽 첫번째 담당 소대는 학군 1년 후배인 2소대장 신용점 소위가 담당하고 그 다음 중대 본부와 같이 있는 가운데 방어 구역이 1소대장인 나 소 중위 이며 가장 오른쪽 구역 담당이 3소대장 L중위 였다. 신소위는 아주 침착한 성격의 얌전한 후배였고 동기인 3소대장 이성열 중위는 강원대 출신으로 체구는 자그마하나 아주 당차고 다부진 성격이었다.

 

남자들 , 특히 대학생활중 2년간의 군사훈련을 마치고 임관한 학군 장교들은 대부분 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하여 보병학교 초등군사반으로 입교하는 그 시점에서 대학생활 내내 사겼던 여자 친구와의 미래를 결정하고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즉, 헤어지고 오느냐 아니면 계속 이어져서 장래를 약속하고 오느냐인 것이다. 사실 나도 R(지금의 아내)이 임관 식장에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었더라면 헤어지고 올뻔 하였다. 그런데 내 주변의 동기들은 마음을 다해 사겨온 여친들과 헤어지고 온 경우가 많았다. 4중대 시절의 단짝 양소위도 헤어지고 와서 초기 군대 생활이 너무 힘들었다.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폐쇄된 군생활에서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것은 여친의 따뜻한 마음과 사랑이 무엇보다도 큰 것이었다. 병원 생활 후 10중대로 전입와서 같이 생활했던 이중위도 헤어 지고 온 경우였다. 그런데 이중위는 그 후유증이 너무 심해서 그 다부지고 활달한 성격 덕분에 공식적 석상이나 주간 활동 중에는 누구도 느낄 수 없으나 업무가 끝나고 밤이 되면 술을 마시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처음에는 사정을 모르고 이 친구가 왜 이리 술을 마시나 했다. 한참후 우리가 GOP 근무를 끝내고 FEBA(Fore Enemy Battle Area, 접적지역)로 철수하여 생활할 때는 BOQ에서 한방을 사용하였다. 한방을 쓰면서 보니 이 친구는 매일같이 문산읍에 나가 만취가 돼서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때는 이미 군생활도 2년이나 지나 전역이 5,6 개월밖에 남지 않았을 시기인데도 만취돼서 들어오면 "NC야-" 하고 전 여친의 이름을 한없이 부르면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사귀던 여친과 그렇게도 애틋한 사랑을 나눴었는데 너무나 강력한 집안의반대로 맺어지지 못하고 헤어지고 나서 바로 군대로 온 것이었다. 그 활달한 친구가 속에 감추인 그 상처와 슬픔을 잊지 못해 그렇게 흐느끼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나또한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다. 어떻게도 위로를 해 줄수가 없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모두 젊은 날의 아픔이었다. 지금은 소식도 끊어지고 한세상이 다 지나가니 어딘가에서 사랑하는 배필을 만나 행복한 인생을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내가 R과 이어져서 미래를 약속한 상태로 군에 들어왔고 자주 면회 오는 모습을 보면 동기들은 너무나 부러워하였다. 나는 그때만해도 여성에 대한 관념이 너무나 결벽상태였기 때문에 동기들은 반 장난 삼아 그것을 깨뜨려 보려고 많은 장난을 하였다. 한번은 업무후 문산읍에 나가 동기생인 이성열 중위와 연대 통신대의 권순우 중위와 슬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날 따라 친구들이 어찌나 세게 술을 권해대는지 나는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젊은 시절이니 초저녁 부터 시작한 술이 아마 밤 11시 정도까지는 버티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직후 필름이 완전히 끊겨서 어떻게 됐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언뜻 잠이 깨서 보니 어느 방에 내가 누워 있었다. 정신이 아직 제대로 들지는 않았지만 어렴풋이 친구들한테 부축을 받고 여관으로 들어온 생각이 났다. 잠시 더 정신을 차려서 보니 이게 웬일인가. 옆에 웬 아가씨가 누워 있었다. 이게 무슨 해괴한 일인가 하고 나는 정신이 번쩍 났다. 일어나 불을 키고 소리를 질러서 깨우며 누구냐 하고 소리치며 살펴보니 저녁에 술을 마실때 친구들이 붙여준 파트너 아가씨였다. 질겁을 하여 소리를 지르며 당장 나가라하였다. 아가씨는 잠결에 일어나 이게 무슨 벼락인가 하는 표정으로 참 이상한 군인 아저씨라며 주섬주섬 챙겨입고 나가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잠을 자는둥 마는둥하고 아침에 일어나 부대로 들어왔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 권중위 두 동기가 소위 내 딱지를 떼어 주자고 처음부터 짜고 벌인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실패하고 난 후부터는 친구들이 참 지독한 놈이다 하고 아예 그런 시도를 포기하고 말았다.

 

R은 언제나 토요일에는 면회를 왔었지만 내가 GOP 생활하는 중에 면회를 온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었다. FEBA 부대에 있을때는 부대로 찾아와서 위병소에서 면회를 신청하면 바로 나올 수 있었다. 외부에 나가있는 경우에도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였다. 그러나 전방 지역은 일단 부대가 아닌 자유의 다리 헌병초소에 와서 소속과 성명을 대고 면회를 신청하면 연대로 연락이 가고 연대에서 대대로 연락이 가서 대대에서 다시 중대로 연락이 오면 자유의 다리까지 나가야 하는데 나갈 교통편이 없었다. 한시간 넘어 걸어 나가거나 운이 좋으면 부식차등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R은 토요일 오후에 조금이라도 일찍 면회를 신청하기 위하여 토요일 오전 수업을 이리저리 수를 써서 동료 교사와 바꿔하고 일찍 나오는 것이었다. 그것이 한두번도 아니고 여러번 반복되니 상사인 교감 선생이 좋지 않게 보는 것은 당연할 것이었다.

 

그해 7월 중순 어느 주말에 장마철이 돼서 매일 비가 오는데도 R이 면회를 왔다. 즐거운 데이트를 마치고 밤에 막차 버스를 타고 대대에 들어오니 밤 11시 정도 되어 있었다. 시야를 가릴수도 없을 정도로 호우가 퍼붓고 있었다. 대대에서 자고 아침에 중대로 들어갈까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중대에 보고를 한것도 아니라서 그냥 혼자 들어가기로 하였다. 맡겨놓은 M16을 찾아서 장교 우의를 입고 철모를 눌러쓴채 출발하였다. 대대에서 중대 까지는 5킬로 정도 되는데 조금 가까운 지름길로 가려면 그길은 완전 산길 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한발짝 앞도 볼 수 없이 장대비는 아예 양동이로 퍼 붓듯이 쏟아지는데 혼자 산길을 갈때 등골에서는 소름이 오싹 오싹 끼쳤다.

 

눈앞에서 빗속에 뭐가 어른거리는 것처럼도 보이고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이 휙 가로지르는 것 같이도 보였다. 그러나 무서운 것은 귀신 보다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앞뒤 분간 안되는 시간에 혹시 북한 무장공비라도 침투 할 수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른쪽 어깨에 메고 있는 M16은 유사시에는 0.1초내로 발사자세를 취하도록 숙달 훈련이 되어 있었다. 총끈을 잡은 오른손과 오른쪽 어깨의 반동으로 총을 튕기듯이 앞으로 뿌리면 왼손은 자동적으로 총신을 잡게되고 그 순간 오른손 검지 손가락은 일순간에 방아쇠를 당기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전방의 어둠을 응시하며 총을 순간에 사격 자세로 잡는 마음속 연습을 계속하며 걸었다.

 

한 동안을 무의식적으로 걸어 산 기슭을 돌아 나오니 어느 순간에 저 멀리 중대의 불빛이 보였다. 거기서부터는 산을 내려가는 길이었다. 이미 다 온것같은 안도감이 들었다. 중대에 도착하니 소대원들이 놀랐다. 온몸은 우의 속에서 완전히 땀으로 젖어 있었다. 전투복은 물을 짤 정도로 젖어 있었다. 나는 그 후 부터는 아무리 어두운 길이나 무서운 길이라도 전혀 무서워 하지 않고 가게 되었다. 인생은 가장 어려웠던 순간을 거울처럼 기억하며 걸어가는 길인 것이다. 최악의 시기를 기억하면 웬만한 어려움에 부닥쳤을때는 '이까짓것 그때보다는 나은거 아냐?' 하며 자기도 모르게 난관에 부딪쳐 돌파하려는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다.

 

한번은 가장 추운 주말에 R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자유의 다리에 와 정오 12시쯤 면회를 신청하였다. 정말 살을 에이게 추운 1월의 어느 토요일 이었다. 헌병 초소는 일반인이 들어갈 수도 없는 곳이다. 임진각에 잠시 들어가 있다가 또 나와서 기다리다가 하며 아무리 기다려도 내가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손발은 얼어 터질것같고 시간은 가는데 소식이 없었다. 어디 멀리로 작업을 나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 어쩐지 면회를 올것같은 예감이 있었으나 예정된 중대 화목 작업일이라 중대원을 인솔하여 군사분계선 가까이까지 화목 작업을 들어가 있었다. 오후 네시쯤 병사들을 인솔하여 중대로 돌아오니 면회와 있다는 것이었다. 정신없이 서둘러 자유교까지 도착했을때는 오후 6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R은 시퍼렇게 언 얼굴로 나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잠시 다른 얘기지만, 어떤 부부든지 결혼히여 한세상을 살다보면 부부싸움을 할때도 있고 의견이 틀어져 미운 생각이 들때도 있을 것이다. 결혼은 참을 인자 라고 하는 말도 있고 부부는 웬수가 만나다는 속담도 있지 않는가. 나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내 성격은 칼칼한 편이라 그런일도 많았다. 그러나 화나는 순간이 잠시 지나가고 나면 언제나 옛날 군시절 R의 정성과 사랑이 생각나 금방 내가 잘못했다고 사과하곤 하였다. R은 어려운 시절에 나에게 엄청난 희생의 투자를 해 놓았던 것이다.

 

이 무렵 육군 회보에 보도된 대 사고가 쌍용부대에서 발생했다. 2대대에 소대장으로 부임해 있던 이춘근 중위가 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이중위뿐 아니라 육사 출신 중대장 대위와 선임하사와 분대장 둘 등 중대 간부 5명이 사망하였다. 그 중대 간부들은 지뢰 매설 작전을 위하여 DMZ 내에 들어갔다. 극히 위험한 작전이기 때문에 일부러 병들을 제외하고 간부들만 들어간 것이다. 2박 3일간 지뢰 매설 작전을 무시히 마치고 철수하는중에 누군지는 모르지만 인계철선을 건드림으로서 그 일대에 매설된 지뢰대 전체가 다 폭발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이중위와 다른 간부들은 모두 현장에서 사망하고 중대장 대위는 하체가 날아간채로 후송중 사망하였다. 그 중대장은 아직 신혼으로서 막 갓난이 딸이 하나 있었다. 위급상황에 앰불런스가 올 사이도 없이 짚차로 후송하는데 숨을 거두기 직전 중대장의 마지막 말은 그리운 아내나 부모님이나 딸에게 한 말이 아니라 "대대장님 죄송합니다"였다. 숨을 거두면서도 주어진 작전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것이 자신의 죽음보다도 더 상사에게 죄스러웠던 것이다. 나는 비록 지면이 있는 중대장은 아니었지만 그 소식을 듣고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그리고 군인으로서 마지막 보여준 그 충성심이 비록 사고는 당하였지만 영웅이라고 생각되었다.

 

동기생인 이춘근 중위는 나와는 각별한 사이였다. 동문의 113학군단일뿐만 아니라 같은 SDA(기독학생회) 출신이었다. 대학생활 내내 같이 지냈던 친구였다. 학군단에 같이 들어와 같이 임관하여 보병학교를 거처 같은 사단 같은 연대에 배치되기까지 같이 왔던 친구였다. 그뿐 아니라 그는 3대 독자였다. 항상 사고가 나면 어찌 그런 일이 벌어 지는지 모른다. 3대 독자가 그렇게 전사하였으니 그 집에 대가 끊긴것은 말할것도 없다. 이중위는 동작동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10중대장 오해봉 대위님이 임기가 끝나서 이임해 가시고 육사 출신인 박윤규 대위님이 새로 부임해 오셨다. 박대위님은 온화한 성품으로 중대를 무난하게 지휘하셨다.

 

1976년 전역의 해가 밝았다. 우리 연대는 GOP 근무 1년을 마치고 FEBA지역으로 교체하여 밤새 도보로 이동 철수 하였다. 임진강 하천선 방어진지로 철수 완료후 새로 주둔할 부대로 들어오니 조식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