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어나 저 강을 건너라

미군 교환소대장으로 발탁되다. 106 야전병원으로 후송되다.

Billy Soh 雲 響 2020. 2. 28. 21:06

우리 쌍용부대 담당구역 내에는 대통령이나 모든 외국 국가 원수들이 북한의 상황을 관찰하고자할 때 오시는 S OP(S 관측소)가 소재하고 있었다. 대대장님은 육사 출신의 이동섭 중령이셨다. 대대장님은 영어가 유창하여 우리 대통령이 오실때는 우리말로 브리핑을 하시지만 외국 국가 원수가 오실때는 영어로 상황 브리핑을 하셨다. 나도 영어를 하니 그런 역할이 무척 부러웠다. 그러던 어느날 대대장이 불러서 대대 CP(Commanding Post, 본부)로 올라가니 대대장이 "야 소소위, 너 미군 부대와 한국군의 교환 소대장으로 결정되었으니 우선 미군 소대장을 맞을 준비해라. 둘이서 공동 근무를 하는 것이야" 하고 지시를 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 소대는 판문점 문지기 소대로 파견 나가 있었으므로 대대 OP를 담당하고 있는 2중대로 임시로 올라가 미군 소대장을 맞을 준비를 하였다.


며칠 후 미군 Collier 소위(Second Lieutenant)가 도착하였다. 나는 막사를 같이 쓰며 공동 소대장 임무를 시작하였다. 그는 미국 연방 육군 사관학교인 West Point 출신으로 문무를 겸비한 훌륭한 청년 장교였다. 각개 전투등 부대 훈련을 시킬때는 칼리어 소위가 주로 시키고 나는 통역을 하며 같이 진행 하였다. 야간에는 당번병에게 뜨거운 차를 들려 칼리어와 같이 비탈길의 DMZ 초소들을 순찰 하였다. 때로는 배구등 체육과 체력 강화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식사시간 후나 잠시 여가의 시간이 날 때는 대대장 실에 들러 이동섭 대대장님과 국제정세 토론을 하기도 하였다. 1975년초 당시 최대의 관심사는 기울어가는 월남전 상황이었다. 월맹군의 수십배 장비와 병력과 물자를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과 한국을 포함한 연합군은 월남전의 수렁에서 목하 불리한 전세로 허우적대고 있는 형국이었다.


불과 몇달 후의 일이지만 그해 1975년 4월 30일 월맹군의 불과 한달여에 걸친 극히 짦은 시간의 대공세에서 자유 월남은 패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와 월맹의 레둑토 대표 사이에 벌어진 지루한 강화조약이 그 전해에 조인되고 키신저는 당사 2국간의 평화 협약이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해 많은 우방국의 공동조인으로 평화 보장까지 받았으나 월맹은 그 모든 것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1년후 정면공세로 노도처럼 다시 밀어 붙여 불과 한달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짧은 시간 안에 한 나라의 영토 전체와 천문학적인 모든 자산을 꿀꺽 삼켜 공산 통일 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공산주의자와의 협상과 대화의 의미가 무엇인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세계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정세는 어찌하든 우리는 주어진 임무를 열심히 수행하였다. 어떤날은 쌍용연대 연대장님이신 안필준 대령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칼리어 소위와 토요일 저녁에 연대장 관사로 오라는 것이었다. 저녁 초대를 해 주신 것이다. 토요일 저녁에 짚차로 칼리어와 같이 연대장님 관사에 가 연대장님과 가족분들을 모시고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 식사 후에는 맛있는 후식도 먹으며 연대장님과 정세 얘기도 나누고 즐겁게 담소하였다. 연대장님의 말씀을 나는 칼리어에게 일일이 통역해 주고 또 칼리어가 하는 얘기를 연대장님에게 통역해 드렸다. 자랑같아서 좀 쑥스러운데 연대장님 사모님이 "아니 어떻게 그렇게 영어를 잘해요. 가끔 와서 우리 딸 영어 좀 가르쳐 주면 좋겠네"하시는 것이었다. 연대장님에게는 그때 중2였던 딸이 있었다. 나는 "그건 어려운건 아니지만 군대이니 아무래도 제 마음대로 올수 있을지요."하고 대답하였다.


그후의 얘기지만 나는 중대로 돌아온 후에도 가끔 연대장님이 부르셔서 관사로 가서 저녁도 먹고 잠깐씩 딸의 영어를 봐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데 있었다. 연대장님 관사에만 갔다오면 4중대 중대장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신임 소대장 부임초부터 그리 좋은 관계는 아니었는데 서로 업무만 철저히 하면 되니까 별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연대장님 관사에 다니면서 부터는 완전히 노골적으로 괴롭히는 것이었다. 어느날은 관사에 갔다가 밤중에 귀대하자 마자 소리를 지르면서 "소소위 너 이새끼 매복나가" 하고 야단을 치는 것이었다.


"갑자기 무슨 매복입니까?" 했더니, "말이 많어 임마. 요즘 한밤중 능선에 정체 모르는 불빛이 비친다니 밤새 매복해서 파악해."하고 호통을 쳤다. 나는 상사의 명령이니 별수 없이 매복을 나갔다. 살을 에이듯 얼어붙는 추운 밤이었다. 그러나 불빛은 무슨놈의 불빛이 있겠나. 나를 괴롭히려고 내 보낸 것이었다. 자기는 솔직히 연대장님 만나기도 어려운데 새파란 소위가 맨날 연대장님 관사에 가서 식사하고 놀다 오니 마음이 비틀린 것이었다. 매복 지접에 나가서는 추우니 모포로 몸을 감고 웅크리고 앉았다가 깜빡 졸았다. 얼마나 지났는지 중대장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보니 벌써 중대장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하였다. 그리고 철수하라 하였다.


중대장과 소소위가 그렇게 사이가 않좋고 티격거린다는 소문이 이동섭 대대장에게까지 들어가서 어느날 중대장이 CP로 불려 올라 가서 "너 이새끼 중대장 대위라는 놈이 소대장 하나를 못잡아서 병신같이 티격거려?" 하고 완전히 조인트를 까지고 나왔다. 중대 본부로 돌아와선 "이런 개같이 살아서 뭐하나" 하고 소리를 지르며 수류탄 박스에 엎드려 까서 죽는다고 난리였다. 나는 별수 없이 "제가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참으십시오." 하며 빌고 다른 사랍들과 같이 말려서 겨우 안정 시켰다. 아무튼 내가 상사 운이 없었는지 성격이 부족해서 잘 못 모셨든지 그때는 그렇게 힘들게 생활했다.


먼 훗날 알았지만 당시는 철이 없어 몰랐었다. 안필준 대령 연대장님은 육사 12기의 핵심이며 소위 하나회 멤버로서 그후 승승장구하여 전두환 노태우 박준병 이후 보안사령관을 거처 1군 사령관에 올라 5공화국 실세의 역할을 하셨다. 인품이 아주 온화하셨고 4성 장군으로 예편하여 국영기업인 한국 석탄공사 사장과 은퇴 후에는 대한노인회 회장을 역임 하셨으나 수년 전 작고하셨다. 작고 소식을 듣고 애석함을 금할 수 없었다.


잠시 다른 이야기로 빠졌으나, 주어진 기간이 다하니 칼리어는 본인의 부대인 캠프 리버티 벨로 복귀하고 나도 대대 OP에서 판문점 진입로 게이트의 내 소대로 내려왔다. 그 며칠후에 대대에서 각 파견 소대는 자체적으로 방화수통과 방화기구를 만들어 비치하라는 지시가 내려 왔다. 아침에 작업조 3명을 뽑아서 미군부대 근처에서 쇼팅 깡통 등 재료를 좀 구해 오도록 내보냈다. 그리고 나머지 소대원들은 다른 일을 하고 있었는데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작업 보낸 세명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GOP 지역에서는 임진강을 건너 남쪽으로 갈 수도 없는 격리된 지역이므로 행방불명 된다는 것은 자칫하면 월북을 의미했다.


나는 내심 겁이 나서 즉시 전 소대원을 동원하여 수색하기 시작했다. 한참만에야 세명을 잡아왔는데 이건 세 놈이 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조사해 보니 아침에 셋이서 작업을 나가자 마자 스낵바에 가서 소주 몇병을 사서 마른 갈대 숲속에 앉아 깡소주를 나발 불기 시작했다. 한참후 인사 불성이 된 세녀석은 소주 병을 깨서 각자 서로 찌르며 싸우다가 같이 쓰러져서 갈대 수풀 사이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나는 세놈을 결박해서 병기대로 막은 자체 영창을 만들어 감금하고 정확히 감시하도록 보초를 별도로 붙였다. 이 사건을 대대에 보고를 해야 하나 내가 자체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처리를 해야 할지 가슴이 꽉 막힌듯 고민 밖에 없었다.


내가 그 세명을 선발한 것도 실책이라면 실책이었다. 무심코 뽑았지만 한명은 무주 산골에서 살았던 한글을 겨우 읽는 병사에 한명은 종로 YMCA앞에서 땅콩 장사를 하다 온 병사, 또 한명은 용산역전에서 구두닦이를 하다 온 병사로 세명 모두 평소에 관찰이 필요한 병사들이었다. 우연히 그렇게 뽑아 보냈으나 그들은 모두 욱하면 자제력이 약한 병사들 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 사건 처리를 혼자 감당하느라 거의 일주일동안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일주일 후 겨우 그들의 일을 자체 내로 마무리 짓고 미군 교환 소대장 근무를 위해 캠프 리버티 벨로 갔다.


첫날 오전엔 전략 브리핑이 있었다. 작전 장교가 나와서 당면한 전략과 해야 할 임무를 브리핑 하였다. 오전 업무가 끝나고 점심 시간이 되니 캠프에서는 한국군 교환 소대장이 왔다고 특별히 고급 장교 식당에서 요리를 준비 하였다. 전채부터 시작하여 두툼한 스테이크가 한국의 호텔에서도 먹어보기 힘든 특상품 소고기 요리 였다. 나는 토마토 케찹 소스를 더하여 맛있게 먹었다. 중식 후 휴식 시간에 칼리어 소위의 BOQ(독신 장교 숙소)에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같이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 한참 수다를 떨다가 전화벨이 울려서 칼리어는 돌아서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눈 깜짝하는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나는 호흡이 정지되듯 막히면서 극심한 복통이 일었다. 조금전까지 같이 웃고 떠들며 이야기하다가 그 짧은 전화 받는 동안에 나는 아프다는 말도 소리 지를 겨를도 없이 그냥 굴러 떨어저 소파 밑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칼리어가 전화 끝나고 돌아 보니 조금전까지 소파에 앉아있던 Second Lieutenant Soh 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소파 밑으로 굴러 들어가 '내가 여기 있다'고 소리를 쳐 알려야겠는데 호흡은 정지되고 통증이 심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한참이나 나를 부르며 찾던 칼리어가 겨우 소파 밑에 굴러 떨어져 들어가 있는 나를 발견하고 황급히 꺼내 보니 이건 보통 상황이 아니었다. 즉시 긴급전화로 앰불런스를 불러서 미군 병원으로 후송 되었다. 후송된 후 미군 군의관이 응급처치를 하며 증상이 어떤지 물어보는데 도저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복부 통증만 극심 하였다.


군의관은 복부 통증인 것으로 판단했으므로 일단 위속에 호스를 넣어 점심먹은 것을 suction(흡입기)으로 빨아내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처치를 하는 동안에도 말이 나오지 않고 눈도 뜰 수 없었다. 미군 군의관들이 상의 하는 이야기는 "일단 응급처치는 하였으나 한국군 소속 장교이니 한국군 병원으로 이송해야 되지 않겠는가"하는 이야기만 들렸다. 몇시간만에 비몽사몽인채로 한국군 군단병원인 106 야전병원으로 이송되었다. 106에서도 군의관들이 계속 위세척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날 밤이 지나고 그 이튿날 정오경에도 위 세척을 하는데 24시간 전에 먹은 음식물이 아직도 나왔다.


나는 탈진한 상태였지만 그 중에도 '아니 그렇게 썩션을 하고 세척을 해 댔는데 어제 먹은 음식이 아직도 위내에 남아 있었을까.' 하고 인체가 참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후 점차 안정이 되어갔다. 내과 주치의인 유대위님의 이야기로는 1주일간 소대내 사건을 처리하느라고 극심한 압박을 받고 수면과 식사를 거의 하지 못한 상태에서 미군부대에 가 스테이크를 먹은게 원인이 되어 극심한 급성 위염을 일으킨 것이라 했다. 내가 생각해도 그 진단이 이해가 되었다. 거의 굶어 쪼그라진 위에 기름진 음식이 들어갔으니 위가 쇼크를 일으켜 완전 정지 해버린 것이었다.


어느정도 안정은 되었지만 미음도 넘길 수는 없었다. 3일간은 완전 수액만으로 유지 하였으며 4일차부터 수액과 멀건 미음을 병식하고 7일차부터 10일차 까지는 미음만 먹었다. 그때 처음 알았다. 10일동안 아무것도 씹지 않으니 이빨이 솟아서 흔들리는 것이었다. 주치의에게 얘기 했더니 오늘부터 식사를 처방하겠다고 한다. 열흘만에 처음으로 쌀밥을 먹으니 살것 같았다.


입원한지 보름쯤 지나니 거의 회복이 되었다. 어느날 주치의가 불러서 갔더니 " 어이 소소위,당신 몸은 어느정도 회복이 됐어. 하지만 군대생활 계속할 것도 이니고 아주 여기서 푹 쉬어서 몸이나 완전히 회복하는게 안 낫겠어?" 하고 의향을 묻는 것이었다. 그때로부터 만 3개월에 걸쳐 병원 생활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