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우리 집안은 군대에 가서는 어려운 사정이 생겨도 부모님에게 알리지 않는 전통이 있었다. 전에 형이 군대 생활을 하실때도 연천의 신망리 의무대에 계셨는데 가족이 단 한번도 면회 간 일이 없었다. 나도 병원 생활 하게된 것을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그저 잘 있다고만 편지 하였다. 그러나 긴급 상태가 회복된 후에 R에게만은 알리니 놀라서 금방 쫒아왔다. 학생시절 사귈때는 냉정한 편이었으나 군생활 시작하면서부터는 온전히 나에게 마음을 주었던 것이다. R은 마침 대학 4학년의 모든 과정이 끝나고 졸업식을 남겨놓고 있는 시기여서 비교적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병원생활에서 주중 평일에는 할일이 없으니 같이 입원중인 서너명의 장교들과 탁구나 농구를 하며 시간을 보내거나 그것도 힘들면 침대에서 책을 보거나 하였다. 병실은 장교 병동이 따로 있는게 아니고 길다란 건물의 병실 안쪽 끝을 파티션으로 막아서 장교 병실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병원이고 환자라 하더라도 병사들은 최소한의 내무생활도 있고 점호도 있었지만 장교 환자들은 일체의 간섭은 없었고 회진때 주치의가 와서 상태를 물어보거나 주사나 투약시간에 간호장교가 와서 지도하는 것 정도였다. 토요일이 되면 어김없이 R이 면회를 오니 그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때로는 할머니기 만들어주신 샐러드나 샌드위치를 가지고 와서 맛있게 먹기도 하였다. 병원 바로 가까운곳에 순복음교회 오산리 기도원이 있었으므로 가끔 R과 함께 그곳에 가보기도 하였다.
드디어 2월 하순 R의 졸업식 날이 다가왔다. 나는 비록 병원 생활을 하고 있지만 A급 새 전투복을 세탁소에 맡겨 주름을 잡아 다려입고 졸업식장으로 갔다. 졸업식에는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 외에 동경에 근무하고 계시는 미국인 형부 프렛 지글러씨까지 날아 오셔서 모두가 꽃다발을 안기며 축하해 주었다. 학사모를 쓴 R은 정말 아름다워 보였다.
모두가 같이 점심식사를 한후 가족들은 헤어지고 우리는 둘이서 같이 자유공원으로 갔다. 자유공원은 언제나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였다. 한국전쟁의 승기를 마련한 인천상륙작전의 현장 바다를 내려다 보며 언제나 우리들의 미래의 약속을 다지곤 하였던 것이다. 나는 R의 졸업 선물로 순금 두돈의 반지를 준비했다. 당시 내 월급이 2만원 정도 였는데 순금 두돈이 4만원 남짓 됐으니 두달치 월급을 꼬박 모아 준비 했었다. 먼 훗날 다이아 캐럿트 등 비싼 선물을 하기도 했지만 R은 그때의 두돈 반지가 가장 감동이었다고 한다. 하기사 다이아가 비싸다해도 꼬박 두달치 월급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그 시절과 같은 순수한 사랑과 올인의 정성이 훗날에는 그때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여유로운 병원 셍활도 두달 반 가량이 되었을때 대 사고가 일어났다. 같은 연대 3대대 10중대 1소대장으로 근무하던 학군 12기 동기 이석규 소위가 사고를 당하여 후송되어온 것이었다. 그날 이소위는 GOP철책선의 방어용 무기인 크레모어를 정기 점검하고 있었다. 점검 방법은 철책선 3미터 후방 정도에서 크레모아 발사 버튼에 테스터기를 연결하여 눌러서 불이 들어오면 연결 상태가 이상 없는 것이다. 그 날 아침 작업을 나가는데 전역 명령을 받아놓고 나갈 날자를 기다리는 고참 병장이 내무반에서 노는 것도 너무 지겨우니 나도 나간다고 작업반과 같이 나갔던 것이다.
하나씩 순번대로 점검해 나가다가 어느시점에서 전역 예정 병장이 내가 하겠다며 후배 병사들로 부터 테스터 기를 받아 들었다. 저희 소대장은 크레모아 바로 후방의 흔적지 모래밭에 나가 있었다. 소위 갈참 병장이 아무래도 긴장감이 풀려 있었던지 발사 버튼에 테스터기를 제대로 연결 하지 않고 눌러 버린 것이다. 순간 엄청난 폭음과 함께 크레모아는 발사되고 바로 앞 사선 방향에서 걷고 있던 소대장 이소위의 왼발이 크레모아 후폭풍에 걸리고 말았다. 왼쪽 발목이 한순간에 날아가며 피가 튀었다. 비상 전화가 울리고 즉시 후송되어 106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어 온것이다. 도착 즉시 왼쪽 다리 절단 수술이 시행 되었는데 이소위는 마취를 하지 말고 수술해 달라고 하였다 한다. 자기 인생의 절망적 순간을 차라리 고스란히 보고 싶었던 것이다. 사고도 사고지만 이소위의 지독한 정신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소위는 동국대 경찰 행정학과 출신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경찰 엘리트 예비 자원이었지만 그 후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가 없이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R은 매주 토요일이면 빠지지 않고 면회를 왔다. 그때의 정성은 참 감동적이었다. 그렇게 나의 병원 생활이 3개월 가까이 되니 이제는 퇴원을 해야할 날이 다가왔다. 나는 기존의 4중대로 돌아가지 않고 동기생인 이석규 소위가 빠진 10중대 1소대장으로 보임이 정해 졌다. 퇴원하여 3대대 본부를 거쳐 10중대에 도착하니 중대장님은 지난번 4중대장님과 동기생인 3사관학교 2기 출신 오해봉 대위셨다. 오대위님은 혈기가 팔팔했지만 기본적으로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이었다. 4중대장님 하고는 완전히 다른 성품이셨다. 중대장님은 병원 생활후 퇴원하여 부임한 내가 아직 몸도 약하고 정신적으로도 현업의 압박감이 많을 것을 염려 하셨는지 부임 신고를 하자마자 "야 소소위 너는 여기 근무에 아무 부담도 같지 마. 그저 밤에 따뜻한 생강차 들려서 순찰 한번씩만 돌아줘. 그거면 끝이야. 다른건 생각도 마." 하고 따뜻하게 말씀해 주시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 마음이 놓이고 편안해 졌다.
그러나 사실은 그때 나의 새로운 보직 이동이 이면에서 논의 중이었다. 쌍용 연대의 상급부대인 전진사단에는 사단 직할 전진 목장이 있었다. 한우 비육목장으로 사단과 군단에 고급 우육을 공급하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사단의 수입원이 되는 목장이었다. 그곳에는 관리장교가 한명인데 전통적으로 건국대 축산대 출신 학군 장교가 부임하는 전례였다. 바로 내가 적임자인 것이다. 그 당시는 나의 직속 축산대 1년 선배인 이재호 중위가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곳은 사단 병참참모 소속이긴 하지만 그야말로 관리장교가 거의 마음대로 경영하는 특과 보직이었다. 나는 전에 이선배 에게 몇번 놀러 가기도 하고 차기 후임으로는 당연히 내가 될것이라고 거의 정해 놓은 상태였다. 어느날은 사단 병참 참모에게 같이 가서 차기 후임 예정자라고 인사 드린 일까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1975년 6월 말일이 가까워 오고 선배들의 전역일이 가까워 오는데 나의 발령이 나질 않았다. 이미 그때는 10중대 오해봉 중대장님께도 보고를 하여 이 상황을 알고 계셨다. 아무 소식이 없으니 나는 답답하여 중대장님께 대대에 어떤 상황인지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중대장님이 알아보더니 새로 3대대장으로 부임한 사단 인사참모 출신 서귀준 중령의 반대로 일선 소대장을 다른 보직으로 뺄 수 없는 것으로 결정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듯 실망이 되었다. 목장 관리 장교로 가서 공부도 하고 군생활 중에도 나름대로 시간을 활용하여 전역을 준비 하려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버린 것이었다.
한편, R은 진로가 잘 결정되어 2월 졸업과 동시에 3월 2일부로 J공업 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R도 기뻐했지만 나 또한 뿌듯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 바깥에서 살아본적이 없는 R이 그다지 먼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잘 생활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부임 하는날 힘을 주고 싶어서 같이 내려가 첫 출근 하는 긴장된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게하고 올라 왔다. 그러나 예상외로 R은 즐겁게 생활하였다. 평생 처음 해보는 하숙집 생활에 고1 담임을 맡게 되어 모든것이 새로운 환경에서 생활하니 오히려 신선한 느낌도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면회를 오기 바라니 거의 매주 토요일 마다 자유의 다리 헌병초소까지 면회를 오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만일 면회를 올 수없는 사정이 생길때는 어떻게라도 내가 외박을 나가서 R에게로 내려가곤 하였다.
그러던 중 나의 전진목장 관리장교로의 이동이 좌절 되니 나의 마음은 정말 어찌 할 수 없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한동안 우울한 침묵으로 생활하던 나는 8월초의 주말에 중대장에게는 외출 좀 하고 오겠다는 보고만 간단히 하고 부대를 나오고 말았다. 중대장님도 나의 실망한 마음을 아는지라 그다지 별말없이 승락을 하셨다. 마침 R은 근무하는 학교에서 막 여름 방학이 시작된 시기였다. 나는 다짜고짜 서울로 나가 R을 만나 영등포 시장안의 세탁소에 군복을 벗어 세탁을 맡겨놓고 완전 사복으로 갈아 입은뒤 걱정하는 R을 데리고 무작정 대천 해수욕장으로 내려가 버리고 말았디.
젊음이 아무리 무모하고 대책없다 하지만 지금생각하면 참 아찔한 행동이었다. 대천에 도착해 간단한 캠핑 도구와 식재료를 사서 해수욕장 가까운 곳에 민박을 얻었다. 그 집은 민박 전문 집이라 여러개의 방에 다른 팀이 같이 민박을 하였다. 우리는 둘다 요리에는 개념이 없는 편이라 코펠에 대략 찌개를 끓이고 밥을 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맛있는 음식을 다시 먹어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식사가 끝나면 바다에 나가 마음껏 수영하며 자유를 즐겼다. 저녁엔 백사장에 나가 둘이서 장기인 듀엣으로 화음을 맞춰 노래를 하기도 했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줄 모르고 그렇게 놀았다. 내가 현역 군인이며 전방의 소대장 신분이라는 것도 잊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5일 정도 지나니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하였다. 만일에 연락없이 복귀하지 않는 나를 중대장님이 혼자 감당하기 어려워 상부에 보고를 하였다면 정말 장래가 어찌 될 지 알수 없었다. 슬슬 짐들을 정리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영등포의 세탁소에 가 군복으로 다시 갈아입고 M읍으로 와 걱정을하며 하루밤을 다시 보내고 6일째 되는 날 오후 4시쯤 R을 서울로 먼저 돌려 보낸뒤 자유의 다리 헌병 초소에 와서 중대 인사계 서경순 상사에게 전화를 하였다.
인사계는 " 아니 소대장님 지금 어디십니까?"하고 화급하게 대답하였다. 내가 자유의 다리라 하니 "소대장님 거기 그대로 계십시오. 절대 이동하면 않됩니다. 바로 짚차 가지고 나가겠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30분 정도 기다리니 정말 신속하게 인사계가 나와 헌병 초소에서 만났다. "소대장님, 아무 말씀 말고 어서 중대로 갑시다. 중대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니 나는 너무 면목이 없어 아무말도 하지 않고 인사계와 차를 타고 중대로 돌아왔다. 비록 전진목장으로 가지 못하는 인사 불만때문에 부대를 무단 이탈 하였던 것이지만 6일씩이나 기다리며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은 중대장님으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중대장실로 올라가 중대장님을 뵙고 경례를 한다음 "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하고 빌었다.
중대장님은 잠시 말이 없더니, " 됐다. 잘 돌아왔으니 됐어 " 하고 상상치도 못했던 만큼 따뜻하게 말씀해 주시는 것이었다. 나는 감격하여 목이 메일 정도였다. 부대를 6일씩이나 무단 이탈했다 돌아온 부하 장교인데 이렇게 관대하게 대해 주시니 정말 평생 은인이다 싶었다. 이어서 "니 기분 이해 하지만 대대장이 안보내 주는 것을 난들 어찌 하겠나. 어차피 너 군대생활 장기로 할 것도 아닌데 모든 것 잘 참고 무사히 마치는 날까지 잘해주기 바란다." 하시는 말씀을 듣고 소대로 내려왔다.
그때부터 나름대로 안정된 마음으로 새로 힘을내어 군생활을 시작하였다. GOP부대는 훈련을 하는것도 아니고 경계가 주 업무이니 사실상 힘드는 일은 없었다. 병사들 안전하게 초소 근무하도록 지시하고 밤에 순찰을 돌며 졸지 않도록 지도하면 근무는 다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였다. 시간이 날때마다 R에게 일기 형식으로 매일 편지를 썼다. 군 통신 보안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하루 지낸 모든 일들과 생각들을 기록하여 두루말이로 붙여 말아서 보내곤 하였다. GOP에서는 아무래도 자주 외출 나갈 수 없는 것이 가장 싫은 군대 문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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