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어나 저 강을 건너라

마지막 뵌 아버지, R과의 엇갈린 면회, 유격훈련과 쌍용부대 전입

Billy Soh 雲 響 2020. 2. 25. 22:36

5월 초에 장성 전술학교장으로 파견 훈련을 나갔다. 2주동안 보병학교에 오지 않고 전술학교장에서 야외텐트를 치고 숙영하며 훈련하는 과정이었다. 어느날 억수같이 비가 쏜아지는 칠흑같은 밤에 판초우의를 뒤집어 쓰고 대대 공격 방어 전술 교육을 받고 있었다. 너무 비가 쏟아지니 이론 교육을 하고 있었는데 교관은 월남전 안케패스의 영웅 이무표 대위였다. 1972년 한국군의 월남 철수 직전에 베트콩이 아닌 월맹 정규군과의 전투에서 치열하게 싸워 점령당했던 19번 도로의 중요 거점 638고지를 최초로 탈환하여 전과보고를 한 사람이다. 그는 3사관학교 1기생으로 살아서는 받기 어렵다는 태극무공훈장을 받고 1계급 특진하였다.  이 638고지 전투는 한국군의 월남 전투사상 가장 처참하고 전사자를 많이낸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과장된 말이겠지만 일설에 의하면 한국군 전사자 인식표가 트럭으로 실려나왔다는 루머도 있었다. 아무튼 장대비를 맞으며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우리는 이무표대위의 처절했던 대대 전투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훗날의 일이지만 이무표 대위는 대령까지 진급하고 예편하였다.


밤늦게 훈련을 마치고 빗속에 판초우의를 입고 숙영지로 돌아오니 텐트는 물에 잠겨 있었다. 훈련중이니 씻지도 못하고 워커만 겨우 벗고 물이 들어와 있는 텐트이지만 약간 물이 적은 한쪽에서 눕자마자 잠에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젊은 시절이니 그래도 아프지도 않고 훈련을 계속해 나갔다. 5월 4일 저녁에 구대장이 불러서 본부로 갔는데 "너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내일 아침 1일 외박 준비하라" 는 것이었다. 아버님이 곧 돌아가실것 같은 예감을 매일 갖고 있던 시기였으나 나는 구대장의 지시를 받고 직감적으로 "아직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평소 아버지의 사고방식은 철저하게 실용주의셨기 때문에 아마도 돌아가시기 전에 혈육을 보고 싶으신 마지막 소원으로 친지를 통하여 군수의 부친별세 관보를 치도록 한것으로 짐작 되었다.


5월 5일 아침 상무대 본부를 거처 외박 신고를하고 버스편으로 남원으로 출발 하였다. 보병학교 입교 훈련 동안에는 부모 친상이 아니면 일체의 외박은 허용되지 않는 규정이었다. 내동 집에 들어가니 분위기는 침울하였지만 역시 아버님은 아직 돌아가시지 않고 누워 계셨다. 내 직감이 맞았던 것이다. 아버님은 "죽어서 오면 뭐 하겠느냐? 그때는 못와도 좋으니 살아서 마지막으로 너를 보고 싶었다."고 말씀하셨다. 졸업식때도 피골이 상접하셨는데 이제는 정말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뼈만 남으셔서 물도 넘기시기가 어려웠다. 저녁에는 아랫집의 내촌 아저씨께서 문병을 오셨다. 내촌 아저씨댁은 조부대부터 아버지대에 이르기까지 사실 우리 집안과는 서로 않좋은 관계로 지내온 집안이었다. 그 원인은 뒷들 옥답의 수리와 저수지의 관리권 때문이었다. 그 집안과 우리집안이 같이 토지를 갖고 있는데 저수지 관리권을 아버지가 갖고 계셨기 때문에 영농기의 물을 둘러싸고 갈등이 그치지 않았다.


평소에 그리 사이 좋지 않게 지내시던 내촌 아저씨도 아버지가 세상 떠날 날이 멀지 않으니 문병을 오신 것이다. "아니 어서 털고 일어나야지 이게 뭔일이당가." 하고 위로하시니 아버지는 "나는 인제 일어나기 틀렸네. 하고 힘없이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밤중에 나는 아버지 곁에서 하루밤을 새웠다. 아버지는 마지막 힘을 다해 말씀하셨다. "니가 사회에 나가면 언제나 책임은 니가 지고 공은 상사에게 돌려야 한다. 그게 니가 성장하는 길이다. 너는 이담에 괜찮케 살 것이다." 고 말씀하셨다. 인간관계나 특히 혼인관계에 있어서 아버지의 영감은 평생 틀려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만큼 기도생활을 많이 하시고 영적 생활을 추구하셨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한, "지난번 보았던 그 처녀하고 후에 결혼 할려는 생각이냐?" 하고 물으셨다. 졸업식때 보았던 R을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 네, 그럴려구요." 하고 말씀 드렸더니, " 아 그래. 처녀가 복이있게 생겼더라. 아무쪼록 결혼 잘하여 행복하게 살거라. 다만 우리집안에는 김씨가 처음이구나. 사람이 우선이니 괜찮을 것이다."하셨다. 그러고 보니 우리집안 할머니들은 전부 배씨 오씨 양씨 이씨 등 김씨는 없었다. 아뭏든 그날 밤 들은 아버지의 말씀이 나에게는 마지막 유언이 되셨다. 이생에서 마지막 뵌 것이다.


이튿날은 점심을 먹고 아버지께 마지막 인사를 드린뒤 다시 집을 나와 남원 광주를 거쳐 상무대 보병학교로 복귀하였다, 우리 중대 전체는 아직 장성 전술학 교장에 나가 있었으므로 나는 트럭을 타고 중대까지 최종 복귀하였다. 신고를 마친후 이튿날 부터 정상적으로 훈련에 임하였다.


5월 말에는 유격훈련이 있었다. 동복 유격장은 직각의 바위 절벽 산이 연이은 곳으로 북한 124군 부대 특수요원으로 청와대 근처까지 침투했다 잡힌 김신조가 와서 보고 혀를 내둘렀다는 험준한 곳이다. 그곳 연병장 뒷쪽으로는 산이 있었고 산 위에는 소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빨간 모자를 쓴 유격 교관은 지옥에서 온 사자같이 험악하였다. 유격장에 들어서면 본래 피교육생은 고하를 막론하고 계급장을 떼어 버린다. 누구나 계급없이 단지 유격 피교육생 신분인 것이다. "모든 올빼미, 전방에 보이는 산 소나무 한 그루를 향하여 선착순 1명 뛰어 갓!"하는 선착순 구보는 지옥과 같았다. 숨이 차도록 올라갔다 와도 어차피 1명 외에는 즉시 다시 뛰어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몇번 돌고 나면 모두 쓰러진다. 나중에는 요령이 생겨 처음에는 체력을 비축하며 천천히 뛰었다. 체력 강자들이 몇명 빠진 후에 두  세번째쯤 돌때 뒷쪽에 쳐저서 뛰다가 " 다시 선착순 1명!" 하는 교관의 호령에 따라 그때는 돌아서서 전력을 다해 뛰어 맨 앞에 들어올 기회를 노리곤 하였다. 그때는 뛰는 거리가 앞사람보다 짧으니 아무래도 유리하였다.


어느날 밤 '도피 및 탈출' 훈련이 시작 되었다. 각 분대별로 칠흑같은 밤에 조장이 지도와 후래쉬 하나를 갖고 출발하여 중간의 가상적군 인민군 부대와 포로 수용소를 피하여 새벽 5시까지 재 집결지에 도착해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분대장으로서 독도법을 발휘해 탈출 코스를 잘 잡는다고 하였지만 도중에 은닉하고 있던 인민군에게 우리조는 전원 생포되고 말았다. 인민군 포로 수용소로 끌려가 밧줄로 발목이 묶이어 거대한 느티나무에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려 졌다. 그리고 심문을 하며 몽둥이로 발바닥을 내려치는 것이었다. 비명을 지르면서도 재 탈출을 시도해야 하는데 동기중 한명인 공주사대 수학교육과 출신 김성환 소위가 거꾸로 매달려 발바닥에 몽둥이를 맞다가 인민군(조교)의 실수로 몽둥이가 아래로 미끌어지면서 목을 내리쳐 목이 찢어지고 말았다. 금방 피투성이가 되었다. 인민군이라해도 교육 목적상의 가상적이니 금방 앰블런스가 달려와 김성환 소위를 후송하였다. 나는 리더로서 너무나 화가나 소리를 벼락같이 지르며 인민군들을 질타하다가 결국은 모두 휘몰아 포로 수용소를 탈출하였다. 그후로는 산등성이 길이고 뭐고 포기하고 도로를 걸어 재집결지로 들어오니 대부분의 조들은 이미 복귀해 있었다.


거의 90도로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로프 하나에 의지하여 하강하는 레펠 코스는 정말 아찔하였다. 1주일간의 모든 죽을 것같은 과정을 마치고 최종 코스는 하강 코스였다. 산 정상에서 로프의 도르래에 매달려 하강하여 강 위를 날아 건너편 강변 낮은 물속으로 낙하하는 것이다. 로프의 아득한 아랫쪽 산 기슭에는 이 유격 코스중 사망한 몇명 선배들의 묘소와 비석이 있었다. 그 비석을 언뜻보며 "멸-공- 통-일~"을 목이 터져라 외치며 순식간에 낙하하는데 마지막 찰나의 적절한 순간에 손을 잘 놓아 물속에 첨벙히고 떨어져 빠지며 물속에서 기어 나오면 모든 과정은 끝나는 것이었다. 나오면 바로 생철로된 'Ranger' 마크를 받았다. 유격훈련의 모든 과정을 무사히 수료하였다는 것이었다. 그 마크를 달고 얼마나 뿌듯하고 자존심이 높아 졌던가. 유격 훈련은 초등군사반 과정중 최고의 고비였다. 이 훈련이 끝나면 교육은 내리막길인 것이다. 대한민국 육군의 보병 포병 기갑등 모든 전투병과 장교들이 거쳐야하는 동복유격장 과정을 이렇게 무사히 마쳤다.


6월 6일 저녁이었다. 구대장이 불러서 갔더니 "귀관, 지난번에 부친상 당하여 갔다 왔는데 다시 또 부친상이라는 전보가 왔으니 어찌된 일인가?"하고 힐책하였다. 나는 즉시 "아버지께서 오늘 진짜 돌아가셨구나"하고 직감하였다. 그러나 변명을 해야 했기에, "어떻게 된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착오인것 같습니다. 외출은 나가지 않겠습니다." 하고 큰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날은 목요일이었고 이번 토요일이 전원 외박일이니 그때 가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금요일 밤에 친구 재억이가 부친상 연락을 받고 서울에서 송정리까지 내려와 면회를 신청하였다. 나는 대담하게도 철조망 담을 넘어 밖으로 나가 여관에서 재억이와 만나서 새벽까지 얘기하며 밤을 보냈다. 어둠이 가시기 전에 다시 구대로 돌아와 토요일 아침에 외박 신고를 하고 나가 다시 재억이를 만나 남원으로 향하였다.



6월 9일 토요일 정오쯤 집에 도착하니 형이 안방문을 열어놓고 어머니와 가족들과 찬송가 카세트를 듣고 있었다. 어제 출상이 이미 끝나고 가족들은 한숨 돌리고 있었다. 작은집 전주아주머니가 오시더니 "아이구 어제만 왔어도 아버지 출상을 봤으텐데 오늘에야 왔구나." 하고 울면서 애통해 하셨다. 나는 재억이와 같이 나가 아버님 산소를 참배하고 내려오는데 한없이 눈물이 났다. 평생 어려움 속에서 살다 가신 아버님의 인생을 생각하니 슬픔을 견디기 어려웠다. 오직 자식을 위하여 얼마나 골몰하며 노력하셨던가. 가족들과 하룻밤을 보내고 이틑날 남원에서 재억이는 서울로 올라가고 나는 보병학교로 귀대하였다.


그런데 귀대하자마자 가슴아픈 메모 쪽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R이 나를 면회하러 서울에서 내려 왔었던 것이다. 이렇게도 공교로운 엇갈림이 없었다. 내가 재억이와 같이 외박을 나간  몇시간후에 R은 상무대 정문에 와서 면회를 신청하였던 것이다. 구대에서는 특별한 신고가 없이 정기 외박일에 나간 것이니 저녁에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R은 하릴없이 기다리다가 하룻밤을 광주에서 보내고 힘이빠져 서울로 올라가며 야속함을 전해놓은 메모였다. 나는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그러나 그때만해도 지금처럼 핸드폰도 없었다. 통신이 어려웠던 시절에 약속이 제대로 되지않아 일어난 기구한 엇갈림이니 안타까웠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때는 보병학교 말년이라 고참이 되어 다음 주말 외출일에 다시 R이 내려왔다. 그때야말로 가슴이 터질듯 반갑게 만나 광주에서 하루를 보냈다. 광주관광호텔에서 몇시간을 보냈는데 그때도 우리는 포옹만했지 아무일도 없었다. 결혼하기 전에 잘못하면 큰일이 나는줄 알았다. 저녁 6시쯤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귀경하는 R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송해주고 다시 상무대로 돌아왔다.


시간이 흘러 드디어 6월 25일 보병학교 초등군사반 졸업식 날이 되었다. 4개월간의 지옥같았던 임관후 훈련 과정이 어느새 끝났던 것이다. 대 연병장에서 졸업식을 마치고 구대로 돌아와 각자 자대배치 발령장을 받았다. 나는 소원하던 대로 서울에서 가까운 전진부대로 배치를 받았다. 모두가 해산하며 동기들과 아쉬운 이별의 정을 나누었다. 원이 친구는 월남에서 철수한 맹호부대가 창설된 수도기계화사단으로 가게 되었다. 나는 상무대를 나와 그때 나주 다시면에서 사시는 둘째 누나네 집에 갔다. 이제 자대로가면 언제 볼수 있을지 모르는데 송정리에서 가까우니 다녀 가기로 한것이다.


누나집을 거쳐 남원 집에 가서 어머니를 뵙고 서울로 올라왔다. 김장로님댁에 가 인사를 드리고 며칠동안 거기서 머물기로 했다. 시간이 되는대로 매일 R을 만났다. 7월 1일 101보충대에 집결하여 자대로 배치될 예정이니 남은 휴가는 3일 밖에 되지 않았다. 금쪽같이 아쉬운 시간이 금새 지나가 버리니 출발 하는날 아침에 R이 보충대 앞까지 따라왔다. 이제는 또다시 아쉽게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잘 하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나는 부대를 향하여 들어갔다. 돌아보니 R은 아직 지켜보고 있었다. 애틋한 생각이 들었지만 별수 없이 어서 돌아가라고 손짓하고 부대 안으로 들어갔다.


간단히 집결하여 인원을 확인하고 각 배치될 사단별로 다시 집합하였다. 전진사단에서는 인사참모부에서 버스를 갖고 나와 대기해 있었다. 우리 사단으로 갈 동기들은 30명 정도 되었다. 전진 사단은 육군 최선임 사단으로서 미군 담당 지역을 인수한 지역이라 시설과 장비가 군내 최우선 정예사단이었다. 사단에서 사단 소개와 실무 교육을 간단히 받고 1박한후 다시 각 연대별로 배치가 결정 되었다. 나와 동기들 12명 정도는 쌍용연대로 배치되었다. 다시 연대 인사장교와 함께 연대로 이동하여 연대 소개와 역사및 소대장으로서의 기본 교육을 다시 받았다. 그곳에서 다시 대대로 나눠지니 1대대에 배속되어 최종적으로 중화기중대인 4중대에 도착하였다. 대대 연병장에 쓰리쿼터로 도착하니 각소대의 선임하사 내무반장 당번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중화기중대 1소대 즉, 구경30 기관총소대의 소대장이 되었다. 차에서 내리니 소대 세사람이 경례를 하고 당번병이 얼른 나의 더블빽을 메고 운반하고 선임하사가 인도하여 소대 막사로 들어갔다. 우선 당번병이 오시느라고 힘드셨을텐데 세수를 하시라고 물을 떠다놓고 치약을 칫솔에 발라 들고 서있었다. 보병학교에서 워낙 빡센 훈련을 마치고 온터라 당번병의 깎듯한 수발에 적응이 잘 되지 않고 받기가 어색하였다. 한편 동기생 양희천 소위는 2소대장이 되었다. 서로 의지가 되었다. 중화기 중대는 2개 기관총 소대와 1개 81밀리 박격포 소대로 구성되었다. 중대장은 3사관학교 2기 출신 김정석 대위였다. 중대장에게 신고하고 대대로 올라가 육사 출신 대대장 이동섭 중령에게 신고하였다. 이렇게 파란많은 군생활이 시작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