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여름 방학이 가까운 어느 무더운 일요일에 나는 혼자서 R을 만나러 송학대교회에 찾아갔다. 교회학교 예배가 진행되고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살며시 교회문을 열고 소리없이 뒷자리에 가서 앉았다. 마침 R이 앞에 나가서 이야기를 해주고있는 동화 시간이었다. '묵크의 신발'이라는 얘기를 신나고 재미있게 해주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들어가 앉자 R의 눈이 나를 알아보았는지 표정이 당황하며 갑자기 동화가 꼬이는듯 하였다. 그러나 모든 예배 순서를 잘 마치고 아이들을 돌려 보낸 후엔 둘은 교회를 나왔다.
거리에는 따가운 햇볕이 쏟아지는데 우리는 땀을 훔치며 버스에 올라 태능의 불암산으로 향하였다. 불암산 아래에 도착하여 산길을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이길은 1학년때 생활관 성관에서 호실 등산을 와본 길이라 잘 알고 있었다. 그 호실 등산의 얘기를 R에게 신나게 해주었다. 1년전의 그날은 봄비가 부슬 부슬 내리는 날아었다. 불암산을 올라가고 있는데 어떤 학생들이 큰 뱀을 잡아 놀리고 있었다. 마침 군대에 갔다온 3학년 복학생 형이 "야 너희들 그뱀 이리내 거 위험하다"하고 뱀을 뺏다시피 하였다. 비도 오니 바위밑에 군용 A텐트를 치고 점심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선배가 뱀을 가죽을 쫘악 벗기더니 가저온 칼로 토막을 치는 것이었다. "야 찌개꺼리 좋은거 준비됐다. 하며 코펠에다 뱀토막과 고추장 등을 넣고 알콜 버너에 불을 붙여 찌개를 끓이는 것이었다. 처음엔 징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노란 기름이 둥둥뜬 그 뱀찌개를 선배들이 맛나게 먹으니 나도 따라서 밥과 함께 맛나게 먹었던 것이다.
"그만 해요"하고 R이 징그럽다고 찡그렸다. 그런 얘기를 새살스럾게 나누며 불암산 중턱의 소나무 밭까지 올라갔다. 더웁기도 하니 땀을 훔치며 이정도에서 적당히 쉬다 가기로 하고 그늘진 곳에 둘이서 나란히 앉았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옆의 조그만 소나무를 보니 가지에 징그런 송충이가 붙어 있었다.나는 R을 놀려줄 생각으로 그 송충이 가지를 꺾어 "위 위-" 하고 놀렸다. R은 질겁을 해서 피할려고 얼굴을 피했다. 그런데 그때 눈깜짝할 순간에 송충이가 떯어져 R의 원피스 옷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때 내가 오히려 질겁을 하여 소리를 질렀다. "어떡해 어떡해" 하고 당황 했으나 옷속으로 빠져 들어가버린 송충이를 내가 꺼낼 수도 없고 그져 소리를 지르고 당황할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아래로 좀 내려와 보이지 앉는 곳에 몸을 숨겨 있고 그 동안에 R이 옷을 벗어 겨우 그 징그러운 것을 꺼내개 하였다. 그 일로 그날의 데이트 분위기는 완전히 망쳐버리고 말았다. 모처럼 오랫만에 만나 행복한 시간을 가지려했던 기대가 생각지도 못했던 행동으로 망쳐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1972년 7월 15일 병영훈련 입소를 앞두고 그 전날 R을 만났다. 그날은 우리의 아지트인 관악산 다방까지 가지 못하고 조금 가까운 상도동 숭실대학 근처의 찻집에서 만나 저녁을 먹었다. 방학이 시작된후 나는 제주도 실습으로 R은 경포대에 다녀오고 교회 활동등으로 만나지 못하다가 오랫만에 보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하지만 내일은 병영 훈련 입소일이니 시간도 오래 같이 있지못하고 마음은 긴장 될 뿐이었다. 그래도 R이 힘을 주고 위로를 해주느라고 "잘 다녀 와요. 하나님 믿는 사람인데 다 괜찮을 거예요." 하고 가방에서 조그만 것을 꺼냈다.
4, 5 cm 정도되는 파란 색갈의 오뚜기 였다. "이 오뚜기 처럼 뭐든 다 이겨내고 잘 마치고 오라구요." 하며 내미는 것이었다. 오뚜기의 뚜껑을 열어보라해서 열어보니 속에는 아주 작은 종이 쪽지가 접혀서 들어 있었다. 거기에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3 1:2)' 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가슴이 울컥하는 감격을 느꼈다. 이 조그만 플라스틱 오뚜기에 담긴 R의 마음과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믿음으로 모든 어려운 훈련의 과정을 이기고도 남을 것같은 자신이 생겼다. 긴장과 두려움이 순간에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얼마동안 못본다고 생각하며 헤어지려니 안타까움에 견딜 수가 없었다.
15일 아침이 되어 113 학군단에서 생도들을 태운 버스가 출발 하였다. 이제까지는 학군단 내에서 구대장들을 통하여 군사훈련을 받았지만 이제 1학기때 배운 모든 군사 이론과 훈련들을 현역 사단에 입소하여 현역과 동일한 혹독한 훈련을 받는 것이니만큼 모두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돌았다. 버스는 두시간정도 달려 S읍의 외곽에 위치한 33사단에 도착하였다. 그곳에는 서울과 수도권에 위치한 대학들의 모든 학군단 생도들이 모이니 수백명이 되는 상당한 숫자였다. 구대별 조직에 따라 집합하고 보급품들을 수령하였다. 나는 친구인 김원과 같은 구대에 소속되게 되니 그래도 서로 의지가 되었다.
찌는 듯이 더운 삼복 더위의 날씨가 계속 되었다. 병기학 화기학 등은 실내 교육이니 그래도 견딜만 하지만 전술학은 방어와 공격 전술등 모두 야외 훈련이다. 거기에 주간 야간 훈련도 계속되니 매일 땀에 젖어 탈수를 막기위하여 각소금을 먹곤 하였다. 그 어려운 훈련의 틈틈이 나는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오뚜기를 만져보고 R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입소하며 가지고온 작은 신약 성경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쉬는 시간마다 읽었다. 손때가 묻어 거의 까맣게 된 그 성경은 지금도 집안 어딘가에 있을것이다. 오뚜기와 성경은 그야말로 나의 훈련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야간 전술 훈련때는 검정으로 얼굴을 위장하고 산속에서 강의와 실습을 했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후 나는 그곳이 가끔 생각나 어디였을까하고 그리운 생각이 들었다. 찾아보고 싶었지만 세상이 바뀌어 그 일대는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섰을까. 찾을 수가 없었다.
4주간의 훈련이 절반쯤 지났을때 각 학교에서는 학군단별로 위문단이 왔다. 수박등 시원한 여름과일에 간식을 받고 야외 무대에서 가정대 여학생들과 학생회에서 온 위문단의 공연을 즐겁게 보았다. 그때 한참 유행하던 노래가 '모닥불'이었다. 가정대의 한 여학생이 "모닥불 피워놓고 마주 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인생은 연기속에 재를 남기고 .." 하고 부를때는 R을 보고 싶은 그리운 마음에 가슴이 터질것 같았다. 같은 대학의 여학생이니 마치 R이 와서 부르기나 하는것처럼 느끼는 착각 속에서 노래하는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훈련이 끝나면 저녁 식사후 모두 수양록을 기록한다. 훈련의 내용을 상기하고 스스로의 평가와 각오 등을 주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틈을 내어 R에게 편지도 썼다. 비온후의 무지개를 바라보며 R을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4주간의 힘든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퇴소하는날 우리동기들은 즐거움과 감격의 함성을 지르며 헤어졌다. 우리는 113 학군단 본부로 다시 돌아와 해산하였다.
여름방학은 숨가쁘게 달려 왔지만 아직도 15일 정도가 남아 있었다. 나는 남아있는 후반기 2주간의 농촌 실습을 해야했다. 후반기는 형이 소개해준 경기도 화성 발안의 농장에서 하게 되었다. 지금은 거기가 어디쯤이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아무튼 8월 16일에 수원에서 버스를 타고 츨발하여 지시받은 정류장에서 내렸는데 포장도 되지않은 먼지가 날리는 시골 길이었다. 나는 경기도 내에 이런 산골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산길에서 내려 뙤약볕 아래 한참을 걸어가도 길 물어볼 사람하나 보이지가 않았다. 설마 잘못온건 아니겠지 하고 한동안을 걸어가니 완만한 언덕이 나타나고 목장의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둥그스럼한 언덕들은 사료용의 초지가 조성되어 부드러운 지형으로 보였다.
입구로 들어가서도 한참 걸어가니 목장 건물에 몇분 일하시는 분들이 보였다. 인사를 드리고 실습하러 온 학생이라하니 반갑게 맞아 주셨다. 그곳은 축산 시험장에서 지정한 한우 비육 시범 목장이었다. 비육한우가 많이 사육되고 있었다. 내가 하는일은 동절기 조사료를 위한 목초를 말리고 있었는데 넓은 언덕에 펼쳐져 말리고 있는 목초들을 가끔 한번씩 뒤집어 고루 말리는 일이었다. 별로 힘드는 일은 아닌데 목초를 뒤집다 보면 많은 살찐 개구리들이 더위를 피하여 목초밑에 숨어있는 것이었다. 아저씨들에게 얘기하니 "너는 개구리나 잡아라'하는 것이었다.
양동이 통을 들고 다니며 개구리를 잡아다 드리니 그 아저씨들이 개구리 뒷다리만 껍질을 벗기고 모았다. 일이 끝난후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식당의 굵은 통나무로 만든 식탁에 앉아 개구리 뒷다리를 기름에 튀긴 안주로 막걸리를 마셨다. 천정엔 석유 남포불이 흔들리고 웃통을 벗어 젖힌 아저씨들과 왁자지껄 떠들며 마시는 막걸리판의 분위기는 그렇게 활기찰 수가 없었다. 나는 술은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니지만 아저씨들이 권하니 한사발 정도 마시고 개구리 안주도 먹어 보았다. 특별한 맛은 아니고 닭고기 튀긴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후반기 농촌 실습까지 마치고 나니 어느덧 2학기 개강이 다가오고 있었다.
10월 3일 개천절에 기독학생회 몇사람이서 천마산으로 등산을 가기로 하였다. 나는 R이 꼭 올줄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청량리역에서 경춘선 열차가 떠나는 순간까지 R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너무나 기분이 안좋고 그냥 중단하고 돌아가고만 싶었다. 나의 그런 울화때문이었을까 기차속에서 부랑자들과 시비가 붙었다. 몇번 치고 받는데 나는 그래도 무도로 단련된 몸이니 시비는 겁나지 않았다. 싸움이 끝난후 그들이 물러갔는데 한참후에 다시 나타났다. 사과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믿은것이 나의 순진한 방심이었다. 유리병을 깨서 옷속에 숨겨가지고 온 한놈이 순식간에 나의 손을 찍고 도망가는 것이었다. 나는 피를 흘리며 비좁은 사람들을 헤치고 쫒았으나 그놈은 기차 출입구에서 달리는 기차 바깥으로 뛰어내리고 말았다. 다른 놈들도 눈에 띠지 않았다. 속수 무책으로 마석에서 내려 약국에 들어가 소독약과 붕대를 사서 응급처치를 하고 그래도 혼자 돌아올 수가 없어 계획된 등산 일정을 다 마치고 왔다. 참, 젊은 날에 R을 사랑하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그 울분때문에 흔히 겪어보지 못할 별일도 다 경험 하였다.
2학기 중간 고사가 10월16일에 시작되었다. 첫날 시험을 마치고 수유리의 재억이네 집으로 같이 공부하러 갔다. 저녁을 먹고 한참 공부하고 있다가 "9시 뉴스나 좀 듣고 하자." 하고 허리를 펴며 라디오를 켰다. 그런데 땡하는 시보와 함께 긴장된 목소리로 정부의 발표가 흘러 나왔다. "1972년 10월 17일 부로 국회는 해산하고 모든 정당활동을 중지하며 모든 대학은 무기 휴교에 들어간다 .." 이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비상사태였다. "야 이게 뭔일이냐 어찌된 일일까. 그럼 내일부터 학교도 안가고 시험도 안보는 거잖아?" 재억이와 나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의아해 하였다. 이튿날 학교에 확인해보니 캠퍼스엔 이미 군대가 주둔히였고 학교내에 들어올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갑자기 생활이 중단되고 어찌해야 할 지 모르는 진공상태가 되어 버렸다.
재억이와 며칠간 멍하니 보내다가 이렇게 놀 수는 없다는 생각에 학비라도 마련 하고자 포장마차 장사를 해보기로 의기 투합하였다. 어느 고물상에서 리어카를 싸게 사고 헌 각목 등을 주워다가 둘이서 뚝닥거리며 포장마차를 만들었다. 리어카 네 귀퉁이에 기둥을 세워 지붕처럼 만들고 그위에 포장을 씌우니 그런대로 형태가 나왔다. 리어카위에 판을 만들고 가운데는 구멍을 뚫어 연탄 화덕 자리를 만들었다. 오뎅 그릇등 필요한 모든것을 기본적으로 만들고 수유시장에 나가 장을 봐서 오뎅과 우동국수 닭똥집 과 몇개 안주등을 다 준비하니 장사를 시작하기로 하고 성북구청 앞 넓은 길 대로변으로 끌고나가 개업(?)을 하였다. 손님이 안들어오는 시간에 는 둘이서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니 지나가던 손님들이 들어왔다. 소주와 막걸리도 팔고 국수도 말았다. 그러나 성북구이고 보니 그다지 손님이 많지는 않았다. 어느날 둘이서 상의를 하였다. "야 우리 이왕 할려면 더 크게 만들어서 시내로 진출해보자"하고 결정하였다.
이틑날 부터 장사를 쉬고 리어카 양쪽을 더 달아내아 밑을 받추는 형식으로 세배의 길이로 만들었다. 완성되자 12월초에 어느날 저녁 내가 그 리어카를 접어서 앞에서 끌고 재억이는 뒤에서 밀고 수유시장앞에서부터 출발하여 미아삼거리와 미아리고개를 넘었다. 돈암동과 신설동, 동대문을 지나 을지로 잎구역 계림극장 맞은편 서울의원 앞에까지 도착하였다. 겨울인데도 땀은 흠뻑 젖었지만 아쨌든 을지로 6가 번화가 사람 통행이 많은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매일 점심후 나와 재억이는 근처 중앙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시구문 옆의 포장마차 보관소에서 그날 팔 안주들을 준비하였다. 그 보관소에는 포장마차뿐 아니라 과일장사 엿장사 잡화장사등 수많은 리어카 장사꾼들이 리어카를 보관하고 준비하는 곳이었다. 물론 지금은 자취도 없으며 계림극장과 서울의원도 사라진지 오래이다.
추위는 심해 지는데 매일 장사를 계속하였다. 수입은 괜찮았다. 지금 기억에 마른 국수 한묶음에 200원 정도인데 그 한묶음이면 50원짜리 우동국수 20그릇은 만들수 있었다. 물론 육수 재료 등이 들어가긴 하지만 계산으로는 장사 할만했다. 그런데 문제는 딴데 있었다. 생계를 걸고 하는 가장 어른들은 하루도 쉬는날이 없었다. 그렇게 목숨 걸고 하니 아이들 가르치고 당시 우리 옆에서 과일 장사하던 리어카 아저씨는 집을 두채 샀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그정도 투지가 부족하니 한참 장사하다가 며칠에 한번을 도저히 힘들어서 계속할 수가 없고 쉬게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쉬게되면 준비해논 안주는 모두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 장을 봐서 준비하니 그때까지 번돈을 꽤 써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니 그다지 돈을 벌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어느날 깡패들이 찾아왔다. "야 너희들 누가 여기서 맘대로 장사하랬어. 장사할려면 세금을 내야지" 하고 공갈하며 소위 삥땅을 뜯는 것이었다. 나는 장사를 하고 재억이가 다방으로 그들과 같이 내려가 학생들이라고 사정하고 세금을 깍아서 조금만 내기로 하였다. 모든 노점상들은 그렇게 깡패들에게 세금을 바치고 있었다. 나는 ROTC 1년차이니 단복을 입고 장사를 하는 날이 많았다. 포장마차의 포장 겉면에는 커다란 빨간 글씨로 '젊은이의 양지"라고 우리 포장마차의 이름을 써 놓았다. 기타를 갖다놓고 잠시 손님이 없는 시간에는 둘이서 기타를 치며 화음으로 노래를 부르면 지나가던 사람들, 일차 술마시고 돌아가던 사람들이 포장을 들치고 "여긴 뭐지? 어 학생들이네" 하고 들어와 자리를 잡곤하였다.
어느날 노래를 하고 있는데 어떤 신사분이 들어왔다. "오 학생들이구먼" 하는데 검정 라운드 털 셔츠에 갈색 홈스펀 상의, 사지하의를 멋지게 입은 체격이 좋은 신사분이었다. 소주와 오뎅을 제공하고 한참 다시 노래를 부르는데, 이곳 터주 깡패가 들어와 세금을 내라고 시비를 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손님도 있고하니 난처해서 우물쭈물 거리고 있는데 그 젊은 신사분이 깡패에게 말했다. " 댁은 누구요? 거 학생들이 학비 벌을려고 고생하고 있는데 왜 시비를 거는가?" 히고 굳은 표정으로 말하였다. 우리는 구세주라도 얻은듯이 의지하는 마음으로 두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사분이 "이거 안되겠구만. 당신좀 따라와봐" 하더니 "학생들도 같이와"하고 포장을 걷고 나서더니 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을지로6가 파출소로 우리 모두를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파출소에는 마침 당직하는 순경 한사람이 책상에 앉아 있었다. 신사분은 댓짜고짜 구둣발로 책상을 걷어차더니 " 소장 어디갔나? 어? 이거 근무들을 제대로 하지를 않는구만" 하고 화를 내더니 "경비전화 어떤거야?"하니 당직이 " 예 이겁니다." 하고 가리켰다. 신사는 어디에다 전화를 하는데 불같이 화를 내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 지금 근무를 제대로 하고 있나? 파출소 근무도 개판이구먼. 똑바로 점검해" 하며 수화기를 놓고 당직에게 "난 남산에 있어. 소장 빨리 불러왓" 하고 호통을 치자 잠시후에 파출소장이 들어왔다. "당신이 소장이야? 근무를 하는거야 마는거야?"하고 야단치는데 소장을 죽을 죄를 지은듯이 죄송하다고 빌고 있었다. 신사분이 "이 학생들 말야. 잘 보호해 주도록 해. 내 나중에 다시 확인해 볼테니까. 알았소?" 하고는 우리에게 "힘내서 잘 생활해 학생들" 하고는 나갔다.
우리는 다시 포장마차로 돌아와 장사를 계속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신사분은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서슬 시퍼런 남산 중앙정보부의 장교였다. 그후로는 깡패는 커녕 그 누구도 우리 장사를 훼방 놓지 않았다. 며칠후에 파출소에서 순경이 나와 "그분하고는 어떤 사이십니까?"하고 물었다. 우리는 사실 아무 관계도 아니라 대답 할 말도 없어서 "아니요 뭐 그냥 .." 하고 우물거리고 있는데 순경이 " 암튼 지난번에는 죄송했습니다. 앞으로 무슨일 있으며 즉시 우리에게 알려 주세요. 그리고 그분에게 말씀좀 잘 드려 주십시오." 하고 아주 공손하게 애기하고 가는 것이었다. 참 지금 생각해도 그렇게 고마운 분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신사분 덕분에 장사는 무난히 잘 할 수 있었다. 학교가 다시 개학 한다는 소식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도 지나고 캐롤도 거리에서 사라지니 연말이 다가왔다. 그동안에 R은 전혀 만날 수 없었다. 그래도 여기서 포장마차 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으니 설마 새해가 오기 전에 12월 31일에라도 한번은 와주지 않을까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낮에는 오지 않았다. 아마 마지막 저녁이니 교회에서 무슨 행사때문에 바쁘지 않을까하고 좋게 생각하였다. 저녁이 되었다. 초저녁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너무나 마음이 우울하고 허전하였다. 나에대한 R의 마음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밤 10시가 지났다. 밤 11시가 지났다. 이제 오리라는 기대는 할 수 없었다. 재억이는 혼자 오뎅 화덕 앞에 앉아있는데 나는 한쪽 귀퉁이에 앉아 말없이 소주를 마시기 시작하였다.
재억이도 나의 마음을 아니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 추운 겨울밤 소주 한병을 다 마시고 나니 오히려 더 한기가 들었다. 재억이가 걱정스러운듯이 " 야 그만 마셔라. 그 쪼다가 안오는걸 어떡하냐." 하고 위로하듯 말하였다. 또 한병을 깠다. 나는 본래 술이 받는 체질이 아니니 그때부터는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참을 마시다 엎드려 있던 나는 정신을 잃고 쿵하고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재억이가 깜짝 놀라서 나를 리어카 밑에서 잡아다녀 꺼내 겨우 일으켜 세웠다. 걱정이 되니 장사도 정리하고 보관소에 리어카를 맡긴뒤 겨우 재억이네 집으로 돌아왔다. 세월이 지난 후에 생각해도 그때처럼 R이 원망스럽고 쓸쓸한 적이 없었다.
포장마차 장사를하는 동안 초기에는 재억이네집에서 같이 지냈다. 재억이 어머님은 삼양감리교회 장로님이시고 당시에는 피아노학원을 운영하고 계셨다. 인품이 너무나 자애로우시고 아들의 친구인 나에게 너무나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훗날의 얘기지만 건강 상태가 안좋아지셔서 오랫동안 투병하시다가 내가 시드니의 로슈 태평양지역 본부 근무에 나가있는 동안에 소천 하셨다. 그 자애로운 모습을 더 뵐수 없다는 생각에 슬픔을 금할수없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재억이네서 너무 오래 신세를 지기도 어려워 다시 김효신 장로님 댁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밤12시면 사이렌이 울리고 통행금지 시간이 되었다. 포장마차 장사는 대개 통금시간이 가까워서야 마쳤다.그때서야 황급히 포장마차를 접어서 정리하고 혹시 남은 안주는 내일 장사를 위하여 잘 갈무리를 해놓고 보관소를 나오면 사이렌이 울렸다.
그러나 문제는 그 시간부터 어떻게 집까지 돌아가는냐가 문제였다. 통금시간에는 순찰꾼들이 순찰 각목을 딱 딱 소리나게 치면서 밤새 돌마다녔다. 통금을 위반하여 순찰꾼에게 걸리면 가까울 파출소 유치장에 끌려가 새벽 4시 통금이 해제 될때까지 감금 됐다가 풀려나거나 혹시 술이취해 난동을 부리거나하면 이튿날 아침 철창으로 가려진 이른바 맹꽁이 버스에 태워져 즉결 재판에 넘겨지곤 하였다.
하여간 통금시간이 시작된후에 을지로6가의 포장마차 보관소에서부터 자양동까지 매일 귀가한다는것은 보통일이 아니었다.큰길로 나가면 당연히 순찰꾼들에게 잡히니 순찰꾼이 잘 오지않는 어두운 뒷골목으로 발소리를 내지않고 뛰어야하는 것이었다. 뒷골목으로 성동고등학교 앞을지나 한양대를지나 성동교를 무사히 건너면 거기서부더는 자신 있었다. 뚝섬은 골목이 많으니 뒷골목으로만 뛰고 또 뛰었다. 건국대 후문을 지나 자양초등학교 들어가는 골목까지 오면 거의 집에다왔으니 휴우하고 가뿐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밤고양이처럼 다니는 동안에 아무리 조심한다해도 순찰꾼들과 맞닦뜨린 경우가 여러번 있었다. 그럴때면 잡혀가면 안되니 집방향이고 반대방향이고 가릴것 없이 순찰꾼이 찿기 어려운 어둡고 좁은 골목을 찿아 걸음아 날살려라하고 숨이 넘어 가도록 뛰었다. 귀가 거리가 10킬로 정도 되는데 대개 한시간 정도 걸리었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김장로님댁 철대문을 넘어 살금 살금 소리안나게 방으로 들어가 자곤 하였으니 그 고충은 말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렇게 한밤중에 대문을 넘어 들어가는것도 너무 죄송해서 지속하기가 어려웠다. 궁리끝에 휴교중이라 비어있는 축산대 실습 목장 숙소를 좀 쓰기로 학교에 얘기 하였다. 실습장에는 휴교시에는 학생들은 없고 일하시는 분들이 몆분 계실 뿐이었다. 말이 좋아 숙소지 우사 한켠에 베니아판으로 칸을 막아 놓은 살벌한 곳이었다. 내부에는 정기쳘 형이 사용하면서 만들어놓은 삐그덕거리는 각목 베니어판 침대가 놓여있고 베니어판 위에는 가는다란 코일을 합선시켜 온열침대를 만든것인데 안전장치가 있는것도 아니고 다짜고짜 합선해 놓은것이라 불이라도 날수있는 위험한 것이었지만 그 위에 낡은 군용 담요를 두장 깔고 두장 덮고 잤다.
그런데 좀 면목없는 이야기지만 어떤날 밤 교대생 Y가 포장마차까지 찾아왔다. 바라는 R은 오지않고 난처한 Y가 찾아온 것이다. 그래도 재억이가 좀 배려를 해주어 먼저 들에가 보라하였다. 눈이 엄청나게 퍼붓는 밤이었다. 그날은 시간이 좀 이르나 어디 갈만한데도 없어서 버스를 타고 실습장 내 숙소로 왔다. 그래도 약간의 간식과 함께 따뜻한 커피를 끓여 추위를 녹이게 해준것까지는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 밖을보니 눈이 무릅에 빠지도록 쌓이고 있었다. 실습장은 아주 외진 곳이라 Y 혼자 갈수가 없을것 같았다. Y도 못가겠다고 귀가를 포기했다. 그 폭설의 밤에 거기까지 같이 온게 내 잘못이었다. 어쩔 도리가 없어서 그 베니어 침대에서 하루밤을 같이 새웠다. 다만 나는 책임질수 없는 일은 결단코 하지 않았다. 젊은 혈기에 이를 물고 참았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일잘못되면 R을 만나지 못할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Y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자존심이 상했을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입장을 가릴것도 없이 나의 행동은 부적절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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