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대학 축제는 대학 전체의 가장 큰 연례 행사로서 학술대회 체육대회 음악 페스티벌 쌍쌍파티 등은 전체 종합 대학 수준에서 치뤄지는 대 행사이고 각 단과대학별 행사와 써클별 행사등 3일 동안 수많은 행사들이 치뤄졌다. 5월이면 언제나 수양버들의 무명같은 씨눈이 눈처럼 날리는데 대학의 넘치는 낭만은 우리 모두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행사뿐 아니라 먹을거리들도 곳곳에 야대가 차려져 입맛을 돋구기도 하였다. 건국대의 유명한 풍광인 일감호수내의 작은 섬에는 신록이 우거진 사이에 애드벌룬이 떠오르고 곳곳엔 꽃 장식들도 넘쳐났다.
그 축제가 시작되기 1주일 전에 이번에도 또 추광엽 회장 형이 식당에서 내게 부탁을 하였다. "이번에 말야 축제때 써클별 음악 콩쿨이 펼쳐 지는데 너도 이번에 들어왔으니 그 김애경씨하고 한번 나가보면 어떻겠나. 우리 기독학생회 홍보에 좋은 기회일것같애서"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갑작스런 제안이라 뭐라고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그것도 나혼자가 아니라 두사람이 같이 듀엣을 구성해야 하는거니 상의해봐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노래나 농악등 무대 출연은 간혹하는 일이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다지 겁나는건 아니었다. 그날 오후에 김 후배를 만나 의논하였다. 그쪽도 갑작스런 제안이라 좀 망설이긴 하였지만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여 같이 기독학생회 대표로 출연 하기로 하고 연습 계획을 세웠다.
우선 발표곡은 내가 YMCA에서 가져왔던 '언덕에 서면'으로 정하고 연습은 매일 아침 중앙 도서관앞 숲속에서 만나 하기로 하였다. 둘이 같이 기타를 치면서 부르는 나의 멜로디 파트와 애경의 앨토파트 듀엣이었다. 매일 아침 내가 일찍 식사를 마친후 기타 2대를 가지고 도서관앞 숲으로 가면 애경은 나무 아래에 벌써 와있었다. 당시 집이 상도동이라 567번 버스를 타고 통학하니 시내를 돌고 돌아 시간도 꽤 걸리고 그 시간에 오려면 아침잠을 설치고 일어나 와야 할 것이었다. 우리는 아침시간이라 숲에 사람 그림자도 없으니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열심히 연습하였다.
처음에는 약간 화음이 맞지 앟고 목소리가 튀어나는 부분도 있었으나 날이 갈수록 닦여져서 그런대로 들을만한 곡이 되었다. 어떤 날은 애경이 할머니가 만들어 주셨다고 샌드위치를 가져와서 같이 먹었다. 당시만 해도 그다지 샌드위치를 먹을 기회가 없었던 만큼 식빵 사이에 과일 샐러드와 햄등을 넣은 샌드위치는 신기하고도 맛있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연습하여 괜찬은 음악이 만들어졌을때. 5월 13일 축제의 컨테스트 날이 다가왔다. 장소는 법경대학 2층의 대강당이었다. 우리는 아주 단순하고도 담백한 통기타의 듀엣곡을 준비하였는데 시작하기 전에 강당에 들어가 리허설 하는 모습들을 보니 다들 대단한 보컬들이 많았다.
대부분 헤비메탈에 일렉기타와 베이스를 갖춘 밴드 그룹들이 많았다. 그러니 그 웅장한 폭발사운드와 박진감에 나는 그만 기가 죽어 버리고 말았다. 도저히 경쟁하는 컨테스트라고 하기엔 우리는 너무 초라해 보였다. 연주를 꽤 해보았어도 떨리는 마음을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내가 떠는 것처럼 보이면 신입 1학년인 애경이 더 떨릴것같아 나는 짐짓 용감한체 하였다. "저 친구들하고 우리는 음악의 종류가 다르니까 뭐 긴장 할 것은 없어요. 우리가 연습한대로 그냥 최선을 다해보면 되는 거지요" 하고 사기를 잃지 않도록 했다. 기독학생회의 동료 회원 몇사람도 와서 잘해보라고 용기와 위로를 주었다.
드디어 오후 두시 음악 컨테스트가 개막 되었다. 작열하는 메탈 사운드에 안무까지 하는 팀도 있었다. 대부분 그런 웅장한 타잎의 음악이었었다. 우리는 조용히 우리 차례를 가다렸다. 지루하게 기다린 끝에 드디어 사회자의 멘트가 있었다. "다음은 기독학생회 대표로 나오신 소용순 김애경 두분의 듀엣이 이어 지겠습니다." 우리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무대로 올라갔다. 의자에 둘이서 조용히 앉아 단순한 스타일의 기타 전주를 시작하였다. 지금까지의 웅장하고 시끄러운 음악과는 전혀 다른 조용하고 차분한 화음의 듀엣곡이 흐르니 열광하던 장내는 물을 뿌린듯 아주 조용해 졌다. "밀집 모자 쓰고 언덕에 서면 .. "하고 포크송 타입의 화음이 흐르니 한쪽에서 함성이 일었다. 차분한 첫곡을 부른후에는 좀 신나는 스윙 리듬의 'Hand me down my walking cane'을 노래하였다. 우리는 차분하게 우리가 1주일간 연습한대로 최선을 다했다. 무대를 내려오니 기독학생회의 몇 회원들이 환호의 함성을 질러 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입상은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기독학생회의 존재를 알리고 홍보의 기회가 되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더 다른 팀의 음악을 듣지않고 연주장을 빠져 나와 학생회관 2층의 기독학생 회의실로 돌아왔다. 어느덧 연주의 일도 잊고 즐거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회장과 임원들이 잘하였다고 계속 칭찬해 주었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간 흘렀을때 갑자기 친구 김홍두가 회의실로 뛰어 들어왔다. 흥분된 얼굴로 " 야 용순아 너희들 3등에 입상했어. 빨리 연주장 대강당으로 가봐."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많은 대단한 팀들 중에서 우리가 어떻게 3등을 하였을까 하고 긴가민가 하며 애경과 같이 다시 대강당으로 갔다. 사회자의 부름을 받아 상을 받았다. 아마 대부분의 팀들과 전혀 다른 담백한 포크송의 듀엣화음이 오히려 더 부각 되었나 하는 생각에 고생해서 연습했던 보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회의실로 다시 돌아 오니 모두가 환호를 지르며 축하해 주었다. 대학 전체의 설레는 축제가 갑자기 남의 축제 같지않고 나의 가슴에 로맨스로 다가왔다.
하루의 순서도 대부분 마무리 되어가고 붐비던 캠퍼스 거리도 조용히 어두워져갈때 나와 애경은 교정을 빠져 나왔다. 학교앞 식당에 들어가 맛있는 만두국을 시켜 처음으로 둘이서 저녁을 먹었다. 가슴이 더욱 두근거리고 막힌듯 답답하였다. 저녁을 먹고 나오니 맑던 낮의 하늘이 어두운 먹구름으로 변하고 후두둑 빗방울이 듣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걸음을 재촉하여 화양리 사거리로 걸어나왔다. 그냥 헤어져 집으로 가기에는 좀 서운한 들뜬 기분이 아직도 조금 남아 있었다.
흘낏보니 눈앞 하얀 건물 2층 창문에 가로로 초원다방이라는 간판이 눈에 띠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빗방울도 굵어 지니 그 다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밖은 비바람이 치지만 다방안은 아늑하고 이곳저곳 테이블에서 담소들을 나누고 있었다. 창가의 빈자리를 찾아 둘이 마주보고 앉았다. 사실 우리는 그때까지 서로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개인적인 얘기는 나눌 여유도 없이 노래 연습에만 열중하였기 때문이다. 서로의 어린시절 얘기와 성장할때의 이야기, 교회생활의 이야기, 건국대에 오게된 인연과 과정, 부모님과 가족들의 이야기 등 이야기는 끝이 없이 이어졌다.
어느덧 시간이 늦어진것 같아 밖으로 나오니 빗줄기는 그쳐 있었다. 버스 정류장까지 애경을 바래다주고 버스가 떠나는 걸 보고 성관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런데 나는 그때부터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둘이서 콩쿨에 나가 입상한 것이 계기가 된것인지 나는 마음을 잡기가 어려웠다. 생전 처음 느끼는 감정은 마치 나날이 나의 영혼이 밖으로 빠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 후에도 합창 연습은 해야 하고 연습곡 악보를 선정하여 등사판을 준비하는등 또한 기독학생회의 예배나 행사등 애경을 보아야 하는 경우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 앞에서 점점 말수가 적어지고 침묵의 성향으로 변하여 갔다. 어떤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보기만 하면 그져 가슴이 콱 막히는 것처럼 답답할 뿐이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내 21살의 첫사랑이었던 것이다.
나는 사랑의 열병을 심하게 알았다. 모든 생활은 한치의 틀림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해도 우선 큰일은 밥을 먹지 못하는 것이었다. 가장 가까운 친구 재억이는 눈치를 채고 있었지만 어떻게 해줄 아무런 도움도 없었다. 친구도 그저 말없이 안타까워 할 뿐이었다. 한달이 가고 두달이 가니 나의 몸은 알아보게 훌죽해지고 볼은 파이고 눈은 퀭하니 들어갔다. 체중을 재어보니 68킬로의 체중이 58킬로까지 내려가 있었다. 피골이 상접한것 같았다. 어느날 만난 애경이 말하였다. "요즘 왜 그래요? 어디 아퍼요? 몸이 너무 안된것 같아요."하고 걱정스럽게 묻는 것이었다. 나는 할 말이 없어 잠시 침묵하다가 "그쪽때문에 그래요" 하고 엉겁결에 힘없이 대답하였다. " 예? 나때문에요? 그게 무슨 말이예요? 나때문이라니요?" 하고 그녀는 너무 의외라는듯 반문하는 것이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때문이라고는 커녕 좋아한다고도 말하지 못하였다.
어느날 성관 식당에서 저녁 식사 시간에 친구 재억이와 정기철 형과 같이 앉게 되었다. 정형은 학번은 동기이지만 5년이나 연상으로서 나이 치이가 많이 나니 동기들의 애환이나 어려움을 잘 들어주고 상의해 주기도 하였다. 전남 순천 출신으로 고교를 졸업한후 입대하여 월남전에도 참전한 용사이며 제대후에는 공무원 생활까지 하다가 대학에 들어오게 된 특이한 이력의 형이었다. 후의 얘기지만 정형은 대학 졸업후 모두가 부러워 하는 일본 문부성 장학생에 합격하여 농업계의 세계적 명문인 혹카이도오 대학에 유학하여 모든 학비와 생활비까지 장학금으로 받고 공부하였다. 박사학위까지 마치고 전남대학교의 교수로 귀국하였다.
어떻든 그날 셋이서 식사가 끝나고 내가 밥을 못먹는 것을 본 정형이 걱정하며 재억이에게 말하였다. "야 재가 왜 저러냐 무슨일이 있는거냐? 너는 친한 친구이니 알거 아냐?"하니 재억이도 말하기 난처하여 "좀 그런 일이 있어요." 하고 얼버무리기만 하였다. 정형이 " 야 나가자. 내가 막걸리 한잔 살께" 하고 권유하여 우리 세사람은 학교 앞으로 나와 오른편 구의동쪽 길가에 있는 작은 술집으로 들어갔다.
연탄 화덕이 가운데 있는 서민 분위기의 술집이었다. 몇잔 순배가 돌아간 다음에 정형이 " 야 털어놔 봐라 속이나 좀 시원하게" 하고 재억이와 나 둘 모두에게 말하였다. 우선 재억이가 그간에 학기초부터 있었던 일을 차분히 모두 얘기해 주었다. 재억이 결론은 나를 가리키며 "얘는 좋아하는 그 여자애 때문에 이 지경인데 걔는 그것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정형이 연장 입장에서 재억이에게 소리를 높여 야단을 쳤다. "너는 친구라면서 그래 어떻게 도와 줄 생각도 못했단 말이냐?" 정형 지도하에 우리는 앞으로의 할 일을 정리하였다. 우선 당장 이번 일요일에 애경의 교회를 찾아가기로 결정하였다. 교회는 장승배기의 송학대교회로 나는 잘 모르지만 같은 지역에 있는 성남고등학교를 나온 재억이는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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