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어나 저 강을 건너라

운명과의 해후인가 대학 2학년

Billy Soh 雲 響 2020. 1. 2. 00:04

프렛쉬맨의 긴 겨울방학이 끝나고 21살이 되어 대학 2학년이 되었다. 후배들도 들어오게 되니  막내의 어리광을 부리던 시간도 이제 지나고 말았다. 기숙사 성관에서는 월별로 생일자 파티를 하는경우가 있었는데 저녁엔 다들 바쁘고하니 대개 아침에 하였다. 3월의 첫 생일자 파티에서 재억이 나 또 다른 친구 김용일과 후배 넷이서 남성4중창 축가를 하였는데 곡은 '광명한 아침해가 동산에서 비췰때' 였다. 모두 나름대로 좋은 소리를 가지고 있어서 아름다운 남성4중창의 화음을 이뤘던 추억의 곡이다.


그렇게 서로 취미의 음악활동을 하면서 재억이와 나는 건국대 합창단을 조직해 보자고 의기투합하였다. 1학년때는 선배들이 많기에 차마 주도하기가 어려워 아쉬웠지만 이제 2학년이 되었으니 선후배의 중간이라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언제나 음악을 지도해 주시는 가정대학의 이동욱 음악교수님을 찾아가 우리들의 뜻을 말씀 드렸더니 좋은생각이라하셨다. 우리는 신학기 한달 정도기 지난 4월 초에 'Green Chorus'라고 합창단의 이름을 짓고 재억이와 둘이서 직접 단원모집 포스터를 만들어 단과대학 게시판마다 모두 붙였다.


4월 20일에 가정대학 강당에서 첫모임을 가졌다. 응모는 상상외로 괜찬아 남여 많은 입단 단원들이 모였다. 이동욱 교수님께서 간단한 목적과 취지를 말씀하시고 회장으로 뽑은 재억이가 한마디 하고 총무인 내가 앞으로의 연습 계획과 활동방향을 얘기하였다.  모두 처음 생기는 건국대 정규 합창단이라는데 자부심을 갖고 기대와 의욕이 대단하였다. 곧 중간 고사가 다가오니 시험이 끝난 5월초부터 정규 연습을 하기로 하였다. 4월 26일부터는 중간고사가 시작되어 시험에 열중하였다. 3일째까지 시험이 끝난 28일에 이제 하루만 남아있었으므로 약간은 가벼운 마음으로 저녁 식사후 중앙 도서관으로 갔다. 시험 종료 하루 전인데도 이미 자리가 없어서 빈자리를 찾느라 두리번 거리고 있는데 어떤 여학생이 웃으며 일어서더니 "안녕하세요?" 하고 작은 소리로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언뜻 아는 얼굴이 아니어서 "어 누구시죠?" 하고 엉거주춤 했더니 " 합창단 총무님이시죠?" 하는 것이었다. 


그때야 나는 속으로 아하 합창단원이구나 하고 사람이 많은 도서관 열람실이라 작은 소리로 "안녕하세요? 시험 잘 보세요. 근데 자리가 없네요." 했더니 " 아 그러세요? 마침 잘 됐네요. 저희는 이제 집에 가려구요.  여기 앉으세요" 하니 마침 고맙게 잘되었다. 그 자리에 책을 놓아두고 집에 간다는 그 여학생을 잠시 따라 나갔다. 일감호슷가의 등나무 아래 벤치에 잠시 앉아 대화를 해보니 앨토파트에 들어온 신입생 단원이었다. 사실은 그때까지 중심이 될 여성파트 임원을 아직 정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시험중인것도 잊고 합창단의 임원으로서 역할을 좀 해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확답을 듣지는 못하였지만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고 헤어져 이틑날 시험 까지도 무사히 중간 고사가 끝났다.


나는 재억이와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김애경이라는 그 여학생을 같이 만났다. 의외로 활동성이 대단하고 교회 활동을 통하여 합창 경험이 많을뿐 아니라 합창단에서 가장 중요한 악보 철판을 쓸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는 옛날이니 요즘처럼 모든 자료는 카피를 하는게 아니고 철판 원지에 악보를 그리고 써서 등사판으로 밀어야 하는 것이었다. 아무튼 총무인 나와 악보부장인 그 여학생은 연습할 곡을 선정하고 철판 등사 악보를 준비하고 받고 하는 일 등으로 거의 매일 같이 계속 만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축산대학 기숙사 성관에서는 신학기가 되면 거의 모든 호실들이 호실미팅을 준비한다. 우리 호실은 아마도 내가 주관하여 서울교육대 2학년 여학생들과 호실미팅을 하게되었다. 다섯 사람씩 남여 모두 열 사람인데 여학생들은 모두 전남 광주여고 출신 동창들이었다. 5월 3일에 우리는 기차를 타고 마석으로 야유회 미팅을 나갔는데 차속에서 파트너를 정하였다. 남학생들의 소지품을 모자에 넣어 여학생들이 안보고 손을 넣어 집으면 그 소지품의 주인 남학생이 파트너가 되는 것인데 나와 같이 미팅을 주선한 여학생은 어떻게든 나와 파트너가 되려고하였다. 어떻게했던가 결국은 그렇게 파트너가 정해지게 되었다. 우리는 하루를 야외에서 즐겁게 보냈다. 그러나 나는 선후배가 함께하는 미팅이라 주선하고 레크레이션 등을 진행 하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냈지만 사실은 마음속에 이 미팅에 대하여 그다지 흥미를 갖지 않고 있었다. 하루를 보내면서도 마음속에는 나도 모르게 계속 합창을 같이 주관하는 악보부장 여학생 생각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난 여기서 인연의 안타까운 한계성에 대하여 조금더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5월 3일의 미팅에서 만나게된 파트너인 서울교대의 Y는 그후 거의 매일처럼 생활관으로 찾아왔다. 나는 여전히 저녁에는 알바때문에 바쁜데 Y는 그냥 무작정 와서 저녁에 내가 올때까지 벤치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성관에서 아주 이름이 날 정도였다. 그녀는 명문 전남여고 출신으로 샤프한 성격이었는데 아버지가 이혼도 없이 집을 나가 다른 여자와 살게 된 이후 홀어머니와 살아온 환경이었다. 자기는 살아오면서 무슨일이든 내 생각대로 해보지 않은일이 없다하였다. 모든일은 내맘대로 다 됐다고 한다. 참 대단한 자부심과 자신감이었다. 내가 흡족히 가까이 해주지 않는걸 사람이니 어찌 못느꼈겠는가. 그것에 대한 반작용의 심리와 언젠가는 내게 오게하고말겠다는 자신감으로 들리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 순수한 사랑은 두마음을 가질수 없는 것 아닌가. 계속 오고 먹을 것을 가져오고 정성을 다 하니 나는 정말 민망하고 견디기가 어려웠다. 어느날 용기를 내어 내 마음을 말하였다. " 사실 내가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어떡하나. Y보다 1주일 먼저 만났는데 내 마음을 바꿀수가 없어" 하였다. Y는 그것을 듣고 "그래? 상관 없어요. 뭐 그런일 정도 누가 없겠어요. 괜찮아요 다 내 생각대로 될거예요."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자신감에 좀 황당한 생각도 들었지만 그 이상은 더 어떻게 말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Y는 오늘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내가 싸늘하게 대하면 좀 뜸했다가 좀 지나면 다시 계속 오곤 하였다. 대학생활 내내 그런 상태가 지속 되었지만 나는 더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서울교대팀과 미팅을 한 그 다음날 5월 4일이 기독학생회(SDA)의 단합대회 겸 야유회였다. 중간 고사가 끝난 5월의 대학 축제가 다가오고 거의 모든 써클이나 단체들은 단합대회를 하는 시기였던 것이다. 나는 들뜬 마음으로 합창단 야유회를 마쳤다. 그날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제 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심정으로 마음의 평정심이 점점 기울어갔다. 무엇이라고 확실히 원인을 알수도 없이 가슴이 답답해지곤 했다. 


그무렵 어느날 성관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나오는데 나이 많은 복학생 선배인 추광협 형이 "용순아 얘기좀 하자"하고 나를 붙들었다. SDA 기독학생회에 관한 얘기였다. 들어보니 3학년이된 광협이 형이 이번에 새로 회장을 맡아서 새로 임원진을 구성하는 중이었다. 나는 1학년때 조금 활동을 하였을뿐 그다지 나가지도 못했었는데 이번에 정인걸 김홍두등 우리 동기 축산대생들이 많이 보강되고 나를 이미 친교부장으로 정해 놓았다는 것이었다. 선배의 요청이라 나는 거절하기도 어려워 우물쭈물 하면서 일단 알았다고 하였다. 첫 모임일에 꼭 나오라고 다짐을 하여 나는 며칠후 그 SDA 기독학생회 모임에 나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거기에 합창단 악보부장인 김애경 후배가 나와 있었다. 참 어떻게 이렇게 겹치게 된것인지 나도 김 후배도 어리둥절하였다. 들어본즉 광협이형 호실이 호실미팅을 하였는데 그 대상 여학생들이 김애경 후배의 친구들이었던 모양이었다. 같은 학교도 아니고 이대 숙대 고대등 김 후배의 개인적인 교회 친구들이었던 모양이다. 얼마전 호실미팅을 가는데 김 후배와 친구들이 야외길의 뒤에서 같이 걸어가면서 화음으로 찬송가를 불렀던 모양이다. 이것을 들은 새 기독학생회장 추광협 형이 설득 포섭하여 기독학생 신입생 회원으로 가입시킨 모양이었다.


참 인연도 기묘하게 두 단체에서 만났으니 놀란것은 김 후배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두 단체에서 김 후배와 같이 대학생활이 겹치게 되었다. 합창단 총무와 악보부장만해도 만날일이 많은데 기독학생회까지 함께하니 거의 만나지 않는날이 없을 정도였다. 그해 5월의 며칠간은 짦은 기간에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니 마치 압축된 시간처럼 아주 길게 느껴진다. 거기에 또하나의 사건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바로 5월 대학 축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