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어나 저 강을 건너라

프렛쉬맨의 설렘과 고달픔

Billy Soh 雲 響 2020. 1. 1. 20:56

대학문화중에 적응하기 어려운 것이 신입생 환영회이다. 요즘도 그 잘못된 신고식 때문애 과음하여 신입생이 사망하는 사고가 나기도 하지만 그때는 그 도가 더했을 것이다. 대학 입학한 얼마후 2학년 선배들이 주최하는 신입생 환영회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우리 동기들은 같이 천호동의 어느 지정된 술집으로 갔다. 식사와 함께 술을 마시기 시작하는데 그런 무식한 방법이 없었다. 세수대야만한 대양푼에 소주와 막걸리를 가득채우고 돌아가며 마시는 것이었다.  거기서는 술이 약한 사람이든 누구든 피할 수가 없었다. 술을 마신 사람은 바로 노래를 하여야 한다. 그 방식 음주를 끝도 없이 계속하니 녹초 안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신입생 동기 거의 모두는 인사불성으로 토하고 쓰러졌다. 그것은 일종의 광기 같은것으로 그런 행사를 통해서 얼마나 선후배간 환영과 유대 강화가 되었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아뭏든 나에게는 너무나 맞지 않는 방법이었다.


나는 장로의 아들로서 당연히 교회생활을 하게 되었다 기숙사 성관 바로 뒤에 있었던 자양교회는 50명 정도 되는 작은 교회였다. 김장석 담임 목사님은 정말 자애로운 분이셨다. 그해에 조금 떨어진곳에 바로 교회가 신축되고 부흥되기 시작하니 얼마안가 이백명 정도의 교회가 되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찬양대이니 당연히 자양교회에서도 찬양대로 봉사하였다. 지휘자는 김경천 선생님에 반주자는 경희대 음대를 나오신 손희재 선생님이셨다. 대장님은 강봉균 안수집사님이셨는데 크리스마스에는 건대 앞에 있는 강집사님 댁에서 맛난 간식을 먹으며 밤새워 놀고 새벽에 뜨거운 떡국을 먹은뒤 자양동 일대 교인들 집에 새벽송을 돌며 성탄 찬송을 불렀다. 후에 찬양대장 강집사님 가족은 호주 시드니로 이민을 가셨는데 애석하게도 그곳에서 강집사님은 과로사하고 말았다. 얼마나 슬픈 소식이었던가.


나는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상황이었으므로 어느분이 말씀을 해주셔서 김효신 장로님댁의 동철 동혁 두 아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기숙사에서 저녁을 먹고나면 장로님 댁에 가서 두시간 정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9시에 저녁 점호가 시작되기 전에 돌아왔다. 그리고 점호가 끝나면 내 공부를 하다가 취침하곤 하는 생활이었다. 그런데 오월 축제가 시작될 무렵 어느날 알바에서 돌아오니 경수형이 "야 너 어느 여학생이 면회와서 기다리고 있다. 나가봐라"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일까 하고 나가 봤더니 벤치에서 친구와 같이 와 기다리고 있는건 용규 동생 현희가 아닌가.


나는 몹시 당황하였다. 현희가 찾아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희도 이젠 여고 3학년이었다. 나이 차이도 세살밖에 나지 않으니 쉽게 생각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여친을 교제할 형편이 못되었다. 당장 교비장학생이 떨어지면 지속해 나갈수 없는 학업이 앞에 가로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 후로 한동안 거의 매일이다시피 현희가 찾아왔는데 어느날 나는 정말 진실한 마음으로 내 사정을 얘기하고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얘기하였다. 여름방학 전까지 계속 왔지만 내가 응해줄 시간도 여건도 되지 않으니 서서히 멀어지게 되었다. 아주 먼 훗날 중년이 되어 알게된 얘기지만 현희는 다 피지도 못한 젊은 나이에 아퍼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고교 진학반 동창회인 노송회 모임에서 어느날 친우 용규에게 남들이 없을때 "야, 현희가 죽기전에 용순이 오빠 한번만 보고 싶다고 계속 그랬었다"는 말을 들었을때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친구를 위로할 말이 없었다. 현희는 참 어찌 그리 복도 없었을까. 생각 할 수록 야속한 일이다.


대학 입학 전에 내가 꼭 지속해야되겠다고 결심한것은 태권도와 영어공부였다.  영어공부는 어차피 대학에서도 최우선이라 이런저런 방법으로 지속했지만 태권도의 경우가 좀 아쉬웠다. 기숙사 성관에 강덕원 태권도부라는 것이 있어서 나는 입회하여 방과후 틈을 내어 선배 회원들과 소연병장에서 수련하였다. 그런데 강덕원 태권도의 분위기는 내가 수련해온 오도관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  내가 수련한 오도관 전북 본관에서는 일단 도장에 들어서면 무도인의 분위기가 살벌하였다. 기본 준비운동 시간, 형(요즘은 품세라함)수련, 대련(요즘은 겨루기) 등 수련이 지속되는 시간에는 잡담이나 웃음이나 풀어진 평상시의 태도 등은 절대 해서는 안되는 행동이었다. 오지 예의 염치 체면의 태권도 정신에 충만한 무도인으로서 수련에 집중해야만 되었다.


그런데 강덕원 태권도는 이게 수련인지 장난인지 그저 웃고 대화하며 연습하니 나의 무도 개념에는 전혀 맞지가 않았다. 나는 대련시에는 선후배 구분없이 실전처럼 사정없이 공격하며 기합을 지르는데 다른 선배들이 "야 뭐 그렇게까지 하냐" 하면서 오히려 이상하게 보는 것이었다. 나는 도저히 성미에 맞지가 않아서 점점 나가기가 싫어지고 급기야는 그만둬 버리고 말았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1학년때 그 바쁜중에도 자타의로 열심히 활동하였던 것중의 하나는 농악대였다. 농악대는 전통적으로 축산대의 부서인데 주로 성관 기숙사생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농악의 구성인 징 꽹과리 소고 상모 장구 등이 있지만 나의 전공은 '농자천하지대본'의 농기 밑에서 신나게 불어젖히는 삘릴리라고도 하는 호적이었다. 이 호적이 없으면 아무리 다른 구성이 훌륭해도 마치 앙꼬 없는 찐빵같은 농악이 되는 것이다. 5월 타대학의 축제때, 어린이날 서울시의 동대문 서울운동장 행사때등 많은 행사에 불려 다니며 연주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10월에 중앙대학교에서 있었던 전국 대학생 국악제에 나가 대상 받은 것이었다. 그때는 국악고등학교 호적전공 학생을 불러 지도를 받기도 하고 정말 열심히 매달려 연습하고 준비한 결과였다.


그리고 5월 대학 전체 축제때 축산대 주최의 우유마시기 대회에 나가 빨리 마시기 2등을 했던 일과 대 운동장에서 벌어진 고싸움놀이에 대장으로 나갔던 일이다. 의성 고싸움 놀이를 재현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만드는데 정말 많은 시간과 어려움이 있었다. 수천명의 학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싸움이 벌어졌는데 홍군 대장인 괄괄한 2학년 김수창형에게 눌리고 말았다.


그때 건국대에는 정규 합창단이 없이 부활절이나 추수감사절에 가정대 이동욱 음악교수님의 지도하에 임시로 조직하여 연습하고 발표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행사가 끝나고 나면 해산하는게 보통이었다. 그것도 아직은 프레쉬맨이니 선배들과 함께 합창활동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1학년 부횔절에 연주하였던 '꽃잔치'라는 곡은 시인이셨던 임옥인 가정대 학장님의 작사곡으로 지금도 기억하는 좋은 곡이었다. 음악 좋아하고 기독교 신앙에 열심인 선배중에 3학년 송인규형이 있었다. 이 형은 IVF 멤버로 활동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그 형과 같이 듀엣으로 불렀던 'We are climbing Jacob's ladder (우리는 야곱의 사다리를 오르네)', '길은 멀어도 마음만은' 중에서 'Adios Santore Quiasino' 등은 지금 불러도 비단결처럼 아름다운 화음의 곡들이다. 그런데 인규형은 후에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었다고 들었다.


음악에 대한 갈증이 있어서 주말에는 지금도 있는 종로2가 그 건물  YMCA의 강당에 나가 이요섭씨가 지도하는 싱얼롱 클럽에 참가해 새로 작곡된 노래들을 익혀서 캠퍼스에 돌아와 노래를 좋아하는 친구 재억이와 악보를 프린트 복사하여 나눠주고 친구들과 같이 부르기도 하였다. '어두운 여름밤 강가에 앉아', 바람에 가랑잎 구르는 황혼길에', 오 엘릴루' '생각을 말자', '밀집모자 쓰고 언덕에 서면' 등 그때 보급되었던 주옥같은 노래들이 너무나 많다. 햇빛이 엷어지는 가을날이면 도서관앞 잔디에서 환담을 나누다가 깜빡 잔디에 누워 잠드는 일도 있었다.


드디어 1학기 기말 고사가 끝나고 대학생활의 첫 여름방학이 시작 되었다. 선후배 동기들 모두가 마음이 부풀어 고향으로 내려가거나 각 소속 써클에서 추진하는 농촌 봉사활동을 가기도 하고 형편이 넉넉한 친구들은 여행을 떠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아무데도 갈 형편이 아니었다.  모두가 떠나버린 텅빈 기숙사에서 혼자 며칠을 지내었다. 몇사람 남은 학생들을 위해 식사는 해주었다. 당시 건국대 부지는 얼마나 넓은지 화양동 모진동 자양동 구의동 등 몇개 동에 걸친 수십만평이었다. 어린이 대공원 길 맞은편 정문부터 후문을 지나 축산대 실습장은 오늘날 수많은 아파트와 주택이 밀집되어있는 지역과 한강변 지금의 강북강변도로까지 이어져 있었다. 나는 실습장과 기숙사를 오가며 며칠을 보냈다.


좀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텅빈 기숙사의 각방을 돌아보니 멀정한 타올들과 구두들을 버리고 간게 많았다. 심심풀이 삼아 그 타올들과 쓸만한 발에 맞는 구두 한켤레를 가져와 구두수선장이에게 가져가 굽을 갈고 깨끗이 닦으니 거의 새구두가 되었다. 타올들은 깨끗이 빨아 말려 개키니 아주 쓸만한 것들이었다. 마치 로빈손 크루소가 난파선에서 쓸만한 물건들을 꺼내온 것 같았다. 그 타올들은 나중에 어머니에게 부탁하여 재봉으로 이어서 나의 홑이불을 만들어 쓰니 아주 유용하였다. 그러나 버리곤 간것을 주워서 썼다는 것이 창피한 생각이 들어 그 이야기는 수십년후 집에서 애들에게 "내가 그때 그런 강철 내공으로 살아 이만큼 된것이다"며 지난 얘기를 자랑스러운 교육으로 할 수 있기까지 많은 세월이 흘러야 했다.


여하간 계속 혼자서 기숙사에 있을수도 없어 1주일후 결국은 전주 집을 거쳐 남원 큰누님댁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중2 조카와 친구들을 뫃아 영어를 가르쳤다. 그냥 놀고 즐기기에는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밤이 되면 기타를 가지고 냇가 버드나무 밑에 나가 앉아 깊어가는 여름밤의 애상을 노래로 달래곤 하였다. 그 여름 남원에서의 생활도 또하나의 즐거운 추억중의 하나이다. 두달의 여름방학이 금새 지나 개학이 가까워오니 다시 상경하여 기숙사로 돌아왔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10월 말이 되면 5월의 대학 전체 축제와는 별도로 전통적으로 축산대의 축제인 목동의 밤이 열리곤 했다. 하지만 나는 형편도 여의치않고 여자친구도 없었으므로 그런 축제엔 자연히 스스로 소외되기가 일쑤였다. 1학년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나고 겨울방학이 시작되었다.  나는 짐을 정리하고 수원의 형에게로 내려갔다. 서울대 수의학과를 나오셔서 축산 시험장에 연구관으로 근무하시는 형의 식사를 준비하는 자취를 하고 낮시간에는 혼자서 영어공부를 하거나 보고싶은 책을 보거나 하였다. 점심에는 혼자서 거의 라면을 먹으니 그 겨울방학때 먹은 라면이 두박스 이상 되었다.  그런데 라면도 살이찌는 건지 방학 두달 동안에 얼굴이 빵돌이 처럼 빵빵하게 되었다.


스무살에 갈곳도 아는 사람도 없는 서울에 홀로 올라와 엎치락 뒤치락하고 대학 1학년 프렛쉬맨을 무사히 마치면서 내게 점점 굳어지기 시작하는 결심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악바리 정신이었다. 누구도 도와 줄수 없는 생활 속에서 '내가 지금은 이렇게 힘없고 연약하지만 언젠가 이 서울땅을 내 발아래 두는 날이 있을 것이다'하고 혼자서 다지는 오기와 욕망이었다. 그것이 바람직한 것이었는지 어떤지는 지금 말할 수 없지만 그 정신이 분출하는 에너지가 되어 어떤 어려움도 견뎌 낼수 있는 힘이 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먼 훗날 사회에 진출했을때 나보다 학벌이나 가정 배경이 더 좋았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나름대로의 확고한 위치를 구축하는 두려움 없는 야망의 무기로 발전하였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