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어나 저 강을 건너라

쓰라린 낭인(재수)시절

Billy Soh 雲 響 2019. 12. 26. 11:36

세상에 얼굴도 들수 없는 시기가 재수할때가 아니었을까. 다른 친구들은 대학생이 되어 캠퍼스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나는 낙방한 창피함에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 외로움과 창피함을 잊기 위하여 재수 초기에 엄청나게 태권도에 집중하였다. 오도관 전북 본관에 나가서 정강이 뼈가 부어서 아프고 주먹은 터져서 피가 철철 흐를때까지 샌드백을 차고 치고하였다. 대련(겨루기)을 할때는 눈에 살기가 등등하게 핏발이 서서 붙곤하였으니 태권도에 열중 할때는 아무런 다른 잡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대신 몸은 단단해지고 정신력도 더욱 매섭게 무장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의 고난과 극복의 정신 훈련은 내 평생을 지배하는 내공이 되었다. 그러니 인생은 길고 실패의 경험 또한 꼭 나쁜것만은 아니다. 


그때 일어났던 사건 하나가 정오성이라는 친구와의 사건이었다. 오성이는 진안사거리파라는 조직폭력에 속해있었기에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다.  어느날 밤 나의 절친인 유삼이를 오성이가 불러 어두운 개울가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나는 친구가 걱정되어 멀치감치 거리를 두고 몰래 따라갔다.  전주여고 근처 으슥한 곳으로 친구를 끌고간 오성이는 어둠속 멀리서 보니 친구를 패는 것이었다. 오성이가 깡패 소속이라는 두려움도 생각않고 순간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나갔다. "이자식 -" 하며 물어볼것도 없이 몸을 날려 2단 옆차기로 오성이를 쓰러뜨렸다. 쓰러진 그를 정신없이 두들겨 팼는데 그애가 어떻게 비틀거리고 일어나며 도망가는 것이었다. 어둠속으로 도망 가면서 "너 이새끼 두고보자"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흥분하여 시계도 풀르지 않고 싸웠는지 내 손목 시계가 보이지 않았다. 


유삼이와 나는 풀섶에서 시계를 찾고 있는데 어디로 튀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몇분도 지나지 않은 그순간 어떻게 그렇게 빨리 집합이 되는 것인지 "저새끼들이다" 하고 외치면서 깡패들이 새까맣게 몰려오는 것이었다. 유삼이와 나는 시계고 무엇이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튀기 시작하였였다. 숨이 멎을 듯이 100미터 달리기를 하듯이 뛰고 또 뛰었다. 뒤에서는 깡패들이 새까맣게 쫒아오고 있었다. 잡히면 죽음이었다. 중간쯤에서 나는 유삼이에게 소리쳤다. "넌 저쪽으로 뛰어라" 하고 우리는 갈림길에서 갈라져 도망갔다. 얼마를 뛰었는지도 모른다. 정신도 없이 뛰다가 뒤돌아 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뛰기를 멈추고 생각하니 겁이 나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내가 무도를 한다고 하나 깡패집단을 건드린 것은 감당하게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겁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집에까지 돌아가 잠을 자려했지만 잠을 이룰수 없었다. 날이 새면 깡패들이 집에까지 몰려 올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새벽같이 일어나 운동하는 오도관 본괸으로 갔다. 송사범님은 나의 무도 스승이기도 하시지만 전주지역에서는 누구나 알고있는 유명한 무도인이시기 때문에 도움을 받는게 상책이라고 생각하였다. 새벽에 일어나신 사범님이 하도 의아해서  "아니 니가 이 새벽에 웬일이냐"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어제 밤에 일어난 일의 지초지종을 말씀드렸다. "그래? 걔네 집을 아느냐?"하고 오성이네 집을 물으셨다. "네 알아요"  하고 말씀드린뒤 사범님을 모시고 오성이네 집으로 향하였다. 집앞에 이르러 "오성아 - "하고 부르자 잠결에 일어난 오성이가 "어?  이새끼 -" 하면서 달려 나오는 것이었다. 손에는 잡히는 대로 쇠꼬챙이가 들려있었다.. 대문을 벌컥 열고 뛰어 나올때 나는 슬쩍 사범님 뒤로 피하였다. 사범님의 우람한 체구가 앞을 막자 오성이도 깜짝놀라 뒤로 물러서며. "어 - 사범님이 웬일 이세요?"하고 주춤하며 당황하는 눈치였다. 사범님이 육중한 목소리로 "너희들 둘다 알만한 친구들인데 왜 싸우고 그러느냐?"하고 물으시니 그 묵직한 포스앞에서 우리는 둘다 목소리를 낮추고 "아닙니다. 어떻게 하다보니 그렇게 된겁니다."하고 우물쭈물 하였다. "이리와 너희 둘다. 앞으로 또 싸우겠느냐? 사과하고 지내겠느냐?" 물어보실때 우리는 둘다 싸우겠다고 말할 상황이 아니었다.  둘다 "사과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니 "둘다 이리와. 손잡아. 앞으로 너희 둘 만일에 싸웠다는 소리가 들리면 안된다. 알겠어?"하고 다짐을 두시는 사범님 앞에서 우리 둘은 억지로 사과를 하였다. 그러나 억지로라고 해도 전주 사회에서 송사범님의 지시를 어길 수는 없다는 것을 둘다 알고 있었다. 그 후로 우리는 거리에서 마주쳐도 서로 얼굴을 돌리고 피하는 사이가 되었다. 다시 부딪쳐 봤자 서로 좋을 일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친구 유삼이도 더이상 깡패들에게 불려가는 일은 없었다.


그후에도 매일 태권도에 미치도록 매진하였으나 호남지역 선수권대회에 나가 결승에서 패한 일이 계기가 되어 태권도의 수련 시간과 정도를 조금 낮추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입 낭인으로서 공부도 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절에 몰두하였던 태권도와  그 정신력 훈련은 평생을 살아가면서 나에게 유익한 영향을 수없이 미쳤다.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인내와 정신력을 기르게 된것이었다. 그 1년의 시간들은 어찌 그리 빠르게 지나갔는지 금방 여름이 지나고 낙엽이 지고 다시 겨울이 되니 대학 입학 시험일이 다가왔다. 나는 다시 전기 시험에 실패하니 아버지께서는 후기 건국대학교에 응시하기를 바라셨다.  아버지 몸은 아프시고 더 좋은 학교를 가기 위해 뒷바라지할 집안의 여력도 없을뿐아니라 건국대학교는 아버지가 일보시는 전국농업기술자협회와 직접 관련된 학교였기 때문이다. 전국농업기술자협회는 전술한 바도 있지만 건국대학교의 설립자이신 유석창 박사가 한국농업의 미래비젼을 바라보며 이끄시는 조직이었다.  나는 상의끝에 건국대학교의 상징과도 같은 축산대학에 응시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