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어나 저 강을 건너라

대학 입시 상경길과 캠퍼스 생활의 시작

Billy Soh 雲 響 2020. 1. 1. 20:50

1월 어느날 나는 건국대학교 축산대학에 입학 시험을 치르기 위해 밤 완행열차를 타고 전주역을 출발 하였다. 밤새 모든 역마다 다 쉬고 달려온 열차가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일제시대에 지어진 빨간 벽돌의 서울역사는 신기하기만 하였고 1층에는 고급 그릴이 있었다. 역전 광장에도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나는 서울에 머물수 있는 친척 한사람도 없었으므로 겨우 연락해둔대로 친구 최용규네 자취방을 찾아갔다. 용규는 같은 진학반 친구로서 단짝 친구는 아니었지만 2년간 같이 공부한 사이로 첫해에 한양대 공대에 합격하여 이미 대학 생활을 하고 있었다. 물어 물어 버스를 타고 한양대 앞에서 내려 주소를 가지고 찿아가는데 길은 질퍽 질퍽한 진창 길이었다. 산동네 길을 올라가 어느 주택을 찾아 용규를 부르니 잘왔다 어서와 하고 친구가 맞아 주었다. 용규 친구는 예나 지금이나 마음이 착하고 모든 친구들에게 잘해주는 좋은 친구이다.


요즘 시대 같으면 그렇게 폐를 끼치기가 어려웠을것이다. 왜냐하면 친구는 단칸 방에서 한양여고 2학년에 재학중인 여동생과 같이 자취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운 시절이었다고는 해도 시골에서 올라온 친구란 친구들은 대개 용규 집에서 폐를 끼쳤다. 먹고 자고 1주일씩 있다가 고맙다는 말도 안하고 가버리는 친구가 많았다.  나는 사정이 어려워 친구집에 머물며 입학시험을 치뤘지만 그 미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더구나 거기다 다큰 처녀 여동생까지 있으니 안절부절이었다. 거기서 먹고 자고 건국대에 가서 시험을 치르는데 버스비라도 아끼려고 걸어 다녔다. 한양대 뒷쪽으로 산비탈 길을 내려가 살곶이 다리를 건너서 무허가 판자집으로 빈틈없이 꽉 들어찬 판자집 뚝방촌을 지나 화양리 사거리를 지나 모진동 건국대까지 오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그 추운 겨울 이른 아침에 쪽방촌 길을 걸어가노라면 공중변소 앞에 길게 동네 사람들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허가 판자집촌 각집엔 변소가 없으므로 판자로 얼기설기 만든 공중변소에서 아저씨 어줌마 할아버지 아가씨 할것없이 일을 봐야 하는 것이었다. 틈새기 삐긋한 밖에서는 줄을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으므로 미안해서 시원하게 오래 쓸 수도 없었다. 그런 광경이 불과 엊그제 같은 시절의 일이니 그리 오래 전도 아니다. 풍요의 세대에 태어난 요즘의 젊은 사람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광경일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에는 뚝방길에서 내려와 큰길로 나가는 공터를 지나가는데 무엇이 가마니로 덮여 있었다. 뭔가 하고 옆을 지나다 보니 시커멓게 언 발목이 가마니 바깥으로 나와 있었다. 어제밤 동사한 사람의 시신이었다. 그래도 아침일찍 누가 가마니나마 덮어준 것이었다.


그렇게 며칠간의 시험을 마치고 내려갈때 용규친구에게 너무 고맙고 미안했다. 쌀 두말을 사서 넣어주고 돌아서니 용규가 '야 지금까지 여기 와서 얼마가 됐던 쌀 사 놓고 가는건 니가 처음이다"하며 오히려 고맙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이친구 저친구가 와서 무료숙식 폐를 끼치고 갔는지 알만한 일이었다. 나는 동생 현희에게도 너무 미안하고 고맙다고 인사를 한뒤 서울역으로 향하였다.


나는 다행히 건국대학교 축산대학에 합격하였다. 당시 이 대학은 일부에서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보다도 낫다고하는 평이 있을정도록 농업 엘리트를 양성하기 위한 특수 대학이었다. 대부분이 전액 교비 장학생에 전원 생활관에 들어가 생활비까지 지원받고 생활하며 선후배 기수간 군기가 육군사관학교는 저리가라였다.


스무살 3월2일에 입학식에 참석하고 캠퍼스 생활을 시작하였다. 건국대에는 생활관이 두개가 있었다. 성관에는 축산대학생 전원이 입소하고 신관에는 그 나머지 다른 단과대학생중 지방출신 희망자들이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성관 216호에 배정되었는데 나이많은 군대 복학생 4학년 형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고 3학년 김영수 형은 건국대 KUSA 회장이었고 2학년이 둘인데 경기고 출신의 이경수 형과 부산고 출신의 박홍렬 형에 나 이렇게 다섯명이었다. 생활관의 1층은 바라크형 2층 침대이고 2층은 다다미 방이었다. 1층 계단에는 무인 판매점이 있었다. 필요한 문구류나 간단한 생활용품이 있었는데 학생들이 자유롭게 물건에 적힌 가격표의 돈을 서랍속에 넣고 물건을 가져가는 것이었다. 이 무인판매점은 축산대와 성관의 명예와 자존심이었다,


성관 생활은 엄격하고 매일 저녁 9시에는 점호가 있어서 주번사관이 점호를 취하니 거의 군대식이었다. 선후배간 군기가 해이해진 사건이 발생하거나 학교의 큰행사가 있기전에는 한 밤중에 CPX라고하는 비상 훈련이 있었다. 밤중에 귀가 찢어지듯 비상벨이 울리면 신속히 일어나 운동장에 집합하여 점검하고 비상 훈련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 빠졌거나 기숙사에 부재했던 사람은 물론 후에 큰 곤욕을 치루는건 당연한 일이었다. 비상이 아닌때에도 일요일을 제외한 평일에는 아침 6시에 전원 기상하여 집합해 도수체조를 하고 구보를 하여 체력을 강하게 하는 식의 생활이었다.


나는 형이 지시한 " 너 대학 1학년 동안에 영어는 완전히 끝내라"는 엄명도 있고하여 처음에는 써클(요즘은 동아리라나^^)은 영어회화클럽만 등록하였다.  그러나 엄격한 생활 중에도 캠퍼스 생활을 최대한 즐기고 싶은 욕망도 있어서 차츰 여러가지 친목이나 봉사써클에도 가입하게 되었다. 영어회화클럽, 기독학생회, KUSA, UNSA. MRA 등 잡화점 가입을 하였으나 결국 1학기가 끝나는 여름방학 무렵에는 영어회화클럽만 나가게 되었다. 1주일에 한번 정도 모이는 클럽 모임은 영어로만 대화 하였으며 영어 팝송이나 포크송 등을 부르고 그 가사를 공부하기도 하는 그런 재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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