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전주상업고등학교 교육의 목표는 취업이었다. 나 자신도 그런 편이었지만 대개 집안형편이 넉넉치 않은 경우가 많았으므로 대학 진학 보다는 고교 졸업과 동시에 은행등에 취업하여 집안에 도움이 되려는 친구들이 더 많았다. 시중의 각 은행에는 많은 선배들이 이미 취업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나도 아버지도 그길을 생각하며 이 학교에 입학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2학년에 올라갈 시점에 학교 정책에 변화가 생겼다. 전체 6개 반중 한반을 진학반으로 편성하여 대학 입학 준비를 교육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2개반은 은행반으로 은행 취업을 목표로 하고 나머지 3개반은 사회반으로 사회진출을 준비하는 것으로 교육 목표를 세분화 한것이었다.
이 통지를 받은 아버지는 갈등를 하시었다. 큰 자식은 서울대학교를 나왔는데 둘째 아들은 형편상 취업하기를 바라 왔지만 막상 진학반이 편성된다고 하니까 마음이 흔들리시는 것이었다. 그래도 어떻게라도 둘째 자식을 대학에 보내야하지 않겠나 하시며 지원을 해 보라는 것이었다. 다행히 나는 진학반에 들어가게 되어 1학년때 배우던 주산 부기등의 취업 과목은 없어지고 영어 수학 국어를 중심으로한 대학 진학 과목에 집중하게 되었다.
1학년때 친했던 4인방중 태술이가 애석하게도 물놀이에서 익사하여 먼저 간후에 종준이 유삼이 나 셋은 같이 진학반에 들어가게 되어 여전히 친하게 생활 하였다. 종준이는 체구는 우리 둘보다 적지만 단단한 상체 스타일이고 우리 둘보다 한살 위였으므로 대개는 우리 둘을 리드하는 역할이었다. 거기에 두 형이 다 고대 상대에 다니고 있어 대학생활에 대한 정보도 많았다. 어두운 여름밤이면 우리는 학교의 푸라타나스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불확실한 미래의 얘기들을 수도 없이 나누곤하였다. 우리 집은 바로 학교 앞에 있는 성동교회의 사택이었다. 크리스마스때는 유삼이와 교회에서 같이 지내기도 하였다.
고교시절 부활절이 되면 언제나 아버지와 새벽 예배를 드리러 갔다. '무덤에 머물러 예수내 구주' 찬송가를 부르는 부활절 새벽 연합예배는 언제나 산중턱에 있는 기전여자고등학교 교정에서 드렸다. 고1때 살던 기린봉 밑 인봉리에서 전주시 반대쪽인 신흥고등학교까지는 꽤 먼 거리였지만 아버지의 믿음을 따라 언제나 갔었다. "너의 앞길이 창창한데 부활절 새벽예배는 빠지지 말고 가서 기도를 드려야지." 하고 아버지는 언제나 말씀 하셨던 것이다. 고2때부터는 남노송동에서 아버지를 따라 그렇게 새벽에 가서 예배를 드렸는데 나는 내 아이들이 성장할때 그렇게 드리지 못했던 것은 언제나 나의 아픈 부분으로 남아있다.
고2때의 담임선생님은 화학을 담당하시는 김종주 선생님이셨다. 50대 연세로 진학과목의 학력을 높이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셨다. 급훈이 "항시 책을 손에" 였는데 어찌 됐던 이 급훈 한마디는 지금까지도 나의 평생에 영향을 미치는 한마디가 되었다. 공부를 얼마나 하든 안하든 어떤 책이됐든지 문고판 책 한권이라도 언제나 몸안에 갖고있는 습관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선생님의 주목을 받는 학생은 아니었다. 성적은 중상위권은 되었지만 나이도 어린편이고 이렇다 할만한 특기도 없었기때문에 선생님의 눈길과 관심은 나를 지나쳐 나이나 성적면에서 반을 리드하는 친구들에게로 향했던 것이다. 선생님에게 주목을 받지못했던 그런 면은 고3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보다 더 미래의 얘기지만 대학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어떤 면에서도 선생님의 관심을 끌만한 면이 있는건 아니었고 그저 뭐든 혼자서 하는 체질이었나 보다. 그러니 나는 스승의 날이 오면 특별히 생각나는 선생님이 없다. 물론 내가 부족해서 그랬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때의 선생님들에게 원망 비슷한 섭섭한 마음이 솟는것도 인지상정으로서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 그 시절에 선생님의 주목을 받고 생활하였던 친구들 중에 성인이 되어 이렇다할 두각을 보인 친구는 없었다. 아직도 철없는 외람된 생각일지 모르지만 성인이 된후에 그리고 더 지나 나이가 들어 현역 생활에서 은퇴할 무렵에 당시의 우리 진학반 출신들의 위치나 성과를 비교해 보니 물론 세속적인 성공의 의미이지만 어떤 친구에게도 나는 뒤처저있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그때의 선생님들이 나의 잠재력을 발견해 주지 못하고 겉으로 번지르르한 친구들에게 주목했던가하고 원망의 마음이 생겼던 것이다. 어린시절 어떤 선생님인가가 나의 잠재력을 발견해서 동기부여 해 줬더라면 내가 더 훌륭한 상태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물론 내가 생각해도 좀 치기어린 생각이라고 느끼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고2시절에 생각나는 추억은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을때이다. 그때의 설악산 단풍과 신흥사 비룡폭포 비선대 울산바위 등은 즐거운 추억이 서린 곳이다. 이제는 직업상 그곳을 자주 찾기도 하지만 언제나 옛날 생각에 젖곤 한다. 또한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고교시절에도 음악을 무척 좋아하였다. 등교시에 교내방송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성자의 행진'등이 브라스 연주곡으로서 힘차게 흘러 나오면 나도 모르게 온몸에 활기가 솟는듯하였다. 또한 하교시에는 '솔베이지의 노래', '타이스의 명상곡' 등이 자주 흘러나오곤 했는데 한없는 감상과 알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솟곤 하였다. 언젠가 음악 시간에는 가창 시험이 있었는데 지정곡은 포스터의 'Beautiful Dreamer(꿈꾸는 가인)'이었다. 모든 친구들이 우리말 가사로 불렀는데 나는 혼자 연습하여 영어로 불렀다. 친구들이 장난스럽게 "에~~" 하고 야유의 목소리도 나왔지만 그때부터 어학엔 좀 튀는 성격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고3이 되어 공부는 더 힘들어지고 성과는 생각처럼 오르지 않았다. 우리는 여름 방학도 없었다. 요즘처럼 에어컨은 커녕 선풍기도 없는 교실에서 삼복 여름을 공부하며 보냈다. 그리고 개학이 며칠 남지않은 8월 마지막 주말에 보충수업을 마치고 우리반 전체가 마그내 다리 냇가로 하루 놀러 나갔다. 성과도 잘 오르지 않는 공부에 스트레스를 받았던건 우리 학생들 뿐만 아니라 박노철 담임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 학생 모두가 술에 취해서 물살도 센 개울 강가에서 물에 떠내려 가기도 하였다.
가을이 되자 종준이는 집에서 공부를 하고 유삼이와 나는 전주 공보관 사거리의 사립도서실에 서 같이 공부하게 되었다. 칸막이가 된 한칸에서 공부하는데 같은 방에는 여고 재수생 누나가 두사람이 있었다. 그땐 그 누나들이 얼마나 멋있게 보였던가. 어느 눈내리는 겨울밤에 그 중 한 누나가 영화를 보여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 누나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이 나진 않는데 그 영화의 제목은 이브 몽땅 주연의 '파리의 정사'였다. 그 장면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나 공부를 어떻게 하였는지 나는 대학 진학에 실패하고 말았다. 3년의 고교생활이 그렇게 쓰라린 결과로 끝나고 만것이었다. 못난 나였다. 나는 모든것이 너무나 챙피하여 고교 졸업식에도 나가지 않고 방안에 웅크리고만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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