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어나 저 강을 건너라

고등학교에 입학하다.

Billy Soh 雲 響 2019. 12. 10. 15:14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우리 집안 형편은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 실패에 건강까지 약해지시게 되니 집안엔 어려운 분위기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장의 강한 책임감으로 기독교 신앙을 가르치시고 전주에 직장도 구하시게 되었다. 직장은 강경래 전주북중학교 선생님의 소개로 가시게 되었다.


강경래 선생님의 아버지는 산 넘어 사매면 꽃정이(화정리)에 사시며 오랫동안 우리 집안의 궂은 일을 도와주시고 어렵게 사셨지만 아들을 가르치셔서 강 선생님은 공주 사범대학을 나와 명문 전주북중학교에 교직으로 계셨던 것이다. 또한 그때는 그런 겸직이 가능했었는지 강선생님은 건국대학교 설립자 이사장이신 유석창 박사가 한국농업의 미래상을 내걸고 창립하신 '전국 농업 기술자 협회' 전북 지부장을 맡고 계셨다.


아버지는 그 '전국 농업 기술자 협회 전북지부'의 사무장으로 일하게 되셔서 전주로 가셨다. 숙소는 강경래 선생님 댁에서 같이 지내시고 사무실은 전주시 남문통에 있는 우리종묘사였다. 우리종묘사의 소인석 사장님은 큰 사업을 하시며 전라북도에서는 아마도 가장 큰 종묘사를 경영하고 계셨다. 종씨로서 우리 집안보다 항열이 높으시니 사석에서는 대부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전북 지부 사무장 겸 그곳 종묘사의 일도 보시게 된것이다. 종묘사의 거래 영업이 전북에 다 산재돼 있으니 아버지는 소도시 거래처의 영업 일을 맡아 보셨다.


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아버지 말씀에 따라 기독교 미션스쿨인 신흥고등학교에 입학 시험을 치뤄 합격하였다. 그리고 후기인 전주상고에도 시험을 쳐서 합격하였는데 아버지께서는 집안형편도 어려우니 대학 진학을 하지말고 고교 졸업후 은행 등에 취직하여 집안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셨다. 나는 아버지 말씀에 따라 인문고인 신흥고등학교를 포기하고 전주상고에 진학하게 되었다. 입학과 함께 강경래 선생님의 집을 나와 기린봉 밑의 인봉리에 셋방을 얻어 아버지와 자취를 하게 되었다. 학교까지는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었다.


집 뒷쪽으로는 기린봉이 높이 솟아 있었다. 그 일대는 지하수가 귀하여 우물물이 잘 나오지 않았다. 새벽이나 밤중에 집앞에 있는 공동우물 물을 두레박으로 길어야 하는데 남이 먼져 길어가 버리면 탁한 흙물이나 차지 되었었다. 그런 날은 어쩔 수 없이 물을 가라 앉혀서 사용 할 수밖에 없었다. 집앞은 파밭과 당근밭이 펼쳐져 있고 건너편 언덕에는 절이 있어 아침 저녁으로는 종소리와 예불소리가 집까지도 들리었다. 휴일이면 친한 친구인 전종준 권태술 신유삼과 같이 기린봉에 오르며 티없는 소년들의 미래얘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침잠이 많으니 아침 식사는 아버지가 준비하시고 저녁 식사는 내가 준비하였다가 아버지가 퇴근해 오시면 차려 드렸다. 부식거리는 어머니가 밑반찬을 준비해 주신것과 간단한 된장국을 내가 끓이기도 하였다. 그 집은 방이 두칸이고 큰방은 주인집이고 윗방이 우리 방인데 우리방은 따로 불을 넣는것이 아니라 부억이 하나뿐이니 아랫방에서 땐 연탄불의 온기가 약간 윗방까지 올라오는 정도였다. 마루는 중간을 막아놓아서 비가오면 아버지가 사오신 미군용 중고 석유 곤로로 마루에서 밥을하고 날씨가 좋을때는 석유 냄새가 나는 곤로를 토방위에 놓고 취사하였다.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유도를 시키셨다. 하교후에 도장으로 가서 유도를 배웠는데 나는 체격이 유도체격이 아닌 마른 타입이라 겨루기에서는 언제나 밑에 깔리기가 일쑤였다. 점점 재미가 없어져서 한동안 하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그후에 다시 태권도를 하게 되었는데 이건 내 체질에 딱 맞아서 그야말로 일취월장 훨훨 날며 재미있게 운동하였었다. 형편이 어려우니 가을이면 집근처 무우밭에가서 무우를 뽑아 잘라버린 이파리를  주워다가 시래기 된장국을 끓이기도 하였는데 그 이파리가 생것이라 얼마나 억센지 지금도 질깃질깃한 그 느낌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던 10월 어느날이었다. 학교가 끝날 무렵에 교실로 급한 전갈이 왔다.  아버지가 교통사고가 나셔서 중앙외과로 가셨다는 것이었다. 다른 가족도 없이 아버지와 둘이서만 지내는 나는 누구에게 말할 사람도 없이 가슴만 철렁하였다. 병원으로 달려가면서 부디 아버지가 살아계시기만을 빌었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가시다가 버스에 치었는데 목격자분 얘기를 들으니 자전거와 함께 몇미터를 붕 날아가서 떨어졌다 한다. 정말 고난도 많으신 아버지셨다. 생명을 잃으실 정도는 아니었지만 상당한 중상이셨다. 곧바로 어머니에게 연락하여 놀란 어머니가 남원에서 오시고 그때부터 긴 병원 생활이 시작 되셨다. 아버지는 이러한 몇차례의 사고로 인하여 속으로 골병이 드신 것인지 그 후에는 외상이 나으신 후에도 신장등 내장 기관이 엉망이 되어 몸 전체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시는 상태가 되셨다.


병원에서 어머니가 해 주시는 밥을 먹고 등교하기도 하였는데 어느덧 계절은 지나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아버지가 치료중이시긴 하지만 우리는 친구들과 같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같이 놀기로 하였다. 덕진에 있는 김광수네 집에  신유삼 전신기 나 이렇게 넷이서 모여 노래도 하고 술을 마시며 놀았다. 아직 어린것들이 무슨 술맛을 안다고 어른 흉내를 내며 노니 얼마 후에는 모두 곯아 떨어지고 말았다. 이틑날 점심때나 되어서 중앙외과 병원으로 돌아오니 아니 어딜 갔다 이제 오는거냐 고 나무라시는 어머니 말씀도 귓등으로 들으며 다시 잠에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