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어나 저 강을 건너라

나의 중학교 시절

Billy Soh 雲 響 2019. 12. 8. 19:59

즐거운 추억의 시절 초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우리 나이로 13살에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모든 환경이 바뀌고 새로워지니 마음이 설레고 기대되기도 하였다. 조그마한 초등학교와는 다르게 교내에 문방구 학용품이나 간단한 간식까지 파는 매점이 있는것이 신기하였다. 어느날 매점에 갔을때 책에서만 보았던 불룩 불룩한 식빵이 막 구워져 나오는데 그 냄새가 너무나 맛있고 신기하였다. 식빵이란것은 책에서 그림으로나 보았지 실제로 본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식빵이 너무나 먹어보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서 사먹을 수가 없으니 그것을 사먹는 고등학생 형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여러 과목 중에서 나는 수학이 약하여 언제나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입학전에 알파벳을 익히고 들어간 첫 영어 수업은 정말 환상 같았다. 이길덕 영어 선생님은 키가크고 체격이 미국사람처럼 아주 좋은신데 당시 Voice of America(미국의 소리 방송)에 아나운서로 근무하시다가 우리학교로 오신 선생님이셨다. 목소리는 멋진 바라톤에다가 발음은 완전히 미국 사람하고 똑같았다. 버터를 바른듯 넘어가는 그 영어 발음이 얼마나 멋있었는지 나는 완전히 반하고 말았다. 형의 영어와 아버지의 일어 영향으로 어학에는 관심이 있었는데, 더구나 그 영어선생님때문에 나는 다른 공부는 하기 싫어해도 영어는 좋아하였다.


하지만 영어가 어디 그리 쉬운것인가. 기초를 단단히 하려고 겨울방학에 형에게 소위 과외를 받게 되었다. 안현필의 '영어실력 기초'를 형이 사오셔서 그 책으로 매일 저녁 형에게 영어를 배우는데 진도를 완전히 소화하고 익혀 나가야만 했다. 매일 연습문제를 풀고 형의 수업을 받아도 또 틀리고 모르는것이 나오기도 하니 형에게는 가차없이 야단을 맞아가며 눈물을 흘리고 공부 하였다.  그러나 그 책 한권을 끝까지 떼고 났을때 영어의 기초는 단단히 다져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집에서 학교까지가 4킬로 거리이며 우리들은 철길을 따라 걸으며 통학하곤 하였다. 등 하교 시에 걸을때는 가방을 오른팔에 걸고 왼손에는 조그마한 단어장을 들고 외우며 걸어가는것이  습관이었다. 2학년때에는 가끔 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도 하였는데 한번은 향교리 낭떠러지에서 버스를 피하여 갓길로 가다가 거의 떨어질뻔한적이 있었다. 어른이 된뒤에도 그 곳을 지날때면 언제나 그때의 아찔했던 위험이 기억 나곤 하였다.


친한 친구 박두모는 후에 서울은행에 입사하여 뱅크맨이 되었다. 우리보다 키가 크고 나이도 많았던 김도현이는 성적이 아주 우수하였는데 집안이 어려워 그만 고등학교 진학을 못하고 말았다. 도현이는 문학에도 아주 심취하여 당시 춘원 이광수의 소설들을 탐독하기도 하였다. 자기는 학교에 가지않고 혼자 공부하여 소설가가 될것이라고 언제나 말했었는데 중학교 졸업하며 헤어진후 단 한번도 소식을 듣지 못하였으니 가끔 우수하던 그 친구는 어떻게 세상을 살았을까 생각이 나기도 한다.


중2때는 여섯학급중 한학급 우수반을 뽑아서 집중 공부를 시켰는데 다행히 나는 그 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반은 여름방학에도 다 노는 것이 아니고 보충수업이 있었다. 그런데 여름방학 어느날 아침부터 찌는 듯이 더워지고 있을때 가방을 들고 학교 보충수업에 가다가 두모와 도현이를 만나게 되었다. 도현이가 갑자기 "야 우리 오늘 학교 가지말고 중간치기해 버릴까?"하고 제안하는 것이었다.


착실했던 우리는 농담인줄만알고 "그래 그러자" 했는데 그말이 씨가 되어서 우리 셋은 정말로 학교가던 길을 벗어나서 산성 올라가는 길로 벗어나고 말았다. 길도 없는 산성을 셋이서 끝까지 올라가 도시락을 까먹고 실컷 놀다 내려왔다. 그후에 학교나 집에서 얼마나 야단을 맞았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사건(?)이 내가 살아오면서 단한번 정상 궤도를 벗어나 이탈해버린 일이었다. 그 외에는 학교나 직장의 규정을 어기고 일탈해버린 일은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다.


우리집은 내척동 464번지 대지 5백평 정도의 대갓집이었다.  안채가 있고 안채 뒤에는 음식등을 보관하는 광이 있었고 그 뒤는 지대가 좀 높은 대밭이었다. 가운데는 마당이 있고 마당 옆은 곡식이나 그릇 등을 보관하는 광 한채가 있었으며 집 전체는 ㄷ자로 안채의 맞은편은 사랑채였다. 학교에 갔다와 저녁을 먹고나면 온가족들은 안방에서 이야기 꽃을 피우며 놀곤 하였는데 나는 저녁후 한 삼십분 쉬고 가족들과 같이 있으면 아버지가  금새 "이제 너는 내려 가거라" 하시는 것이다. 나는 가족들과 더 있고 싶지만 아버지 말씀에 거역을 못하니 "네-"하고 사랑채 공부방으로 내려가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였다


가끔 졸고 있으면 안방에서 아버지가 방문을 열어 마당을 건너 사랑채 문에 비친 내 그림자를 보시고 "자냐-?"하고 호통을 치시면 나는 고개를 숙이고 졸다가 깜짝 놀라 일어나 "아니요 " 하고 다시 공부를 하였다. 아홉시가 좀 넘으면 어머니가 간식을 가지고 내려 오셨다.  나는 그 시간을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 어머니는 "힘들지야?" 하고 어깨를 쓰다듬어 주시곤 " 이것 먹고 해라" 하고 땅콩이나 고구마 감자 참외등 무언가 간식 그릇을 놓고 나가시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자식 공부에 얼마나 열성적이신지 여성으로 말하면 치마바람 식이셨다. 읍에 있는 영수학원은 거의 끊임 없이 다녔고 2학년 여름 방학에는 어떻게 알아오셨는지 우리학교도 아닌 남원중학교 과외 수업에 다니게 되었다. 타교생은 나하나뿐이라 어색하였지만 영어수업은 그런대로 재미 있었다. 그때 처음 익힌 팝송이 당시 유행하던 'Sad movie'였다. 길을 오가면서 그 노래를 잘도 부르곤 하였다. 어떻든 나는 음악과 노래는 무척 좋아하였다. 중학교 2학년 추석때는 왕재너머 한배미마을(율정리)에서 콩쿨대회가 있었는데 누나들이 너도 나가 노래 불러봐라하고 자꾸 권하는 것이었다. 나는 용가도 좋게 다른 동네 어른들 콩쿨에 나가 '타인들'을 불러 상을 타기도 하였다.


그렇게 2학년 까지 집에서 통학을 하다가 3학년에 올라가 공부시간도 더 많아지니 멀리서 걸어 통학하기가 너무 피곤하였다. 어머니는 읍내 향교리의 윤성만 장로님에게 부탁하여 3학년부터는 윤장로님 댁에서 하숙을 하게 되었다. 윤장로님은 우리집안의 멘토 장로님이신데 생활 예절은 엄격하셨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코가 좋지 않아 뜨거운 밥을 먹을때면 언제나 콧물이 나오는데 윤장로님은 식사중에 코를 훌적거리거나 풀면 야단을치셨다. 나는 그것이 너무 힘들어 어머니께 사정을 하였다. 어머니가 장로님께 잘 말씀 드려서 식사 도중에 나는 언제나 한번은 밖에 나가서 코를 풀고 들어와 다시 밥을 먹곤 하였다. 장로님께서는 매일 아침이면 기르는 양젖을 짜서 체에 받쳐 끓여서 드셨는데 그 양젖이 얼마나 먹고 싶었던가. 마침내 중학교를 졸업하게 되니 추억 많았던 장로님댁 생활도 마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