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어나 저 강을 건너라

아버지의 계속되는 시련

Billy Soh 雲 響 2019. 11. 9. 13:38

토지개혁으로 집안의 토지가 많이 줄고 한국전쟁으로 고초를 겪었다고는 해도 휴전후 다시 안정된 생활이 찾아왔다. 그 일대에서는 그래도 아직 부농의 칭송을 듣고 있었으며 우리 형제 자매들은 잘 성장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농사일 육체 노동은 하시지 못하니 모든일은 머슴들과 삯일군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한참 농번기에는 모든 집이 다 분주하니 어머니가 삯일군을 얻는 일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주로 집안에서만 생활하시는 아버지는 언제나 답답해 하셨다.젋은 시절을 일본의 대기업에서 엘리트 생활을 하시던 분이 시골에 박혀 계시니 그 답답함이야 상상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초등학교 3, 4학년 무렵에 아버지는 지인의 소개로 광주 송정리의 동아일보 지국을 인수하게 되었다.  그 인수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주막앞의 떼전 옥답을 팔아야 했고 그런일을 둘러싸고 부모님의 부부싸움이 자주 있곤 하였다. 어머니는 배움은 짧으셨으나 남다르게 야무진 총기와 지혜가 있으셨다.  어머니의 생각에는 아버지가 논을 팔아 시작하는 그 사업이 성공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아버지의 성격과 성향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어머니 아니겠는가. 아버지는 조직내 테크노크라트이지 사업 성향은 아니셨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만류도 아버지의 고집을 꺽기는 어렸워서 드디어는 아버지가 광주로 떠나시게 되었다. 나는 어린마음에도 어머니의 마음과 같이 걱정도 되었지만 한편으로 아버지는 대단한 분이시니 성공할 수도 있다고 나름대로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우리집안의 아킬레스건에 대하여 언급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할아버지의 친 형제간은 두분이 계셨다.  두 형제를 낳으시고 증조 할머니가 돌아가시니 후처로 오신 화산작은증조할머니에게서 오지할아버지 한분이 태어 나셨다. 그러니 아버지에게는 이복 삼촌이 되신 분이다. 그러나 삼촌이지만 큰 조카인 아버지보다 나이가 아래셨다. 이 분이 평생 성실하게 생활하지 못하고 노름에 빠져서 가산을 탕진하고 전 가족이 우리 집안에 매달려 사시다시피 하셨다. 거주도 우리 아랫집 기와집에서 하셨으며 양곡도 거의 자립을 못하고 우리집에 오시곤 했으니 이 오지 작은 할아버지 집안이 평생 우리집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아버지 혼자 사업을 시작하여 특유의 성실과 집념으로 노력하셨으면 결과는 어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새로 시작하는 생소한 분야의 사업도 지난한 어려움인데 오지작은집의 전식구가 아버지를 따라 광주로 들떠가게 되었으니 그 치닥거리에 어찌 아버지가 사업에 전념할 수 있었겠는가. 어머니의 예상대로 2,3년에 사업이 더 지속할 수 없게 어려워져서 급기야 아버지는 그 신문사업을 오지 작은집에 이것으로 먹고 살라고 주어버리고 내동으로 돌아오시고 말았다. 그러나 고생을 싫어하고 어려움을 참지못하는 그분들이 어찌 사업을 이어 갈 수 있었을까.  결국엔 모두 망하여 두손들고 다시 우리 집으로 들어 오시고 말았다.


그 후에 한동안 아버지의 실망과 낙담은 말 할 수가 없었다. 한동안 그렇게 지내시던 아버지는 자식들 교육비와 생활비는 들어가고 현금이 부족하시니 선산의 소나무를 산판하시기로 결정하시고 읍내의 산판업자 황씨에게 산판을 맏기셨다. 수십년을 자라온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산판되어 수많은 일꾼들이 일하고 규격 맞추어 잘라놓은 통나무들이 마을 앞 소나무숲 공터에 산더미처럼 쌓여가고 있었다.  산판이 다 끝나고 나무들이 다 실려 나갔으면 그 대금을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 황사장은 차일피일 미루고 돈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자기는 돈을 다 받아 남원의 유일한 호텔인 명지호텔에서 생활하며 훤출한 의복에 소비를 하고 다니면서 어버지에게 지불해야할 돈은 주지 않으니 아버지의 그 걱정과 고민하시는 모습을 볼때마다 어린 나도 그 사람을 정말 없애 버리고 싶도록 화가 났다.


아버지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술 담배를 입에도 대지 않는 분이셨는데 어느날 읍에가셨다가 밤늦게 돌아온 아버지는 만취해 계셨다.  돈도 갚지 않는 그 황씨가 갖은 말로 회유하며 술을 먹여 속상하신 아버지는 그렇게 몸을 못가누시게 술을 드신것 같았다. 그것이 아버지가 술 취하신것을 본 유일한 모습이었다. 아뭏든 아버지는 끝끝내 그 돈을 받지 못하고 떼어버리고 말았다. 불행과 낙담이 계속 되었다.


그러나 돈뿐이 아니고 또다른 불행이 닥쳤으니 아버지가 크게 다치신 것이었다. 어느날 이른 아침 돈문제로 읍에 가시려고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나가셨다. 나는 다녀오세오 하고 학교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한참후에 동네 아저씨들이 아버지를 떠메고 들어오셨다. 고통에 일그러진 아버지는 오른쪽 발을 쓰지 못하셨다. 자전거를 타고 나가시다가 집앞 2미터 정도 되는 개울로 떨어져버리셨던 것이다. 이 사고로 다치신 다리는 양의 한의등 온갖 의원을 다 불러도 낫지가 않으셨다. 수년동안 다리를 절고 고생하셨으니 그런 고난이 없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