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이 되기전 우리 집안은 그 일대에서 이름난 지주 집안이었다. 정확하게 어느정도 규모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는지 수치는 없지만 토지개혁 정책으로인해 수많은 토지를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들어 왔었다. 그러면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해방후에 남한과 북한이 어떻게 토지개혁을 했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는지 잠시 되돌아보기로하겠다.
북한은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3월에 김일성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의해 토지개혁이 단행되었다. 그 요체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였다. 땅을 가진 모든 지주들에게서 한 푼도 보상하지 않고 강제로 땅을 몰수했다. 다시 말하면 전 토지의 국유화를 단행한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땅을 많이 소유한 지주들은 인민재판에 끌려나와 곤욕을 치루었고, 많은 지주들이 죽음을 당했다. 지주들이 화를 면할 수 있는 방법은 땅을 버리고 남한으로 탈출하는 것 뿐이었다. 지주들 뿐만 아니라 자기 땅을 경작하던 자작농들도 예외없이 땅을 빼앗겼다. 북한은 이 몰수한 토지를 전체 농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는데, 이때 나누어 준 것은 토지의 소유권이 아니었다.
땅을 받은 농민들은 그 땅을 팔 수도 없고, 저당을 잡히거나 담보로 제공하여 돈을 빌릴 수도 없었다. 일체의 양도와 양수가 금지되었고, 임대차도 불가능했다. 북한은 농민들에게 땅을 나누어준 것이 아니라 경작권만 주었던 것이다. 경작의 조건인 경작료 비율은 30%였다. 그러니까 북한의 전 농민은 이전의 지주가 당으로 바뀌었고, 소작료가 50% 이상에서 30%로 낮아진 차이 뿐이었지 소작농 신세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또한 30%라는 일견 낮아 보이는 경작료도 함정이 많았다. 북한 당국은 전국의 농경지에 대한 실수확량 조사를 단행했는데, 이삭 하나당 쌀의 알갱이 숫자까지 셌으며, 각 농가의 텃밭과 기르는 닭의 수, 낳는 알의 숫자까지 조사했다.
일제시대의 그 어떤 악독하고 악랄한 지주도 실제 수확량에 대한 조사를 이렇게까지 했던 사람은 없었다. 50%라는 것은 그야말로 대충 봐서 50%였다. 그러나 공산당의 30%는 대충 30%가 아니었다. 피말리는 30%였다. 거기다가 비료대와 농기계 대여료 등 여러 잡세들이 붙어서 실제 경작료는 50%를 웃돌았고, 전쟁이 발발하자 무조건 수탈로 바뀌었다. ‘지주 없는 세상’, ‘누구나 공평하게 잘사는 세상’, ‘내 땅을 경작할 수 있는 농민의 세상’을 꿈꾸면서 일제 치하에서 빨치산을 했던 좌익농민들은 자기들이 그토록 바랐던 세상의 참모습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6.25 한국전쟁이 끝난 후 김일성은 전국의 모든 농지를 협동농장으로 전환해서 그나마의 경작권까지 회수해버렸다. 북한의 농민들은 소작농도 아닌 농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것이 혁명의 결과였다. 노동자 농민의 독재라는 것이 이것이었다.
한편 남한에서는 토지개혁이 지지부진하여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미군정은 토지개혁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신정부에 토지개혁의 짐을 떠넘겼다. 이승만대통령과 국회가 이 문제를 가지고 서로 넘기고 받고 핑퐁을 하다가 최종적인 농지개혁법이 국회를 통과한 것은 육이오사변이 일어나기 석달 전인 1950년 3월이었다. 처음에는 토지보유상한선을 2정보로 하려 했으나 최종 통과한 법안에서는 그것이 3정보로 약간 늘어났다. 즉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토지의 상한선은 3정보였고, 한 사람이 그 이상 갖고 있는 토지는 국가가 모두 몰수한다는 법이었다.
그러나 무상몰수는 아니었고 정부가 땅주인한테 땅값을 지불해주는 방식이었다. 재정이 빈약했던 당시의 정부에 지불해줄 수 있는 돈이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에 정부는 현금 대신에 지가증권을 발행해서 지급했다. 일종의 국채증서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몰수한 농경지를 직접 경작할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이것도 공짜가 아니라 지대를 5년간 분할로 회수하는 방식이었다. 땅을 분배받은 농민들은 농사를 지어서 거기서 얻은 소득 중 일부로 땅값을 나라에 변제해야 했다. 이 농지개혁법이 해방 이후 5년 동안 미군정과 이승만대통령, 그리고 국회 사이을 왔다 갔다 하면서 입법의 내용은 알려질 대로 알려졌기 때문에 지주들은 앉아서 땅을 빼앗기지는 않았다.
지주들도 가능한 모든 벙법으로 농지개혁에 저항했다. 우선 자기 땅을 일가 친척이나 믿을 수 있는 지인들에게 명의를 이전해서 분산시키는 방법을 썼다. 일인당 3정보가 넘지 않도록 땅을 쪼개서 숨긴 것이다. 물론 명의제공자가 정말 자기 땅이라고 우겨댈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토지 매매 계약서에는 이면계약이 첨부되었다. 그러나 이런 명의도용은닉은 훗날 수많은 소송을 야기했다. 또 더러는 농지개혁이 되기 전에 시세보다 싼 가격에 토지를 팔아넘기기도 했다. 이승만대통령은 농지개혁법이 통과되자 신속하게 집행해서 육이오사변이 나기 전에 농지의 몰수와 분배를 마무리지었다.
경탄할 만큼 신속하고 과감한 법의 집행이었다. 농지개혁법이 오래 동안 지체되었기 때문에 그 동안에 이미 몰수 대상인 토지와 분배할 농민들에 대한 파악이 거의 끝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육이오 전쟁 중에 많은 농민들이 이승만정권과 대한민국의 편에 섰던 것은 이 농지개혁에 힘입은 바가 컸다. 만약 농지개혁이 전쟁 전에 이루어지지 않고, 지주제가 존속되었다면 아마도 농민들의 대다수가 인민군을 열렬하게 환영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농민들이 자기 땅을 겨우 갖게 된 바로 그 시점에 터졌다. 농민들은 자기 땅을 지키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 아들들이 국군에 자원입대한 것이다. 농민의 아들들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은 그 전쟁을 치루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 농지개혁으로 해서 남한의 지주 계급은 일시에 몰락하고 말았다. 어쨌건 간에 대한민국에는 3정보 이상의 땅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게 된 것이다. 지주계급은 지가증권을 토지 대신 갖게 되었지만, 그것은 당장에 쌀 한말도 살 수 없는 증권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다가 지가증권을 받자말자 바로 전쟁이 터졌다. 남한의 지주계급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던 호남 땅에 인민군이 들어왔다. 방호산이 지휘하는 인민군 제6사단이 호남지역을 무인지경으로 휩쓸었다. 공산치하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지주들은 낙동강 교두보 안의 부산으로 도망쳤다. 자기가 살던 터전을 버리고, 전 재산을 가지고 부산으로 간 호남 지주들은 살 길이 막막했다. 당장은 돈이 아닌 지가증권을 헐값에 팔아서 연명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호남 지주들의 지가증권을 사들인 것은 영남의 기업인들이었다.
부산 피난 시절이 끝날 무렵 호남 지주들의 지가증권은 대부분 영남의 기업인들 금고 속으로 들어갔다. 남한의 농업자본이 산업자본으로 탈바꿈을 하게 된 것이다. 호남의 지주계급이 몰락하고, 영남의 자본계급이 부상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이것이었다. 그리고 이때로부터 호남은 남한에서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고, 영남의 패권시대가 열리게 된다.해방 직후에 조선 13개 도에서 가장 인구가 많았던 것은 서울을 포함한 경기도였고, 두 번째가 전라남도였다. 호남은 그만큼 인구도 많았고 부자도 많았다. 한국의 부는 쌀을 생산하는 토지에 있었고, 그 토지를 가장 많이 가진 사람들이 호남지방의 지주였다. 농지개혁은 남한의 부의 판도를 바꾸었다. 호남자본은 하루아침에 봄날의 안개처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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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같은 해방후 혼란의 토지 개혁제도의 시행 과정에서 우리집안은 상당한 몰락의 과정을 겪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전후까지도 가을 추수가 끝난 시기가 오면 어디로부턴가 지게에 볏짐을 짊어진 분들이 줄을 지어 집안으로 들어서곤 하였다. 그분들은 같은 마을에 사는 소작인들이 아닌 멀리에서 오는 분들이었다. 그분들이 오시면 거의 잔치집처럼 어머니는 술과 음식을 배불리 대접하시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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