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아버지의 호는 '취선'이시다. 푸를 취 翠 신선 선 仙 이시니 그 한량 선비의 품성을 가히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할아버지는 내가 일곱살 때 돌아가셨으니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아주 생생하다. 향리의 부농 집안 선비로서 한 가문을 이끌어 오시면서 그 대쪽같은 성격에 모두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술과 가무를 즐기시니 사랑에는 손님이 그칠날이 거의 없으셨다. 손님이 오시면 사랑 마루에서 술잔을 같이 기울이시며 창이나 시조를 번갈이 노래하는 소리가 안채까지도 똑똑히 들렸다.
나들이를 가실때는 새하얀 두루마기에 갓을 정갈하게 쓰시고 지팡이를 갖추고 계셨지만 걸음걸이는 꼿꼿하셨다. 전술한바 있지만 일본의 카와사키시에서 토시바의 전신 토오쿄오 전기 엘리트 부서인 기획부에 근무하시던 아버지께서 한국으로 귀국하신것은 전적으로 할아버지의 집안을 이어 받으라는 호출이 추상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들도 그 명령을 거역 할 수 없었으며 수많은 소작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문중의 어른들도 할아버지의 말씀에는 거역하지 못하셨다.
살림을 일으키신 고조 할아버지의 3대로서 집안을 지켜나가기 위하여는 당연히 절약의 정신이 중요하셨을 것이다. 어떤 물건이나 음식도 할아버지 앞에서 소홀히 여기거나 함부로 하면 불호령이 떨어지곤 하던 어린 시절의 광경이 생생하다.
형님은 부모님의 일본시절 카와사키시에서 태어나셨다. 위로 부모님을 모시고 형제 자매가 많은 집안의 장자로서 책임감이 투철하셨으며 매사에 자신의 일보다는 부모님과 형제간의 일을 먼저 판단의 기준으로 삼으셨다. 무릇 전통 가문에서 장자는 길러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형님은 부모님으로부터도 차별된 우대를 받으셨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이면 계란에 참기름을 넣어 저어 잘 섞으셔서 형님에게 마시게하곤 하셨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그것을 바라보지만 그러한 대우는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며 감히 샘내거나 나는 왜 안주시나 하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형은 자라나면서부터 그 일대에서 칭찬이 자자하였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도 어른을 만나면 일일이 내려서 인사를 하곤하였다. 생각과 판단이 완전 바를 정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고등학교에 가서 생겼다. 형은 집안의 사정 여러가지를 고려해 남원농고에 진학하게 되었는데 당시의 농업고등학교란 공부는 그다지 가르치지 않고 주로 실습과 농사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주요 과정이었다.
1학년을 다니고 난 형은 도저히 그 학교를 다닐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공부를 좋아하고 한없는 향학열에 불타던 형님에게는 애당초 맞지가 않는 학교였던 것이다. 2학년에 막 올라간 형님은 어느날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수소문을 해도 행적이 오리 무중이었다. 다만 어떤 동네분이 정거장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보았다는 말로 미루어보아 어디론가 도망을 가버린 것이라고 짐작 되었지만 도대체 어디로 간것인지 추측도 할 수 없었다.
부모님의 노심초사는 어린 내가 보기에도 속이 탈 지경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것은 어떻게 차비를 마련 했는지는 모르나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보겠다며 무작정 상경을 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생면부지의 서울에 형이 갈곳은 없었다. 그나마 동네 아저씨뻘되는 한분이 서울의 양복점에 근무한다는 말만 믿고 형님은 그분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도 냉혹하였다. 청계천의 어느 작은 양복점에서 일을 배우는 그 아저씨는 혼자 숙식도 해결하기 어려운 형편인데 형이 찾아왔으니 얼마나 난감하였겠는가.
근근히 같이 주린 배를 채우며 잠은 양복 재단대 밑에서 웅크리고 잤다고 한다. 열흘간의 그러한 고생은 형에게 고달픈 현실의 눈을 뜨게해주고 가능한것과 불가능한것의 판단을 하게해 주었다. 급기야 더 견디기가 어려워 다시 기차를 타고 남원역에 도착한것은 새벽이었다. 걸어서 내동 집에 들어오니 거의 아침밥을 마친 시간이었나 보다. 갑자기 밖에서 아버지의 "이놈 이놈의 자식 이 죽일놈" 하시는 대 호령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깜짝놀라 문을 열고 보니 형님은 거의 거지 꼴을 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아버지는 화가 폭발하여 작대기를 몰아쥐고 후려칠 기세로 내닫고 계셨다.
그때였다. 할아버지께서 방문을 벌컥 여시면서 맞 호령을 하셨다. "야야 ! 가한테 손대지 마라" 하고 일단 아버지를 제재하신후 어머니에게 "가 한테 일절 아무말 하지 말아라. 가가 보통 아냐. 저도 다 생각이 있어서 한 일일텐데.. 에미는 어서 밥상 채리거라."하시며 대 호령을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난리가 터질것만 같아서 간이 콩알만 하게 됐었는데 할아버지께서 일거에 분위기를 진압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휴우 한숨을 내쉬며 밥을 먹는 형을 바라보았다. 형은 일체의 말도 없이 밥만 먹고 있었다. 수많은 세월이 흘러 그분들이 모두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고 그리움에 눈시울이 어린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할아버지의 집안 장자인 형님에대한 무한 신뢰가 그토록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 시점을 겪어내며 형님은 완전히 딴사람처럼 변하였다. 일체의 말수도 없이 책만 보는 것이었다. 어떻게 협의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때부터 형은 학교에 가지않고 혼자 공부하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이 학생은 학교에서 더 가르칠 수가 없으니 학적은 유지하고 혼자 공부하여 성과를 거두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형은 책보따리를 짊어지고 산속의 솔터 재궁으로 들어가 혼자공부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방학이면 그곳으로 따라가 같이 공부를 한답시고 앉아있곤 하였다.
그러나 나는 오래 앉아있질 못하고 엉덩이가 들썩들썩하였다. 형은 아침을 먹고 책상앞에 앉으면 열시 반경에나 일어나 몸을 풀고 운동하며 휴식한후 다시 앉으면 점심시간에야 일어나곤 하였다. 오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다만 오후 휴식시간에는 가고파 등 가곡을 목이 터져라고 부르는 것이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그렇게 오래 참고 매일 공부하는 형이 신기하기만 하였다. 그렇게 혼자 공부하여 형은 서울대학교 수의학과에 합격하여 당당한 대학생이 되었으니 그 시골 산골마을에서 서울대학생이 된 형의 모습에 모두가 신기해 하였다.
형은 그렇게도 집념이 강하였다. 당시엔 아직 트랜지스터 라디오도 없던 시절에 외부와 소통 되는것은 주먹한한 리시버가 전부였다. 뒷동산 감나무에 높게 안테나를 매달아 앵앵소리나는 그 리시버를 들었는에 매일 새벽 잠결에 눈을 떠보면 형님은 그 리시버로 "This is voice of America" 하고 시작하는 '미국의 소리' 방송을 들으며 속으로 따라하고 있었다. 형은 대학시절에 이미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였으며 어버지는 일어에 능통하셨으니 내가 오늘까지도 어학의 힘으로 직업을 갖고있는것은 전적으로 두분의 영향이다.
특히 영어는 열세살 중학교 일학년 겨울방학에 형에게 군밤을 맞아가며 떼었던 한권의 책 안현필의 '영어실력기초" 한권의 덕이다. 눈물을 삼켜가며 혼나면서도 그 한권의 책을 뗀것이 오늘까지도 영어의 기초가 튼튼하게 된것이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언제나 윗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그리운 마음 뿐이다.
'★ 일어나 저 강을 건너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등학교에 입학하다. (0) | 2019.12.10 |
---|---|
나의 중학교 시절 (0) | 2019.12.08 |
아버지의 계속되는 시련 (0) | 2019.11.09 |
해방후 토지 개혁과 우리 집안의 변화 (0) | 2019.10.27 |
초등학교 합숙생활과 교회생활 (0) | 2019.1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