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일이 늦으니 일곱살도 아주 여린 일곱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시 전쟁후 어렵던 시기에는 아홉살이나 열살이 되어서야 아이를 학교에 넣는 집도 드물지 않았으니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아주 어린 편이었다. 하지만 학교에 들어가기전 아버지에게서 이미 천자문과 한글을 떼었으니 끼니도 어려운 친구들에 비하면 입학준비는 아주 철저히 한 편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설레임으로 곤색 새 양복옷에 흰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누나와 함께 학교에 갔다. 일제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왕치초등학교는 한 학년에 한반뿐인 조그마한 학교이다. 건물도 일부는 아직 기름먹인 판자목조 그대로였지만 운동장에 줄지어 섰을때는 마냥 즐겁기만 하였다.
1학년 담임선생님은 아주 베테랑 남자 선생님이신 한호정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은 생활 교육은 인자하셨지만 학습 지도의 면에서는 아주 엄격하셨다. "달 달 무슨달 쟁반같이 둥근달, 어디 어디 떴나 남산위에 떴지..." 국어 책의 첫장을 낭낭하게 읽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린 마음에도 남산은 서울이니 그곳은 어떻게 생긴 곳일까 하고 막연한 동경의 마음이 일곤 하였다. 당시에는 초등학교도 등수를 매겼는데 나이도 젤 어린 내가 성적은 언제나 일 이등이었다. 시골 아이 답지않게 얼굴은 아주 하얬으니 선생님들의 귀여움은 독차지 하였다. 소풍날에는 선생님들과 같이 점심을먹기도 하였다. 1, 2학년을 마치고 3학년에 올라가니 교육대를 막 졸업하시고 첫부임으로오신 진천금 선생님으로 담임 선생님이 바뀌었다.
진선생님이 담임하신 3, 4학년의 2년간은 참 아름다운 추억의 시절이었다. 무엇보다도 진천금 선생님은 보기드문 미인이셨다. 당시 스물 한두살이나 되셨을 진선생님은 갓피어난 장미꽃처럼 어린 우리가 보기에도 너무나 예쁘셨으니 그 일대의 청년들이 보기에는 어땠겠는가. 출퇴근시에 선생님이 멀리 길에서 걸어가실때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곤 했었다. 친구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진선생님에게 너무나 이쁨을 받았다. 마을에 가끔 가정방문을 오시면 어머니는 선생님들에게 음식을 대접하시기도 하셨다. 소풍때에는 나는 언제나 선생님 곁에서 도시락을 먹곤 했는데 그때는 그것이 친구들에게 너무 부끄럽기만 했다. 선생님이 너무 예쁘셨기 때문에 우리들중 말썽쟁이 친구들은 선생님을 골탕먹이고는 한편으로 낄낄대며 즐거워하곤 했는데 한번은 그것이 지나쳐 선생님이 우시면서 난 너희들같이 말썽쟁이들 못가르치겠어 하시면서 교무실로 가버리셨다. 조금있다 교감선생님이 오셔서 우리는 얼마나 야단을 맞았는지 한참이나 혼이 난후에 선생님이 눈이 충혈된 모습으로 다시 들어오셨다. 우리는 또 그게 너무나 안타까워서 다음부터는 친구들이 조심하는 편이었다.
그렇게 자랑스럽고 아꼈던 담인선생님이 4학년을 마치고 읍내에 있는 용성초등학교로 전근을 가시게 되었다. 우리들은 너무도 섭섭하여 떠나시는 선생님을 보고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한동안은 공부도 손에 잡히지 않고 실망가운데 기운들을 못차렸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아이디어를 내어 우리 모두는 어느날수업을 마치고 모두 같이 읍내로 나갔다. 용성초등학교 담장밖의 푸라타나스 나무에 두셋씩 모두 올라가 선생님이 퇴근해 운동장으로 걸어나오실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선생님이 나오지 않으시니 나무에 올라앉아 있는게 너무나 힘들어 모두 내려올수 밖에 없었다. 선생님이 나오시면 모두 교문으로 몰려가 인사를 하고 선생님을 보고싶었지만 지금 기억에 그날 선생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오고야 말았으니 그 실망과 섭섭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후에 진선생님은 인월초등학교로 전근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다시 뵐 수있는 기회는 영영 없어지고 말았다. 우리 동창 친구들은 그 3, 4학년의 추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아마도 잊어버린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 후에 어떤 친구가 모 방속국 사람찾기에 나가 진천금 선생님을 찾았지만 소식이 없었다 한다. 이렇게 나이가 들은 지금도 초등동창회가 모이면 진선생님의 이야기를 하곤한다. 도대체 그 선생님은 그후 어디로 가신 것일까. 아마도 외국으로 이민을 가셨거나 해서 한국에 사시지 않았기가 쉬울것이라고 모두 아쉽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그 무렵 생각나는 사람이 또 두사람이 있다. 하나는 정엽이 누나이다. 정엽이 누나는 아마도 아버지 여동생의 딸로 고종사촌이었던것 같은데 어려서 조실 부모하고 우리집에서 한동안 같이 살았다. 어렸을때는 물론 지금의 기억에도 그렇게 착하고 마음씨 고운분은 없을 것이다. 내가 일곱 여덟살때 스무살이 좀 넘었을까했는데 나를 얼마나 예뻐하고 귀하게 여겼는지 그 누나한테 말만하면 다 해다주고 혹시 부모님한테 야단맞고 울때는 얼른 밖으로 데리고 나와 끌어안고 달래주곤했다. 시간이 흘러 그 누나는 인천의 송림동 연안제과라는 제과점을 하시는 분한테로 시집을 갔는데 부모님은 거길 다녀 오신적이 있다. 하지만 오랜 세월속에서 그만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으니 지금도 가끔 그누나는 어떻게 사셨을까 하고 생각날 때가 있다.
그리고 또 한분은 나보다 두 세살 위였던 이종사촌 영숙이 누나이다. 고향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구슬이라는 동네에 살았는데 방학이면 언제나 우리집에 놀러와서 한동안 같이 지내곤 하였다. 방학숙제도 같이하고 곤충채집 식물채집등의 숙제도 같이 하였다. 이 누나가 또 얼마나 착했는지 내가 해달라는건 다 해 주었다. 그 누나도 자라서는 소식이 끊기고 말았으니 무심한 세월이 다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5, 6학년 2년간은 소성수 선생님이 담임 하셨다. 소선생님은 군에서 갓 제대해서 처음 부임하셨으니 얼마나 팔팔하고 무서운지 우리는 숨도못쉴 지경이었다. 시험 점수가 떨어지거나 문제가 있을때는 신고 있는 타이어 슬리퍼를 벗어 때리셨다. 지금같으면 학부모들이 고발이라도 할 일이었지만 그때는 선생님이 체벌하고 야단 치시는 것은 당연한 일로 받아 들였다. 하지만 그 무서운 선생님 덕분에 공부는 열심히 하였다. 운동회때도 어려운 탑쌓기나 텀블링등을 무서워서 열심히 하곤 하였다.
어려웠던 시절이지만 그래도 6학년때는 수학여행을 가는것이 관례였는데 나는 5학년때 6학년들이 가는 수학여행을 따라가게 되었다. 우리학교의 선생님이셨던 같은 마을의 조선옥 선생님에게 어머니가 아마 부탁하셨었나 보다. 태어나서 남원외에는 벗어나본적도 없고 여행이라고는 가본적도 없었는데 수학여행을 따라간다하니 그 전날엔 잠이 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싸주신 작은 가방에는 갈아입을 옷과 곳감이 들어 있었다. 어머니가 곳감을 씨를 다 빼고 납작하게 다듬고 눌러서 도시락 곽에다 가득 넣어 주셨다. 어떻게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조선생님이 오셔서 깨우셨다. 문을 열고 내다보니 가을 새벽의 달빛이 마당에 가득한데 "가 어서 깨워서 준비 시키씨요~" 하고 큰소리로 외치시고는 가셨다.
6학년 형들과 나는 새벽에 조선생님을 따라 학교로 가 집합하여 남원역으로 걸어가서 기차를 타고 여수로 출발하였다. 산골에서 자란 소년이 바다를 본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얼마나 신기한지 "와아~" 하고 소리들을 질렀다. 걸어서 여수 오동도 다리를 건너서 작은 섬을 돌아보던 기억이 생생하다. 빨간 동백꽃이 피어 있었다. 나는 욕심이 많았다. 곳감은 누구를 주고 누구를 안줄 수도 없어서 저녁에 자기전에 한개씩 혼자 먹었다. 어린마음에 선물을 살것도 별로 없고 종이꽃 놀이하는 장난감을 샀다. 접혀지고 주름진 종이꽃 양쪽에 막대기가 붙어있는데 그것을 접고 돌리는데따라 여러가지 꽃모양으로 변하는 것이 신기하였다.
드디어 6학년을 마치고 졸업하게 되었을때 졸업식을 며칠 앞두고 5학년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그 남자 선생님 성함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한시간에 해주신 훈시의 한마디는 내 평생에 영향을 미치는 말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 선생님이 교단에 서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어려서 아직 잘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너희가 사회에 나가면 소 걸음으로 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는 함부로 뛰어가지 않는다. 천천히 걷지만 멈추지 않는 것이다고 말씀하신것은 이렇게 긴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사회에 나와 그말씀그대로 서두르지는 않아도 멈추지는 말자는 좌우명을 갖고 살아 온것도 그 선생님의 덕분일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우리집안의 농사일 전반의 일을 도와주셨던 상일군분들의 기억도 새겨보고 싶다. 다는 아니고 특히 기억에 남는 분들이다. 대부분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거나 중 2 이전의 분들이다. 처음 기억은 월평 아저씨이다. 이분은 그야말로 농사일에는 달인이셨다. 아버지가 워낙 농사일에는 잘 모르시는 분이시니 대소 일은 거의 이 아저씨가 맡아 하셨다. 아마 몇년은 우리집에 계시면서 일을 해 주셨다. 힘이 세시고 소를 부리는 일도 능숙하시는 것을 구경하던 생각이 난다.
두번째는 수촌 아저씨이다. 이분은 나이가 드셔서 행동은 좀 느린편이시만 끊임없이 성실하게 일을 하셨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 학교에 가기 직전인데 이 아저씨가 일을 하시다가 사고가 났다. 집 뒤꼍 감나무 근처 대밭에서 무슨 짐을 지고 비탈을 내려 오시다가 넘어져 굴르시면서 대나무를 낫으로 베고 남아있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밑둥에 관자놀이 부분을 찔려버린 것이었다. 피를 철철 흘리시면서 움켜쥐고 내려오셨는데 부모님도 당황하여 어쩔줄을 모르셨다. 하지만 갑자기 시골에서 무슨 의사가 있을까 치료받으실 수가 있을까 모두가 허둥대기만 하였다. 다행히 아버지가 침착하게 약상자 속에서 소독약을 꺼내어 소독을 하시고 하얀 페니실린 가루를 상처에 뿌리시고 붕대로 칭칭 동여매 주셨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얼마나 당황하고 안타까운지 견딜 수가 없었다. 그후에도 계속 수촌아저씨가 우리집에 계셨던 것을 보면 그후 큰덧이 나지않고 다행히 그대로 아무셨던가보다.
세번째는 과동 아저씨이다. 이분은 그야말로 기골이 장대하고 힘은 장사셨다. 지금이야 아무 상관없는 말이지만 그때만 해도 집안의 직업이 좀 내놓고 말하기가 그랬던 소를 잡는 백정의 집안 분이셨다. 쌀을 두가마니 정도를 한번에 지실수 있고 밥은 커다란 놋 주발에 고봉으로 밥을 얹어 밥그릇 안에것보다 그위에 쌓아져 있는 양이 더 많았다. 일뿐 아니라 언제나 내가 부탁하는 일은 다 만들어 주셨다. 이 아저씨가 그만두고 집을 떠나실 때는 정말 섭섭했었다.
아버지는 웬만한 의료 처치는 직접 다 하실 수가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에 얼굴이나 코에 종기 또는 눈다래끼 등이 어찌 그리 자주 났었는지 그 치료는 다 아버지가 직접해주셨다. 페니실린 주사를 놓으실때는 주사기와 바늘 등을 양재기에 넣고 숫불 화로에 완전히 팔팔 끓여서 쓰시곤 하셨다. 눈에는 다래끼를 짜주신후 안악을 넣고 그대로 누어서 자게 해 주셨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꾹꾹 찔리던 눈이 신기하게도 낫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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