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 2학기가 되자 선생님은 중학교 입학 대상자들을 골라서 숙직실에서 합숙 공부를 하게하였다. 합숙 공부하는 친구들은 60명중에 15명 정도 되었던것 같다. 돌아가며 식사당번을 하여 밥을 해서 선생님을 드리고 집에 가지 않고 그곳에서 모두 같이 지내었다. 남학생방 여학생방 두개가 있었는데 저녁 식사후에는 모두 같이 선생님 앞에서 공부를 하곤 하였다. 선생님이 얼마나 괄괄하고 욕도 잘 하셨는지 성적이 떨어지면 "넌 용중 못가 새끼야. 남중 가"하고 소리를 지르시기도 하였다.
6학년때는 전주와 군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당시의 전주역은 시내에 있었다. 지금 전주역은 이전한 다른 곳이다. 전주역 앞에 작은 개울이 있었는데 그 개울 건너편의 작은 여관이 숙소였다. 그때 한참 유행하던 아이들 놀이가 원판을 돌려 바늘핀을 찍는놀이였다. 그냥 놀이가 아니라 길가에서 그판을 별여놓고있는 장사꾼들에게 코흘리개 돈을 내고 그 아저씨가 판을 팽하고 돌려주면 핀을 내리 꽃아서 과자나 작은 장난감 칸이 맞으면 그것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맞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못받는 공타가 더 많았다. 어린 시절에도 성격의 차이기 많았는지 나는 그것을 몇번 해보고는 이건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몇푼의 용돈만 날렸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친구들은 그 별것 아닌 물건을 따보려고 계속하다가 용돈을 다 잃어버린 친구들도 있었다. 촌놈들이 전주 대처의 불빛과 번화함을 보니 얼마나 신기한지 저녁에도 돌아다니곤 하였다.
군산에 가서는 항구를 보고 장항으로 배를 타고 건너가서 제련소를 구경하였다. 시뻘건 쇠물이 엄청난 양으로 나오는 것은 대단한 구경이었다. 그리고 연초제조창엘 갔는데 많은 아가씨들이 줄을 지어 잘려져 나오는 담배 권련을 20개피씩 종이 곽에 넣는 작업을 하고있었다. 그런데 그 누나들이 담배를 손으로 한번에 딱 집으면 20개피였다. 얼마나 숙련됐는지 단한번도 모자라거나 남는법이 없이 딱 집어 착 넣는 그 재주가 너무나 신기하여 모두가 한참이나 처다보며 감탄하였다. 넣은 담배곽은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가서 자동으로 봉해지고 포장되는 것이었다. 그 수학여행 처럼 즐거운 추억은 없었다.
전쟁후 절대빈곤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던 당시 시골에서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초등학교가 최종학력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졸업식 날이 되면 식장은 언제나 울음과 눈물의 바다였다. 졸업식의 마지막 부분은 졸업식 노래 였었다. 먼저 5학년까지의 후배들이 1절을 물렀다.
<재학생>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하며
우리는 언니뒤를 따르렵니다
<졸업생>
잘있거라 아우들아 정든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부지런히 더배우고 얼른자라서
새나라의 새일꾼이 되겠습니다
<다같이>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들도 이다음에 다시 만나세
더 배우고 싶어도 집이 가난하여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도와야하는 형편이니 선생님과 이별하고 학교를 떠나는 마음이 얼마나 슬펐겠는가. 1절이 끝나고 2절을 졸업생들이 부를때부터 통곡 소리가 나왔으니 재학생들과 선생님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졸업식 날에도 예외없이 눈물바다였다. 특히 진학을 못한 친구들은 더 서럽게 울었다. 나는 갈길이 정해저 있어서 그랬는지 그다지 슬픈 마음이라기 보다는 다가올 새로운 중학교 생활에 대한 약간의 불안과 설레임이 더 컸던것 같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 마을에서 예수 믿는 집은 우리집 뿐이었다. 어려서는 부모님을 따라서 동북교회에 어른예배를 드리러 가면 예배가 얼마나 길고 지루하였는지 나는 아버지 옆에서 잠이 들어버리곤 했다. 김영수 담임 목사님은 우리 짐안의 멘토이셨으며 얼마나 성스럽게 보이셨는지 모른다. 하얀 가운을 입으시고 설교하시던 한장면은 지금도 내 뇌리에 남아있다. 어는 주일날 잠에서 슬쩍 깨어보니 아직 설교를 하시는데 한손을 번쩍 쳐드시면서 "예수의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의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고 외치시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부터는 부모님을 따라가지 않고 그보다 조금 가까운 언덕위에 있는 작은 교회인 성일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그 교회는 양로원을 함께 운영하시는 교회였는데 나는 비가오나 눈이오나 일년 내내 단 한주일도 빠지지 않고 혼자서 3킬로 정도를 걸어가 주일학교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여름방학이 되면 1주일간 여름성경학교가 열렸다. 그때에는 오전에 갔다가 돌아와서 다시 밤에도 혼자갔는데 돌아올때는 밤중이 되니 어두운데 너무 멀어서 선생님들이 집까지 바래다 주기도 하셨다. "흰 구름 뭉게뭉게 피는 하늘엔 아침해 명랑하게 솟아 오른다..."고 노래 부르던 여름성경학교 교가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어느해 여름성경학교때던가 동북교회에 다니시는 이창기 선생님이 특별히 오셔서 매일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일인극처럼 얘기해 주셨는데 그 극이 얼마나 재미있고 감동적이었는지 지금도 가끔 그 선생님의 이야기와 표정이 생각 난다.
그런데 그,무렵 시골동네 그 일대에 대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우리 마을 앞은 흔히 산성이라고 불리는 교룡산이었는데 그 산 기슭에 소록도에서 음성 판정을 받은 한센병 환자 자활촌을 건설하기로 결정된 것이었다. 그들은 비록 음성판정을 받아서 전염은 되지 않는다하더라도 병을 앓았던 흔적으로 이목구비가 일그러지고 보기 무섭게 생긴분들이 많았다. 이른바 보성농원이라 일컫던 정착촌인데 그들을 받아들이는데 아버지께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셨던 것이다. 신실한 신앙인이셨던 아버지는 모든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분들의 정착촌 건설을 위해 도우셨다. 그 일로 인해 나는 얼마나 많이 친구들에게 핍박을 받았는지 모른다 "너희 아버지 때문에 우리동네 문딩이촌 됐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린 마음에 그말을 들어내기가 너무나 힘들었지만 그것이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웠다. 아버지의 하시는 일이 부끄럽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 되었던 것이다. 우리 집안에 대한 그러한 욕은 그후에도 오랬동안 계속 되었지만 결국 그분들은 보성농원이라는 훌륭한 정착촌 건설에 성공하였다. 그 분들 중에는 전에 공부를 많이 하신 의사나 약사 같은 분들도 계서서 시간이 흐른 후에는 그렇게 욕하던 우리 마을 사람들도 적잖이 그분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으니 참 세상사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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