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부터는 기차로 대전을 거쳐 전라선으로 갈아 타고 남원에 도착 하였다. 일본에서 출발 하시기 전에 또 예에 따라 아버지는 귀국 일정을 치밀 하게 짜셔서 남원의 할아버지에게 전보를 쳐 두셨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아들 가족이 어느 차로 오는지 이미 알고 계셨다. 그렇게도 기다리던 아들의 귀국이니 모든 가족들 이며 집에서 일하는 일꾼들 까지 기차 시간에 맞춰 철로 가의 뒷재로 나오셨다.
그때 뿐 아니라 내가 어렸을 때 까지도 가족중의 누가 어디로 길을 떠나거나, 갔다가 돌아 올 때는 가족 모두가 철로 가의 뒷재로 나가서 기차가 지나갈 때 창 밖으로 손을 흔드는 가족을 보고 마주 손을 흔들곤 하였다. 가족이 돌아올 때는 기쁘지만, 가족이 오랜 기간 예정 하고 떠날 때, 서로 손을 흔들고 기차가 지나가버리면 어머니나 여자 가족들은 대개 눈시울을 적시기가 일쑤였다. 이때는 물론 가족이 돌아 오니 그 기대와 기쁨으로 모두가 뒷재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차가 터널을 빠져 나와 내려 오기 시작 하자 미리부터 차창을 열고 손을 흔드시는 아버지를 보고 모두 감격 하여 손을 마주 흔드셨다.
아버지는 그때 남원읍 에서 올라 오실 때 짐을 줄이시기 위하여 옷가지 등 깨지지 않는 보따리 몇 개를 차창 밖으로 던지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가족들을 데리고 남원역 에서 하차하여 모두 걸어서 내척으로 올라 오셨다.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 가족이 다시 돌아와 “무사히 돌아 왔습니다” 하고 절을 올리니 조부모님의 기쁨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얼마 후에는 이사짐이 도착 하였다. 그런데 짐 하나가 오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그래도 물표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화물회사에 찾도록 해보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 그 잃어버린 짐 하나는 화물 회사 직원의 실수로 중국의 남경으로 가버렸다. 한자로 쓴 남원(南原)을 남경(南京)으로 잘못 읽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짐은 중국 남경에서 수취인 불명이 되어 일본으로 다시 돌아 갔다 뒤늦게 무사히 남원으로 돌아 왔다. 당시 일제가 한,일,중을 다 점령 하여 통치 하고 있었으니 이런 일도 일어 났었나 보다. 그러나 끝까지 주인을 찾아 온 것은, 요즘에도 멀쩡한 소포가 없어져 버리는 일이 비일 비재 한 것을 감안 해 볼 때 당시 행정의 철저한 면을 그래도 엿볼 수 있다.
아버지는 이렇게 23살에 일본에 들어가 만 8년에 걸친 일본 생활을 끝내고 31살이 되어 돌아 오셨지만, 인천의 조선전기로 발령이 나신 상태였으므로 며칠이 지난 후 다시 인천으로 가시게 되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할아버지의 재촉이 다시 시작 되었다.
당신은 이제 나이도 많이 들고 기력도 떨어져 가니 이것이고 저것이고 객지 생활 다 접고 속히 고향으로 내려 오라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로서는 아무리 해도 그 살림을 이끌어 나갈 자신이 점차 없어 지셨나 보다. 어서 모든 것을 물려 주시고 자신은 뒤로 물러나 유유자적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래도 다른 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식이라곤 하나 밖에 없는데, 불같이 성화를 내시고 부르지 않으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로서는 이제 시골 생활에 적응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우선 농사 일을 할 줄도 모르거니와, 육체적인 노동은 일꾼들을 시켜서 한다고 하더라도 농사 경영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학교 졸업 후 전기 기술과 기획 업무만 하시던 분이 당시 전기불도 들어 오지 않는 낙후된 농촌 생활을 견디기가 쉬우셨을 수가 없다. 그래도 부모님의 성화가 엄청 심하시니 그 말씀을 거역 할 수가 없어서 급기야는 회사의 모든 것을 사직 하고 남원으로 내려 오시게 되었다.
“솟쩍- 솟쩍- 솟 쩍다-----
솟 쩍 다.. 솟 쩍 다 .. 솟 쩍 다…”
마을을 둘러싼 산 어딘가에서 소쩍새가 운다. 봄부터 여름 이면 소쩍새는 밤마다 그렇게 끝없이 운다. 누가 무어라 무섭다고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그 소쩍새의 울음 소리는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그치지도 않고 울어 대는 소쩍새는 피를 토하는 것처럼도 들리고 누군가의 혼이 새가 되어 우는 것처럼도 들렸다.
아버지가 내려오신 그 여름에도 소쩍새는 그리도 처량 맞게 울었다. 그리고 얼마 안가 8월 15일, 전쟁이 끝나고 해방이 되었다. 해방은 환희와 동시에 충격이었다. 움직이던 물체가 갑자기 진공 상태에서 멎어 버린 것처럼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몰랐고, 또한 무엇이나 다 해야 될 것만 같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 할아버지가 그렇게도 역정을 내시며 일본에서 돌아 오라고 아들을 부르셨던 것, 인천에 있는 것 까지도 놓아 두시지를 않고 끝끝내 불러 내리셨던 것도 어쩌면 그 혼란기에 자식을 보호 하려는 부모로서의 본능이 작용 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됐건 혼란기의 직전에 모든 가족이 시골로 들어와 외부의 분위기와는 다른 평화를 맞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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