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고향에 계시는 할아버지께서는 태평양전쟁 정세가 불안해지자 어서 모든걸 그만 두고 조선으로 돌아 오라는 성화가 불같았다. 전통적인 유학과 한학을 하신 할아버지의 관점 에서는 외지에 나가서 생활 하는 것은 모두 부질 없는 짓이요, 안전하게 고향에 돌아와 가문을 이어 받고 살림을 지키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전문직에 종사 하시며 세계 정세의 흐름에 접하고 계시는 아버지로서는 직장내 엘리트로서 쌓아놓은 그 모든 신뢰와 기회를 포기 하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정말 결정하기 어려운 아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해를 거듭 할수록 전황이 더욱 심각 해지고 1945년이 되자 이제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리라는 것을 아버지로서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어려움 중에도 그 해 2월 24일에 둘째 딸 용숙이 태어났다. 갓난이도 있어서 어려움은 있었지만 이제 귀국을 더 미루기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이제 아들이 일본에 더 있다가는 집안이 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귀국을 재촉해 오셨다.
전쟁도 이제 파국으로 치달아 거의 마지막 단계처럼 보였다. 그 전해인 1944년 6월 부터는 오가사와라 제도의 전략 요충지인 이오지마(유황도,硫黃島) 에 대한 미군의 폭격이 시작 되었고 그해 12월 에는 폭격이 이루 말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해가 바뀐 1945년 2월 19일에 드디어 미국 해병 제 3, 4, 5 사단이 유황도에 상륙하여 물밀듯이 쇄도 하였다. 이제 유황도가 함락 되면 공격은 바로 일본 본토로 이어지는 추세 였다.
3월 14일에는 유황도의 전 일본 수비군이 지옥의 육박 전투에서 완패하고 전원이 전사하여 그들이 이른바 옥쇄 하였고 미군의 성조기가 게양 되었다. 이제 본토 폭격과 함락은 눈 앞의 일이었다.
아버지께서는 귀국을 서두르지 않으실 수 없었다. 조선내의 황폐해가는 분위기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지만, 혼란의 와중에 1945년 6월 아버지는 마침내 토오쿄오뎅키(동경전기) 기획부의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귀국짐을 싸기 시작하셨던 것이다. 처음에 사직 의사를 표하셨을 때 회사에서는 쉽게 수리를 하지 않고 계속 근무해 줄 것을 바랐다. 그러나 어쩔 수 가 없다고 끝내 사직을 청 하자 그러면 아주 직장을 그만 두지 말고 조선으로 전근을 시켜 주겠다고 하였다. 조선의 인천에 있는 조선전기회사 ( 한국 전력의 전신 )로 전근 하여 근무 하고 사정이 좋아 지면 다시 돌아 오라고 하였다.
그런 극도로 불안한 상황에서도 부모님 가족의 이사짐은 회사에서 직원들이 나와서 모두 철저히 포장 하여 발송 하였다. 출발 할 때에는 회사 동료들과 집의 이웃 분들이 모두 나와 작별의 아쉬움을 나누고 무사히 귀국 하기 만을 기원 하였다.
그리 하여 이제 넉달된 둘째 딸을 업고 소학교 4 학년이 된 큰딸에 네살이 된 아들, 이렇게 다섯 식구가 1945년 6월 20일 조선으로의 귀국길에 올랐다.
시모노세키행 기차가 출발하는 동경역은 전쟁 말기 미군의 폭격을 앞두고 고향으로 돌아 가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차표는 소지하고 있었으나 우선 승차하는 홈으로 들어가기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책상과 장 등 대형 이삿짐은 선박 화물로 조선으로 부쳤다해도 직접 손으로 운반해야할 가방과 소지품과 보따리 짐도 상당한 양이었다. 기차 시간은 다가오고 남의 사정을 보아줄 형편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유도로 단련된 서른두살의 무쇠같은 체격이었으니 무례를 무릅쓰고 사람들을 밀어 제치면서 가족들을 끌고 타야할 기차 앞까지 도착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더 심각하였다. 기차는 터져 폭발할 듯이 사람들로 꽉차서 한발을 들이밀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사정은 막다른 골목이니 아버지는 체면이고 뭐고 더 머뭇거릴 겨를이 없었다.
"시츠레이 이타시마스 . 고멘 쿠다사이.(실례합니다.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무작정 힘으로 밀어부치고 혼자서 기차 안 중간쯤으로 들어가셨다. 홈에도 사람들이 미어터졌고 차창 밖에서는 어머니와 세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차창 문을 열고 소리쳐 어머니를 불러 우선 어린 아이부터 창문을 통해 올려보내라 하셨다. 그 북새통에 아이 셋이 창문을 통해 차 안으로 들어가고 짐까지 다 올리고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끌어 올리시니 겨우 다섯 가족과 짐이 차속에 들어와 휴유 하고 일단 한숨을 돌릴수 있었다. 아차하면 차도 못타는 일촉즉발의 승차였다.
꼼짝하기도 어려운 생 난리속에 드디어 동경역에서 기차가 출발하였다. 기차는 요코하마, 나고야, 오오사카를 거쳐 하루 밤낮을 지나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였다. 정거장에서 내려 천신만고끝에 시모노세키 항 여객터미널까지 이동하여 부산행 여객선에 올랐다. 전쟁의 최후 말기 이니 그 위험은 말 할 수도 없었다. 군함은 물론 전쟁의 대상이므로 미 공군의 폭격과 해군의 잠수함이나 어뢰 공격으로 수없이 격침 되고 있었지만 때로는 민간 선박도 위험에 처하곤 했기 때문이다.
밀리는 사람들 속에서 모두가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손을 잡고 간신히 배에 올라 자리를 잡았다. 또 하룻밤을 뱃멀미에 시달리고 나니 어느덧 부산에 도착 하였다. 가구등 대부분의 짐은 부쳤지만 그래도 당장 입을 옷가지 등이며 가방과 보따리가 몇 개나 되었으니 아이들을 업고 손을 잡고 그 짐들을 또한 가지고 귀국 하시기가 보통 힘드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나 어머니가 모두 귀국이 힘들었다는 말씀은 하신 적이 없다. 힘들었다는 면보다는 가족이 모두 안전하게 조선으로 돌아 왔다는 안도감이 더 크셨을 것이다. 그야말로 전쟁 상황하에서 전 가족이 안전하게 귀국하였다는 것은 눈물의 기적이 아닐 수 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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