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쩍새
거치른 백두 대간이 남으로 남으로 달리다가 가지를 쳐 빠져 나온 노령 산맥에 이르면 그 웅장한 기세가 세상을 향해 적응 하는 것일까, 능선은 조금씩 둥글어 지고 골짜기들은 어머니의 품처럼 편안해져서 서해로 빠져 간다.
그 노령의 줄기중 하나가 흘러 가다 멈춰선 봉우리 하나가 산성이라고 더 많이 부르는 두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오르는 형상의 교룡산이 되었고, 백두 대간의 소백산맥 끝인 험난한 지리산 줄기와의 사이에 형성된 곳이 바로 남원 이라는 고을 이다. 남원은 안동 분지, 대구 분지와 함께 한반도의 3대 분지중 하나이며 말 그대로 주변이 산으로 둘러 싸인 고을이다. 한국인 이라면 ‘춘향전’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굳이 춘향의 정절이나 그 옛 로망스의 소설을 인용 하지 않더라도 이곳 사람들의 성품은 대체로 온유 하여 싸우는 것을 싫어 하고, 보수적인 자존심에 씨족과 혈연으로 형성된 공동체 속에서 그들의 터전을 가꿔 왔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남원은 지리적으로 군사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국가의 변란이나 전쟁이 일어나면 예외 없이 수많은 전투에 휩싸이곤 했던 지역이다. 삼한시대, 백제 시대를 거처 백제 멸망 후에 통일 신라는 남원에 대방 도독부를 두었으며 후에는 남원 소경을 설치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남원 도호부가 설치 되었고, 임진 정유 양대 왜란 중에는 진영을 두었으며 정유 재란이 끝난 후에는 전라 좌수영 이 설치 되었다. 특히 정유 재란중의 남원성 전투는 당시 일만명의 전군이 산화한 전투로 그 처참함과 기개는 오늘날 한국사 전체를 통해서도 찬란히 빛나고 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 종결을 위한 명.일 양군간의 교섭이 결렬되자, 일본군이 1597년 초부터 조선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다시 준비 함으로써 정유재란의 서막이 오르게 되었다.
일본의 조선 침공군은 육군 115,000명, 수군 7,200 명, 조선 잔류군 20,000 여명을 포함 총 140,000 명에 달 하였다. 1597년 카토오 키요마사의 1군이 부산에 상륙 한데 이어,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 2군은 웅천 으로 상륙 하였다.
1597년 8월 3일 고니시 휘하의 대장 고바야카와는 자신의 진격군을 우키타의 좌군과 모리의 우군으로 편성하여 그 좌군이 구례를 점령 했을 무렵, 남원에서는 조.명 양국군이 합동으로 성을 방어 하고 있었다. 당시 명의 부총병 양원은 6월 중순부터 7월 하순 까지 성벽을 증축 하고 방어 시설 보강에 주력 하였다.구례에서 남원으로 진출한 일본군은 그 부대를 좌우 2개 대로 나누어 각각 남원성 외곽을 포위 하고 조총 사격을 가하여 왔다.
고향집 뒷들에서 바라본 남원 교룡산(산성) 모습. 해발 580m 정도 되는 이 산은 지금은 숲이 우거저 잘 보이지 않으나 나름대로 험한 산이다. 저 숲의 밑에는 정유재란시 성벽을 무너뜨리며 최후의 일인까지 항전한 성벽 돌이 가득하다.
지금은 신역으로 옮겨가고 폐쇄된 구 남원역의 플랫홈. 어린시절 숱한 기쁨과 슬픔과 시련과 꿈을 품고 이곳에서 기차를 타고 떠나고 또 돌아오곤 하였다.
정적이 감도는 쓸쓸한 옛 플랫홈에 가을 햇빛만이 다사롭게 비추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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