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어나 저 강을 건너라

카와사키에서의 생활

Billy Soh 雲 響 2015. 1. 20. 23:08

토오쿄오에서 요코하마 쪽으로 기차로 삼십분 정도 걸리는 카와사키에서 이렇게 부모님은 일본 생활을 시작 하셨다. 딸은 일본 소학교에 들어 가고 아버지는 매일 아침 출근 하시면 어머니는 깔끔한 성격으로 살림을 하셨다.  일본 문화나 사정은 모르셨지만 부족한 부분은 아버지가 계시니 문제가 되지 않았고, 생활 하시면서 점차 주변 분들도 사귀게 되고 적응 하게 되셨다. 나라나 국제 정세는 점차 험악해 지고  있었지만 4년여 만에 새로 만나 살게 되신 두분의 생활은 더없이 단란 하고 행복했다. 


아버지의 직장과 직무는 토오쿄오뎅키(동경전기)회사 카와사키공장의 기획부 조수셨다. 지금으로 말하면 기획부의 주임이나 대리정도이셨을것 같다. 직원 2000명 정도 전원은 일본인이었고 아버지는 유일한 조선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동경전기회사는 일본 최고의 엘리트가 들어가는 회사였다.

 

남원의 시골에서 남편도 없이 대가집 안살림과 농사 뒷바라지를 하시며 고생만 하시던 어머니는 며칠 만에 환경이 변하여 일본 하이칼라의 사모님이 되셨으니 얼마나 편하고 좋으셨을까.  어쩌다 외출이라도 하실 때면  아버지는 양복 차림, 어머니는 일본 옷에 하이힐  구두를 신으시니 완전히 신분이 달라 진듯이 되었다.  일본 생활 동안 아버지는 바이올린을 배우셨으니 여가가 나시면 바이올린을 켜셨다.  또한 승마도 즐기셨는데 한번은 승마 중에 낙마 하여 허리를 다시셨다.  이때 다치신 허리 때문에 후에도 비가 오려고  저기압에 날씨가 꾸물거리면 허리가 아프시다며 평생 고생을 하셨다.  

 

훗날의 얘기지만 용순이 1991 17일부터 일본 로슈에 전근 되어 근무 하게 되었을 , 얼마간 시간이 지나 근무가 안정된 가장 먼저 가보고 싶었던 곳이 카와사키 였다. 내가 태어나기 우리 부모님은 어떤 곳에서 사셨을까 하고 언제나 궁금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일본 시대의 부모님이나 가족의 사진을 보거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무언가 없는 동경이 머리 속에 가득 했고 나도 언젠가 그런데 외국에 나가서 살아 봐야지하고 속으로 다짐 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니 바로 그곳에 가보고 싶었던 것은 당연 했을 것이다. 

 

물론 당시의 주소를 정확히 알진 못하니까 정확한 장소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카와사키가 그다지 대도시도 아니고 토오쿄오 바로 남쪽에 인접한 소도시 이니 부모님이 사셨던 분위기 만은 충분히 느낄 있었다.  카와사키는 1900 대에 들어와 일본이 급속히 산업화 되어가고 토오쿄오가 팽창되어 가자 수도에 인접한 산업 도시로 개발 되었던 곳이다. 지금은 물론 60 전의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새로운 현대적인 도시로 변모 하였지만, 그래도 가끔씩 눈에 띄는 일본 전통적인 기와지붕 목조 주택 등이 예전의 분위기를 상상케 하였다. 용순은 1월의 토요일 오후 한때를 그렇게 카와사키 산책을 하며 부모님의 생각을 하였다.

 

해가 바뀌어1942년이 되자 아들 용성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특히 자식 욕심이 많고 자식에 대한 사랑이 다르셔서 아들이 태어나자 좋아 하시는 모습은 이루 없었다.  그러나 이때 날로 악화돼가던 일본과 미국 영국의 외교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아 드디어 12 7,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관의 일본 해군 연합 함대가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 하고  선전 포고 함으로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 하였다.  일본 육군은 해군의 진주만 공격과 동시에 말레이 반도에 상륙하여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전선은 필리핀에 이어 급속히 태평양 지역으로 확산되고 일본은 매일 확성기에서 울려대는 승전의 소식에 완전히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에서 해군 연합함대기 패배 함으로서 태평양 전쟁은 일본의 패배 상황이 계속 되었다. 전쟁을 지휘하였던 육군 대본영과 해군 군령부는 매스컴의 보도를 철저히 통제하니 이러한 패전 일로의 소식을 일반인들은 알 수가 없었다. 태평양 전 해역에서 해군은 마국 해군에 밀려 전선은 계속 축소되고 육군은 과달카날의 처참한 패배를 기점으로 점차 후퇴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필리핀, 괌, 사이판에서 연전 연패하고 드디어 오키나와가 떨어지고 유황도에서 전원 옥쇄하니 이무렵부터는 미 공군의 일본 본토 폭격이 시작되었다.


이때는 토오쿄오로 이사하여 관사에 살고있던 부모님의 가족은 매일 잦아지는 미군의 토오쿄오 시내 폭격으로 불타는 시가지와 죽어가는 민간인의 처참한 상황을 눈앞에서 보고 있었다. 사회 분위기는 점점 어렵게 사회 분위기와 인심도 점점더 험악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조선의 고향 남원에서는 이미 할아버지의 조속히 귀국하라는 빗발같은 편지가 매일이다시피 재촉하고 있었지만 아버지 자신도 그러한 패전의 일본 본토 상황 속에서는 더이상 가족을 안전히 지키기가 어렵다는 판단하에 귀국을 결정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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