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은 16일부터 남원성에 대한 공세를 개시 하였다. 일본군의 일대가 남원성 동남쪽에 누거를 세워 놓고 성안을 굽어 보며 조총 사격을 가하여 방어군의 주의를 집중 시키는 사이에, 또다른 일대는 성밖의 해자를 메우고 성벽을 기어 올라 성안으로 몰려 들어 갔다. 그리 하여 이날밤 마침내 일본군은 명군이 지키고 있던 남원성 남문과 서문을 돌파 한데 이어서 동문을 점령 하고, 북문을 방어 하는 조선군 진영을 포위 하였다.
북문을 지키던 전라 병사 이복남, 방어사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 구례현감 이원춘 등은 사력을 다해 싸우고 최후의 순간이 되자 장병이 모두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그속으로 뛰어 들어 함께 순국 하였다.
이때 같이 순국 하지 못한 일대가 급히 성을 빠져나와 교룡산성으로 철수 하여 마지막 결사 항전의 태세를 갖추었다. 연이어 일본군이 밀어 닥치자 마지막 순간에 힘이 미치지 못함을 깨닫자, 산 아래쪽 으로부터 쳐 올라온 적군이 거의 성벽의 목전에 다달았을 때 일제히 산성의 성벽 돌 들을 무너뜨리고 굴러 내려 수많은 적군을 깔려 죽게 하였다. 그러나 이윽고 다시 추스려 공격해온 적군앞에 최후의 한사람 까지 항복 하지 않고 싸우다 장렬히 산화 하였다. 우리 선조들의 그 불굴의 정신과 용감 무쌍한 투혼을 후손 들이 잊어 서는 안될 것이다 . 역사는 돌아오고 다시 흐르나 그 빛나는 정신 만은 길이 기려 져야 한다.
남원성이 떨어졌다는 소식에 장수들이 도망가버린 전주성은 빈 껍질처럼 떨어져 일본군의 북상을 한동안 막을 수 가 없게 되었다.
용순은 1951년 9월 2일, 교룡산을 마주 바라보는 그곳 남원시 내척동 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일제의 행정편제 하에서1931년부터 남원군 왕치면 내척리 이었으나, 1955년 남원읍에 편입되었으며, 1981년 남원시가 되었다. 기존 남원시내의 북쪽에 위치 하며 교룡산성의 동쪽에 좁다란 시내와 옥답들이 펼쳐지고 골짜기가 아름답게 어우러진 평화로운 마을이다.
진주 소씨의 분가 일족은 본래 지금의 남원시 사매면 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었으나, 1700년 무렵 용순의 9대조가 되는 一 자 請자 할아버지께서 솔가 하여 내척동으로 이주 하였다고 한다. 거기에서 다시 내려와 5대조가 되시는 鑑자 永자 할아버지가 실제 현재의 집이 남아있는 내척동 464번지에 용순의 집안을 처음 일구신 분이다. 1825년에 태어나서 1845년 무렵에 결혼하여 따로 살림을 나신 이 5대조 할아버지는 신혼에 살림이라곤 달랑 할아버지 할머니의 숫가락 젓가락 뿐이었다고 한다. 살림을 일구려는 의지가 얼마나 강했던지 할아버지는 밤낮을 모르고 일하시고, 할머니는 낮에는 일을 도우시고 밤에는 밤새 길쌈을 하다가 새벽이 되면 그 화로 불을 다시 살려 새벽일을 나가시는 할아버지의 아침을 지어 드렸다 한다. 그래서 점차 논을 사들였다. 그 뒤를 이어 1848년에 태어나신 고조 할아버지 秉자 八자, 1869년에 태어 나신 증조 할아버지 斗자 燮자 할아버지 대에 이르러서는 일대에서 부자 지주 소리를 듣고 살게 되었다. 내척리 일대의 옥답은 물론이려니와 지리산 밑 달궁등 멀리 있는 토지의 일부는 토지개혁이 끝난 1950년대 용순의 어린 시절 까지도 남아 있었다.
1888년에 태어나신 용순의 할아버지는 그 윗대의 할아버지들 과는 달리 풍류객 이셨다. 호를 취헌(翠軒) 이라 하시고, 벼슬에 나서진 않으셨지만 한학에 조예가 깊으셨고, 살림을 더 늘리시는 것보다는 풍류 가무를 더 즐기셨나 보다. 용순의 아버지 基자 化자 께서는 1914년에 태어나 1934년 용정리 부자집의 막내 따님인 동갑의 愛자 順자 어머님과 결혼 하여500여평되는 464번지 대지의 아랫쪽에 새로 기와집을 성주 하여 신혼살림을 하시고,집안에서 처음으로 이리 공업 학교 전기과에 유학 하여 신학문을 배우셨다. 일제의 식민지 정책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다.
학교를 마치신 아버지는 1937년 말 작은 아버지의 병을 치료 하신다며 동생을 데리고 일본으로 가셨다. 작은 아버지는 당뇨병 으로서 당시의 의술로는 거의 치료가 어려운 질환 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작은 아버지는 끝내 일본 땅에서 회복을 못하신 채 돌아 가셨으니, 이미 형님도 돌아 가시고 동생마져 이국 땅에서 잃게된 아버지의 비통한 심정이야 이루 말할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절망을 딛고 아버지는 다시 꿋꿋이 일어 서셨다.
때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 하기전, 일본의 군국주의 팽창정책은 동아시아의 주변국 사람들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중일 전쟁이 발발 되어 중국 전선은 확대 일로를 치닫고 있었으며, 아시아 에서의 이권을 둘러싼 미.영 세력과 일본의 경쟁은 머지 않아 대 전쟁이 터질 것 같은 전운이 험악 하게 감돌고, 일본 국내의 경제도 전시 체제 하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때이니 취직 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는 익히 짐작 할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차별 받는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로서야 이국에서의 삶의 어려움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1940년 초 토오쿄오 뎅키(東京電機) 카와사키 공장 기획부 조수로 채용 시험에 합격 되었다. 당시 그의 전기분야의 지식 및 기술과 완벽한 일본어 실력이 채용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 한다. 당시 아버지의 모습은 키가 훌쩍 크시고 몸은 유도로 단련 되어 탄탄한 근육질에, 사진을 보면 양복을 빼 입으시고 원형 안경과 상의 포켓엔 행커치를 꽂으신 멋쟁이 셨다. 토오쿄오 뎅키는 후에 시바우라 뎅키(芝浦電機) 와 합병되어 오늘날의 토오시바(東芝)가 되었다.
어머니는 남편이 떠나신 후에 4년을 시부모님을 모시고 큰딸과 함께 사셨다. 일을 해도 재미가 없고 모든 것이 힘들기만 하였다. 행여 언제나 일본으로 가신 남편이 일이 잘되어 나와 딸을 부르려나, 일구월심 그 생각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날이 새고 해가 가도 일본으로 들어 오라는 기별은 없으니 어머니의 상심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더더구나 어머니의 아버지를 의지하고 그리는 정은 특히 각별 하셨으니 시어머니를 모시고 그 대농의 살림을 거드셨던 어머니의 힘든 나날의 생활은 눈앞에 보이는 듯 하다.
매일같이 “ 난 죽어도 남편한테로 갈 거 예요. 여기서 이렇게 혼자는 못살아요” 하고 불만이 점차 커져서, 혼자라도 기어코 일본으로 찾아 가겠다는 어머니와 참고 살기를 바라는 시부모님의 의견 충돌은 점차 잦아 져서 나중엔 할머니 할아버지도 말리실 수 가 없게 되었다. 일본에 계시는 아버지도 어찌 할 수가 없으셨는지 드디어 그러면 딸과 함께 들어 오라는 연락이 왔다. 1941년 6월 이제 막 녹음이 우거지기 시작 하는 초여름 이었다.
아버지는 물론 그간에 이국에서 그토록 살려 보려고 애쓰셨던 동생을 잃고 갖은 신고를 다 겪으셨지만, 작년에 훌륭한 회사에 안정된 직책으로 취직이 되셨으니 이젠 어느 정도 가족을 부를 만큼 나름대로 생활도 안정이 되셨다. 회사는 이천명의 직원 전원이 일본사람이고 아버지는 유일한 조선 사람 이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상사로부터도 신뢰 받고 모든 동료들이 너무나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주어서 혼자 생활 하셨지만 그런대로 불편 없이 즐겁게 일 하고 계셨다.
일본으로 들어 오라는 연락을 받은 어머니는 너무나 기뻤다. 유교의 봉건적 분위기가 아직도 사회를 지배 하고 있으니, 물론 요즘처럼 신혼 생활이니 뭐니 찾을 계제는 아니었지만 결혼 후 남편과 제대로 살아 보지도 못한 어머니로서는 아버지의 결정과 시부모님의 허락이 그야말로 얼마나 설레고 들뜨셨을지 상상 하고도 남는다. 7살이 된 큰딸 봉순은 금년에 이미 왕치 국민 학교에 입학 하여 몇 달이 지났으나 어머니는 딸 학교 문제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건 같이 들어만 가면 아버지가 다 알아서 하실 일 이라 생각 하고, 즉시 일본으로 떠날 준비를 하셨다. 준비라고 해봐야 무슨 변변히 할것도 없었다. 입을 옷가지와 당장에 필요한 생필품들을 꾸리고 정리 하여 유월 말경 딸을 데리고 출발 하였다. 남원역 에서 전라선 기차를 타고 여수에 도착 하였다. 여수 부두를 찾아가니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오늘은 여수. 시모노세키 간의 정기 연락선이 출항하는 날이다. 가뜩이나 궁핍해진 식민지 사정에 전운이 무르익어 가니 생활의 어려움은 이미 피폐 할대로 피폐하여 가족과 헤어져 객지로 벌이를 떠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웅성거리고 모여 안타까운 이별을 나누는 사람들, 기약 없는 다가올 일들이 불안 하여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머니는 이렇다 할 여행도 해본 적이 없어서 토오쿄오 까지 무사히 찾아 갈수 있을지 불안하긴 하였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 과는 달리 일본에서 어엿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남편이 불러서 가는 것이니 가슴은 뿌듯하고 시간은 너무나 느린 것만 같았다. 사람들에 휩싸여 딸의 손을 꼭 잡고 배에 올랐다.
이윽고 “ 부-웅- 부—우 ㅇㅇ” 하고 낮은 소리의 뱃고동이 길게 울리더니 바다위로 배가 미끌어져 여수항은 점차 멀어져 가기 시작 하였다. 뱃멀미를 참아가며 꼬박 하루를 현해탄의 파도에 시달리고 나니 시모노세키 항에 도착 하였다. 그래도 어떻게 물어 물어 정거장으로 찾아가 토오쿄오행 기차에 타게 되었다. 기차에도 사람은 많고 힘들었지만 이제 하루 밤만 더 지나면 남편을 만난 다는 생각에 힘든 줄도 몰랐다. 거기다 어머니는 원체 강단 있는 분이라 여행의 피곤 정도는 힘드는 축에 끼지도 않는 분이다.
물론 아버지는 아내와 딸의 여행 일정을 체크 하고 계셨으므로 여수에서 배가 떠나는 시간 과 시모노세키에서 기차가 출발 하는 시간을 이미 알고 계셨다. 하루 밤을 새우며 기차는 동쪽으로 달리고 달려 후쿠오카, 코오베, 오오사카, 나고야를 지났다.
어머니는 이제 내릴 때가 가까워져 가니 아버지를 잘 만날지 마음이 조금 불안 해지기 시작 하였다. 만일에 만나지 못한다면 토오쿄오 역에서 내려 무작정 그 자리에 서서 아버지가 오실 때 까지 기다릴 생각 이었다. 기차가 요코하마에서 정차 하였다가 이제 막 출발 하였다. 기차가 달리는데 문이 열리더니 갑자기 아버지가 두리번 거리며 들어 오시는 게 아닌가.. 그를 본 어머니는 정말 가슴이 터질듯이 기뻤다. “여기요 여기… “ 하고 부르시니 이곳 기차 안 에서 부부와 딸은 몇 년 만에 남편과 아버지와 극적인 상봉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안타깝게 그리다가 만나게 되었으니 정말 꿈만 같았다. 모든 지난날의 어려움도 눈 녹듯 사라져 버린듯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안도의 한숨만이 나왔다. “ 그래도 잘 찾아 왔구나” 하고 아버지가 칭찬해 주시니 어머니는 더 기뻤다.
아버지는 조선의 시골에서만 사신 어머니가 일본까지 제대로 찾아 오실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미리 그 기차에 타고 찾을 생각으로 마중을 나오신 것이었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배려, 그리고 그 치밀 하신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다. 훗날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평생을 두고 그 말씀을 하셨다. “내 평생에 살면서 그 순간처럼 좋았던 때는 없었다. 참 그때가 좋았다” 라고 옛날 얘기만 나오면 늘 얘기 하셨다.
1940년 부모님과 누님 3인 가족의 일본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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