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blog.daum.net/34711/15250718
눈 내리는 저녁
홍윤숙
눈 내리는 저녁길엔
목화꽃 지는 냄새가 난다
할머니 옛날 목화솜 자으시던
물레 소리가 난다
한밤에 펼치시던 오색 조각보 속
사각사각 자미사 구겨지는 소리 나고
매조 송학 오동 사꾸라
유년의 조각그림 몇 장
떨어지는 소리도 난다
어디서 그 많은 이야기를 실어오는지
어디서 그 작은 소리들을 풀어내는지
눈 내리는 저녁길엔
눈 덮인 고향집 낮은 굴뚝담 위
굴뚝새 푸득푸득 날으는 소리 나고
한 필 삼팔명주 하얗게 삭아내린
매운 세월 넘어
어머니 젊은날 혼자서 넘으시던
오봉산 골짜기 눈에 묻힌 길
수묵으로 풀어내는 한오백년
쇠락한 세한도가 있다
사십 년 걸어도 닿지 못한 나라
눈 내리는 저녁길엔
문득 그 나라 먼 길을 다 온 것 같은
내일이나 모레면
그 집 앞에 당도할 것 같은
눈 속에 눈에 묻힌 포근한 평안
더는 상할 것 없는
백발의 평안으로 잠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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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할머니와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일 어린시절 어렵게 자라나 그러한 회상과 그리움이 없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안타깝고 슬픈 일인가. 홍윤숙 시인은 눈내리는 겨울밤에 그리운 할머니와 어머니의 추억을 담아내 독자로 하여금 자신만의 추억속으로 인도해 간다. 목화꽃이 지는 냄새와 같은 후각적 인상은 페이브먼트의 도시 생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전원의 그리운 풍경이다. 나는듯 안나는듯 신선한 샘물 냄새와도 같은 은은한 향이 목화꼿 향기이니 그 속에서 할머니의 모습을 회상하는 것이다.
물레소리 화투소리 굴뚝새의 나는 소리와 같은 청각적인 추억은 이미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는 소리이다. 겨울 밤에 들려오던 그 소리 속에서 홀로 되셨던 어머니의 한과 눈물에 얽힌 추억을 회상하며 시인은 이제 더없이 포근한 평화와 사랑을 느끼는 것이다.
나 또한 서너살 무렵부터 동생 태어나 밀린 어머니한테 간다고 울던 나를 업어 달래 주시던 할머니의 기억이 있다. 일곱 여덞살이 되었을 때는 6.25 전쟁후의 어려움 속에서도 섣달 그믐날 밤이면 언제나 사주셨던 곤색 양복과 내복등을 가지런히 놓게 하시고 설날 첫 아침에 일찍 일어나 갈아입게 하셨던 어머니 모습이 어제처럼 눈에 선하다. 그리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중학생 무렵의 겨울 밤이면 아버지와 함께 쓰던 사랑방에서 어두운 불빛에 공부를 하다가 졸고 있을때 땅콩이나 곶감, 오징어채등을 들고 눈쌓인 마당을 건너 들어오셔서 '이거 먹고해라. 졸지말고' 하셨다. 인생의 파도에 삶이 지칠때, 누구에게도 위로받을 수 없는 실망과 슬픔이 몰려올때 어린시절의 그 부모님 말씀과 모습처럼 위로가 되는 추억과 회상은 없었다. 오늘밤에도 그때처럼 창밖엔 겨울바람이 스친다.
<운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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