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사도세자(장조)의 죽음과 정조의 한
국가 권력을 통째로 거머쥐고 무소불위의 전횡을 휘두르는 노론세력은 왕권마져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권력 다툼 속에서 영조는 세자인 사도세자 마져 뒤주에 가둬 죽일 수 밖에 없었다. 세손때 썼던 '존현각 일기' 에서 정조는 "뒤주에 갇혀 승하하는 아버님를 보면서도 힘이없어 어찌 할 수가 없는 자신이 한스럽다"며 이를 악물어 복수심을 불태웠다. 영조가 82세 되던해 1775년 11월 모든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세손 이산에게 왕위를 물려 주겠다고 하교를 내리는데 노론의 홍인한은 승지의 기록을 찢어 버리고 존엄한 왕명을 거부하며 횡포를 부리니 정조 이산은 일찍부터 이 냉엄한 현실을 보고 경험하였다.
존현각 일기에 세손 이산은 이렇게 기록했다.
"내가 이렇게 일기를 쓰는 것은 지금 당하는 핍박을 후세에 전하여 알게하기 위해서이다. 신하가 임금을 만날때도 몸을 구부리지 않았고 신발끄는 소리를 탁탁내며 전혀 삼가고 두려워는 뜻이 없었다. 흉도들이 심복을 널리 심어놓아 밤낮으로 엿보고 살펴 위협할 소재로 삼았다. 두렵고 불안하여 차라리 살고 싶지 않았다. 사관이 기록도 못하는 지경이었다. 홍인한의 권세가 나라보다 더 대단했다." 이러한 상황을 곁에서 보며 정조 이산은 힘없는 왕의 설움과 개혁의 필요성을 뼈져리게 인식 하였던 것이다.
사도세자를 죄인으로 몰아 죽인 노론 세력은 그 아들 이산이 왕이 되면 자신들이 멸문지화를 당할것을 두려워하여 어떻게 하든지 세손 이산이 왕위에 오르는 것은 막아야겠다고 갖은 획책을 다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지독한 반대와 곡절에도 불구하고 1776년 3월 10일 이산은 드디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왕이 되자마자 이산의 일성은 "寡人, 思悼世子之子也(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였다. 후에 정조 실록에 기록된바, 부왕이 뒤주속에서 승하하실때에 곁에서 희롱하였던 포도대장 구선복을 대할때마다 '심장과 뼈가 떨렸다. 손으로 찢어 죽이고 살점을 씹어 먹어도 부족할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정조 즉위초에도 자객이 3번이나 궁궐을 침입했고 정조의 침실까지 침투한 적도 있었으니 정조는 스스로 살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노론의 번득이는 감시의 눈을 기술적으로 피하며 명분을 만들어 창설하였던 것이 '장용영'이다. 정조는 총 37번의 무과를 치뤄 18세기 조선의 전설적인 일당백 무사 백동수 외 30명으로 정조의 호위 군대 '장용영'을 만들었다. 그들에게 하루 3,000발의 활을 쏘게하고 사도세자가 완성한 십팔기로 무장케 하였다. 정조는 권문세가 소속의 충성심 없는 호위군을 폐하고 30명으로 출발한 장용영은 18,000명까지 늘려 나가며 10년을 넘게 군권을 강화하여 강력한 무인군주가 되었다.
뿐만아니라 정조는 스스로 활의천재 신궁이였다. 145m의 표적을 5발을 1순으로 10순 그러니까 50발을 쏘아 50발을 다 맞췄다. 표적이 너무 커 작은 부채, 곤봉에 쏘는데도 작은 부채는 5발쏘아 4발, 곤봉에10발쏘아 10발을 다 맞췄다고하니 가히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신궁술이었다. 또한 진법 전술에도 심취하여 '병학통'이라는 진법서를 편찬해서 규장각 학자 정약용,이덕무등으로 진법을 익히게 하였다. 뛰어난 무예 실력으로 군권을 장악한 정조는 평생 숙원사업인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의 명당 '현륭원'으로 옮기고 사도세자를 죽게한 심환지,김종수,이병모 등 노론대신들을 묘앞에 세우고 정조는 오열하니 노론 신하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잔디와 흙을 움켜잡고 울어 손톱이 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다.
노론은 종로 북촌에 권문세도가를 형성하여 살면서 권력만 좌지우지하는게 아니라 상권을 쥐고 이익을 독점하고 백성을 곤궁케 했다. 정조 18년 수원 팔달산에 올라 수원성(6Km)을 지으라 하고 수원을 요즘의 신도시, 상업도시 군사도시로 발전시켜 노론세력의 바탕을 약화 시키려 하였다. 수원성에는 장용외영 6,000명을 상주 시키며 요새를 만들었다. 정조19년 6,000여명의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화성에 행차하여 전시도 아닌데 임금이 황금갑옷을 입고 친히 군사를 조련하고 호령하며 노론세력에게 무력시위를 하며 품고있는 깊은 뜻을 펼쳐나간다. <운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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