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일본 군대의 경복궁 포위
새벽 2시경에 별군관에게 고종의 호위경관 2명이 달려와 삼군부(광화문 앞 경비실)에 일본군과 조선군 훈련대가 운집해 있다고 보고하자, 현흥택 정령은 즉시 궁궐 경비병 여럿을 광화문으로 급히 보내 상황을 확인했다. 시간이 지나 새벽 4시 무렵에 조선군 훈련대 대대가 춘생문(경복궁 동북문)과 추성문(경복궁 서북문)을 포위하였다고 현흥택 정령은 증언했다.
고종황제 시위대의 훈련교관이었던 미국인 다이와 러시아인 건축기사로서 황제 경비원으로 근무했던 사바틴은 이학균 부령으로부터 보고받자마자 일어나 별군관실로 갔으나 2명의 부령과 최소한 6-7명의 당직 장교가 야근하고 있어야 함에도 그곳에는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고 사바틴은 증언했다. 그들은 이미매수되었거나 피신해버린 상태였을테니 이 또한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또한 고종은 이미 새벽 4시 반 전후로 궁궐이 소란함을 알고 있었으며, 명성황후는 위험한 침전인 옥호루를 떠나 은신하였으리라 여겨지나 궁궐을 벗어나지는 못했으리라 생각했다.
고종은 일본군이 궁궐을 포위했다는 급보를 받고 이범진에게 시간을 다투어 미국 공사관과 러시아 공사관에 뛰어가 도움을 요청하라고 명령했다. 이범진은 일본인 순찰을 피해 높이가 4-5미터인 담에서 뛰어내려 궁궐을 탈출하였다. 미국 공사관에 도착했을 때 대궐 쪽에서 첫 총성이 들려왔다고 이범진은 증언했다. 이범진은 미국공사관을 거쳐서 러시아공사관을 찾아가 궁궐이 일본군에 포위되었음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했다.
사바틴의 증언에 의하면 사건 전날인 10월 6일 밤에 조선군 훈련대와 일본군이 대궐 앞에 모여 소란을 피웠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그는 당일 밤에는 음모가 있으리라는 정보도 중국인으로부터 사전에 입수했다.
그런데도 안이하게 생각하고 대책을 세우지 않다가 결국 대궐이 포위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3.2 경복궁 진입
새벽 4시 30분경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받은 조선군 약 250-300명이 일본인 교관 4-5명의 인솔을 받으며 뭔가 상의하였다. 그 뒤 한 조선인이 큰소리로 대문을 열어 달라고 몇 번 외쳤다. 새벽 5시 무렵 흥선대원군 일행이 광화문 앞에 이르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본 수비대 제3중대가 미리 준비한 긴 사다리를 건네고, 일본 순사들이 담을 넘어 빗장을 풀었다. 광화문을 지키던 황궁 경비병과 순검들이 저항하여 총격전이 벌어졌다. 일본인들을 막으려고 나왔던 홍계훈은, 일본인에게 호통을 치다가 일본 수비대가 쏜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또한 담을 넘은 일본인 폭도들이 궁궐 경비병에게 발포하자, 경비병은 무기와 군복상의를 벗어던져 버리고 초소를 떠나 어디론가 달아나기도 했다.
한편 일본 낭인 깡패들은 남쪽의 광화문, 동북쪽의 춘생문, 서북쪽의 추성문 등 3개의 문으로 침입하였다. 광화문이 열리자 일본군이 소리를 지르며 북쪽의 건청궁을 향해 돌진했다. 3백-4백여 시위대가 연대장 현흥택과 교관 다이 장군의 지휘를 받으며 총격전을 벌였으나, 갑오경장 때 우수한 무기를 빼앗겨 일본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명성황후가 기거하던 건청궁까지 다가온 흉도들은 대오를 맞추어 합문을 포위하고 파수를 보았다. 자객들은 전당으로 들어가 밀실을 수색하기 시작했고, 흥선대원군은 근정전 뒤 강녕전 옆에서 기다렸다.
훈련대 군인들은 건청궁 앞마당에서 쉬며 황후 시해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또한 사바틴은 궁궐 안에서 수비하던 도중 폭도와 환관, 벼슬아치, 궁노 등에게 떠밀렸다가 일본인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자신의 원래 직업이 건축가임을 밝히고 호위를 요청했다고 한다. 그 뒤 그곳에 서서 사건을 목격하다가 명성황후 시해에 앞서 두들겨 맞고 현장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3.3 명성황후 시해
궁 안의 상황과 일본 낭인 깡패들의 궁 안에서의 행동은 자료와 증언마다 차이가 있다. 러시아인 건축기사 사바틴이 고종을 호위하고 있었는데, 궁전 뜰에서 일본인의 행패를 목격했다. 시위대 교관이던 미국인 다이(Dye)도 시위대를 지휘하면서 궁 안에서 이 참상을 목격했다. 사바틴과 다이는 둘 다 일본 군인들에게 폭행을 당했는데, 뒷날 일본인들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하는 증언을 하였다.
일본 낭인 깡패들은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명성황후의 처소를 대라고 윽박지르는 등 난폭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궁녀들은 두들겨 맞고 내던져짐에도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건청궁 동쪽 곤녕합에서 황후를 찾아냈는데,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두 팔을 벌려 황후 앞을 가로막고 나서다가 권총을 맞고 쓰러졌으며, 이어 한성신보 신문기자 히라야마 이와히코가 다시 일본도로 두 팔을 베었다. 흉도들은 궁녀들 사이에 숨었다가 도망치는 명성황후를 쫓아가 그녀를 마룻바닥에 넘어뜨려 내동댕이친 뒤 구둣발로 짓밟고 여러 명이 일본도로 난자 하였다.
당시 현장 상황은 총칼이 난무하고 앞을 가릴수 없는 비명과 아수라장의 사변이었으니 황후의 시해 상황은 목격자의 위치와 시각에 따라 차이가 있다. 에조가 쓴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군인들은 황후를 죽이기에 앞서 능욕했다는 주장이 있다. 황후의 호위 대신과 궁녀들을 베고 황후를 찾아내 쓰러뜨린후 여러명이 군화 발로 짓밟아 거의 절명 지경이 된 황후를 칼로 난도질 치고 옷을 다 벗겨 국부 검사를 한다며 그중 어떤 놈이 황후를 시간했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나찰의 만행이었으니 차마 듣기만 하여도 소름이 돋고 머리털이 곤두서는일 아닌가.
대한의 피를 받은 열혈 남아라면 이 말을 듣고 그놈들의 후손의 생간을 씹어도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역사의 분노를 우리는 삭이며 양국의 미래를 전향적으로 열어가려는 것 아닌가. 그 와중에 현재의 아베 신조등 일본의 지도자들은 나날이 극우화로 치달으며 역사의 수레바퀴를 다시 되돌리려는 망상에 젖어있는 것이니 이 어찌 또다시 통탄할 일이 아니랴.
대한 제국의 명성황후가 절명한 시각은 사바틴이 현장을 떠난 지 20-30분 뒤인 10월 8일 아침 6시 전후로 여겨지나, 절명한 곳이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본 낭인 깡패가운데 황후를 마지막으로 숨을 끊어 죽인 사람으로 자주 지목되는 사람은 데라자키 다이키치이다. 그밖에도 나카무라 다테오, 후지카스, 쿠니토모 시게아키등의 낭인 깡패 집단과 미야모토 소위, 마키 등의 일본 군인들이 황후의 침실에 난입하여 칼을 휘둘렀기 때문에 누가 범인인지 한사람으로 지목하기는 힘들다는 지적도 있다.
미우라 일본 공사는 새벽에 고종을 면담하기 위해 궁에 들어간 뒤 황후의 시체를 직접 확인하고 나서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오기하라에게 급히 화장하라고 지시했다. 흉도들은 문짝을 떼내 시신을 그위에 얹어 이불을 덮고 건청궁 동쪽 녹원 소나무 숲속으로 가져간 다음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석유를 뿌려 태웠다. 날이 밝은 뒤 타다 남은 유골을 궁궐을 순시하던 우범선이 발견하여 연못 향원정에 넣으려고 했으나, 훈련대 참위 윤석우가 혹시 황후의 시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를 수습하여 멀리 떨어진 오운각 서봉밑에 매장했다. 뒷날 친일 내각은 윤석우, 군부협판 이주회, 일본어 통역관 박선 등을 무고하게 반역죄 또는 불경죄로 사형에 처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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