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일본 정부가 파견한 미우라 고로 공사의 치밀한 시해 준비
최초로 명성황후 시해 계획을 세운 이노우에 공사는 사변 한달전 일본으로 귀국하고 후임으로 부임한 미우라 고로 공사는 사변의 5일전인 10월 3일(음력 8월 15일) 일본 공사관 지하 밀실에서 비밀 회의를 열었다.실무 준비는 미우라의 참모였던 시바 시로였는데 그는 하버드 대학과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엘리트였다. 그는 조선에 나와 있는 일본의 극우 낭인 깡패 조직인 천우협과 현양사소속 조직원들과 긴밀하게 협의하면서 미우라를 보좌하였다. 그들은 조직 폭력 깡패 조직이기 때문에 한번 지시 받은 임무나 목적은 목숨을 버리더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완수해 내는 조직이었으며, 특이하게도 고급 지식인 출신이 많았고, 심지어 동경제국대학 출신도 있었다 한다. 따라서 이들은 직업적 정치깡패가 아니라 고도로 의식화된 지식인 테러리스트였다는 것이다.
시해 폭거를 위한 그날의 비밀모의에 참가자는 일본 공사관 일등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 궁내부 및 군부
고문관오카모토 류노스케 육군대위, 영사관보 호리구치 구마이치, 그리고 공사관 무관이자 포병 중좌인 구스노세 유키히코였다. 그밖에는 공사관 직원에게도 비밀 유지를 위해 일체 비밀로 하였다. 우치다 사다쓰치 일등영사도 이 모의에서 빠졌었다.
이 비밀 모의의 내용은;
첫째, 시해의 주역은 일본 낭인 깡패가 맡고, 외관상으로는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의 반란으로 꾸밀것. 이 일은 청일전쟁 직후 갑오경장때 일본 군인의 궁궐 점령을 지휘했던 오카모토 대위가 맡는다.
둘째, 일본인 가담자는 낭인 깡패, 일본 수비대 군인, 일본 공사관 순사로 구성한다. 이때 낭인 깡패 조직 책임은 한양에서 발행하는 일본인 신문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 겐조가 맡았다. 아다치는 큐슈와 쿠마모토 현 출신 낭인 깡패 30여 명으로 폭거 실행단을 조직하고 한성신보 주필 구니토모 시게아키, 편집장 고바야가와 히데오, 기자 히라야마 이와히코, 사사키 마사유키, 키쿠치 겐조 등의 민간인도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민간인의 참여는 폭거가 만일 세상에 알려졌을 경우를 대비하여 공사관이나 일본 정부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기위한 목적이었다.
셋째, 일본 수비대와 순사및 조선인 훈련대의 운용은 일본 공사관이 책임진다. 따라서 그 지휘를 위하여 공사관 무관인 쿠스노세 유키히코 등이 참여한하였던 것이다.
넷째, 거사일은 10월 10일 새벽으로 한다. 미우라는 황후 시해 폭거 작전명을 '여우사냥'이라고 불렀으며, 예상보다 일찍 훈련대가 해산되자 거사 일시를 10월 8일 새벽 4시로 앞당기게 된다. 즉 통행인과 목격자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폭거 시간을 새벽 4시로 정했으나 흥선 대원군을 거사의 주도자로 조작하기 위해서는 늦어도 새벽 3시까지는 흥선대원군을 대동한 흉도들이 경복궁에 진입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 대원군이 공덕리 별장을 떠난 때는 새벽 3시였고, 경복궁에 도착한 때는 새벽 5시가 넘어서였으며, 명성황후가 시해된 시간은 아침 6시경이었다. 그래서 궁내 재 외국인등 많은 목격자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흥선 대원군은 결국 일본 폭거 조직에 이용당하는 꼴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3. 황후 시해 폭거의 진행과정
조선 정부가 훈련대의 해산을 명령한 때는 10월 7일 새벽 2시였다. 이에 군부 대신 간적 안경수가 9시경 급히 이 사실을 미우라에게 통보하고, 뒤이어 우범선도 달려와 미우라에게 보고했다. 이에 미우라는 거사 날짜를 그날 밤으로 바꾸고 스기무라와 의논한 뒤 오카모토를 불러들였다. 오카모토는 10월 6일 대원군을 만난 뒤 일본으로 가는 척하다가 급히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대원군은 실제로 황후에게 경고를 하는것으로 생각했지 무참히 살해 할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폭거의 총책임자인 미우라 고로 공사는 폭거 계획서인 '입궐방략서'를 영사관보인 호리쿠치 쿠마이치에게 주면서 용산으로 가 거사 준비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폭거 실행할 낭인 깡패들과 민간인 신분의 한성신보 소속 직원들은 칼 또는 총을 들고 용산으로 모였다. 또한 미우라는 오기하라 히데지로에게 영사관 순사들을 인솔하여 사복에 칼을 차고 용산으로 가도록 지시하였다.
한편, 아사야마로 하여금 군부 협판 간적 이주회에게 사실을 알리도록 하였고, 이주회가 조선인 몇 명을
규합하여 공덕리로 가도록 했다. 그렇게 그날 밤에 공덕리 대원군 별장에 모인 사람은 낭인 깡패 조직, 공사관 직원, 고문관, 순사, 기자 등 약 60여 명에 달했으며, 이들은 술에 취한 상태였고 신분을 숨기기 위하여 복장도 제멋대로였다. 폭거 범인들이 공덕리에 도착한 때는 자정쯤이었으나, 흥선대원군이 교여를 타고 떠난 때는 새벽 3시경이었다. 대원군은 그들이 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잠을 자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담을 넘어 들어가서 별장 경계병들을 모두 포박하여 가두고 옷을 빼앗아 일본인 순사들이 입었는데, 조선인으로 위장하려 함이었다. 오랜 실랑이 끝에 대원군이 집을 나섰는데, 아마도 일본인들이 대원군을 반강제로 끌어냈을 것이다. 76세 노령의 대원군이 아무리 며느리인 명성황후와 정치적 대립 관계에 있었다 하더라도 일본의 주장처럼 적극적으로 이 폭거에 가담해 횡후를 살해했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
일본인 일당이 대원군을 대동하고 서대문 근처에 이르렀을 때 간적 우범선이 이끄는 훈련대 제2대대와 합류하였다. 그러나 우범선등 조선인 간적마져도 설마 그들이 황후를 시해한다는 사실을 그때까지 몰랐다. 잠시 뒤에 장소를 잘못 알아 엉뚱한 곳으로 갔던 140여 명의 일본 수비대 제1중대가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또 시간이 지체되었다. 이때 경복궁에서는 일본 수비대 제3중대가 광화문 부근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수비대 제2중대장은 훈련대 제2대대를 인솔하고 춘생문(경복궁 동북문) 부근에 집결하였다. 그들은 새벽 2시경부터 미리 와서 경복궁을 포위하고 있다가 광화문 쪽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사방에서 궁궐 담을 넘어 명성황후가 거처하는 건청궁 쪽으로 돌진했다.
(계속)
현재의 건청궁 옥호루. 나는 오늘도 한국을 방문한 미국인 유럽인 또는 일본인 고객들에게도 이곳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소개한다. 이는 한일 양국의 건강한 미래와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 역사적 발생 사실을 모든 사람이 거짓없이 정확히 이해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운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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