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언
오늘은 10월 12일. 3일전인 9일은 한글날이었다. 그러나 4일전인 10월 8일이 무슨 날이었는지 알고있는 국민은 몇명이나 될까. 이날은 바로 을미사변일. 1895년 10월8일 아침 6시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 깡패들에게 난자당하여 무참히 쓰러지신 날이다. 한 나라의 국모가 쓰러지고 나라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러 급기야 망국의 길을 걷게 됐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날. 그날의 실상을 우리는 후손들에게 가르치고 있는가. 만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민족은 영혼이 빠져버진 민족이다. 치욕의 역사를 쉽게 망각하는자, 다시 돌아온 준엄한 역사의 칼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역사상 수도 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민족과 국가의 부침사가 웅변으로 말하고 있지 않는가. 본좌는 이 나라의 역사교육이 바로 서는날 비로소 민족의 비젼이 동력을 얻고 우리의 후손들이 흔들림 없는 확신을 안고 세계무대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을미사변 119주년을 맞아 다시한번 그날의 일들을 정리하여 후손에게 전하고 싶은것이 이 글을 쓰는 목적이다.
1883년 서양 여성으로는 최초로 명성황후를 알현한 주한 미국공사의 부인 로즈 푸트는 "뛰어난 침착성과 언제나 무엇인가를 탐색해 내려는 듯한 눈빛을 지닌 총명한 모습 "이라고 명성황후를 묘사하였다.
명성황후의 어의였던 언더우드 부인은 "그 분은 기민하고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가장 신랄한 그 분의 반대자도 항상 그 분의 기지를 당해 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또한 "피부는 너무도 투명하여 꼭 진줏빛 가루를 뿌린 듯했다.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우며 예지가 빛나는 표정이었다. 대화가 시작되어 대화 내용에 흥미를 갖게 되면 황후의 얼굴은 눈부신 지성미로 빛났다. 나는 황후의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 고 기록하고 있다. 영국의 "데일리 메일"지 조선특파원 맥켄지 기자는 "황후는 주변사람들에게는 관대했으나 적과는 타협하지 않는 강한 여성이었다"고 묘사했다. 또한 황후 시해를 지휘했던 민족의 원수 일본인 미우라 고로 공사마져도 "황후는 뛰어난 지성에 좀처럼 빈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술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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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을미사변의 배경과 원인
1884년 갑신정변 이후 민씨 일족은 개화당 세력을 밀어내며 사대당으로 다시 집권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1894년 일본의 강압으로 이루어졌던 갑오개혁으로 말미암아 명성황후의 세력이 약해지고 청일전쟁후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형세가 나빠지자 황후는 친러정책을 써서 일본 세력을 압박하였다. 즉, 을미사변의 발생당시 일본은 청. 일 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받은 요동반도를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 동맹군의 힘에 굴복해 다시 청에 돌려준 상태였고 조선 조정은 이같은 정세를 감지하고 배일 친러 정책을 실시하여 일본군을 조선에서 몰아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1895년의 임오군란 이후, 명성황후는 이완용, 민영환, 윤치호 등을 앞세워 친미, 친러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일제는 7월13일 이노우에 카오루 공사대신에 군국주의 군벌인 육군 중장 출신 미우라 고로를 주한일본공사로 임명하였다
1895년 9월 일본 공사 미우라는 명성황후의 친러정책과 정면충돌을 하였으며,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여우사냥" 이라는 작전명 아래 대러 관계를 주도하고 있던 명성황후의 암살계획을 수립하였다
일제는 조선에서 러시아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명성황후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일이 우선이라고 판단하고 방책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미우라 등은 대원군이 궁중을 감독관리하되, 내각에는 간섭하지 않으며, 김홍집,어윤중을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하되, 대원군의 측근인 이재면과 이준용을 중용할 것 등을 조건으로 대원군세력과 협조 공작을 하였다.
한편, 이와는 별도로 미우라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신문인 한성신보사의 수십명 일본 낭인 사무라이들, 일본 수비대와 경찰관들을 하수인으로 고용하고 기타 친일파들을 포섭하여 황후를 시해하려는 작전을 진행하였다.
2. 일본의 준비 과정
을미사변을 일으킨 낭인(깡패 사무라이)들
출처 http://blognara11.tistory.com/
현재 일본은 을미사변을 조선의 국내 분쟁으로 일어난사건에 일본 낭인들이 개입한 사건이라고 교육하고있다. 이는 일본의 역사적 책임을 은폐하고자하는 술책으로 그에맞는 많은 조작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그러나 2005년, 당시의 일본 영사 우치다 사다쓰지가 을미사변 두 달 뒤에 작성하여 일본 왕이 결재한 보고서가 공개되어 보다 확실한 당시의 상황이 알려지게 되었다.
을미사변은 미우라 일파가 저질렀지만, 그동안의 연구 결과에 보면, 진정한 주동자는 미우라에 앞서 공사를 지낸 이노우에 카오루를 비롯한 일본 정치의 최고 원로 및 이토 히로부미 총리를 비롯한 각료였다. 당시 을미사변을 실행했던 범인들이 일본 정부의 실권자인 원로들에게 보호 받았는지는 그들의 을미사변 거사후 출세 가도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 실상은 러시아인 건축기사 세레딘 사바틴과 시위대 교관이었던 미국인 다이(W. M. Dye) 대령이 현장을 목격하여 범인이 일본인들이라는 사실을 서양 각국에 알렸다. 반면 일본은 기록을 조작하여 황후 살해 책임을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에게 돌리려 했다.
2.1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준비
을미사변은 매우 치밀하게 준비되었다. 당시의 주한 일본 공사 이노우에 카오루 부부는 사건이 있기 한 달 전 일본을 다녀온 뒤 경복궁을 방문하여 조선 왕실의 안전을 확보한다고 약속하면서 9천 원에 상당하는 초 고가의 선물을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바쳤다고 한다. 두분의 환심을 사고 경계심을 이완시키기위한 술책이었다. 뿐만아니라, 당시 내각에서 논의하고 있던 조선 정부에 대한 차관을 지급하기로 이미 결정했다고 거짓말까지 한다. 또한 일인 고무라의 딸을 명성황후의 양녀로 삼게 하였는데, 뒤에 그녀는 명성황후의 신원을 확인하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그 수양딸과 명성황후가 궁중 연회를 보고 있을 때 친일 화가로 하여금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고 한다.
을미 사변이 일어나기 한달여 전인 1895년 9월 1일(음력 7월 15일)에는 드디어 정치 외교가인 이노우에 카오루 공사가 귀국하고 그 후임으로 육군 중장 출신 미우라 고로 공사가 부임한다. 전문 외교관이 아닌 군인 출신을 공사로 보냈다는 사실 자체가 특수 임무를 띠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익 군벌의 거두였던 미우라는 조선에 온 뒤 두문불출하고 불경을 외우면서 지냈는데,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염불 공사’였고,‘수도승 같다’라는 평을 들었다. 이또한 경계심을 풀게 하기 위한 위장술이었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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