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탕평책의 계승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하여 당쟁에 대하여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하여 영조 이래의 기본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강고하게 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노론이 끝까지 당론을 고수하여 벽파로 남고, 정조의 정치노선에 찬성하던 남인과 소론 및 일부 노론이 시파를 형성하여, 당쟁은 종래의 사색당파에서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정조가 1794년에 들고 나온 ‘문체반정’이라는 문풍의 개혁론은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도 관련되는 것이었다. 정조는 즉위 초부터 문풍이 세도를 반영한다는 전제 아래 문풍쇄신을 통한 세도의 광정을 추구하기도 하였지만, 이를 본격적으로 내걸게 된 것은 정치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으며, 탕평책의 구체적인 장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6.중인문화의 장려와 문예부흥
정조는 학문적으로 육경 중심의 남인학파와 친밀하였을 뿐 아니라 예론에 있어서도 왕권우위의 사고를 지니고 있는 남인학파 내지 남인정파와 가까웠다. 그러나 신권을 주장하였던 노론 중에서도 진보주의적인 젊은 자제들은 북학사상을 형성시키고 있었으므로 정조의 학자적 소양은 이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그리하여 규장각에 검서관 제도를 신설하고 북학파의 종장인 박지원의 제자들, 즉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을 등용함으로써 그 사상을 수용하였다. 그런데 이 검서관들은 신분이 서얼로서 영조 때부터 탕평책의 이념에 편승하여 ‘서얼통청운동’이라는 신분상승운동을 펴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임용은 서얼통청이라는 사회적 요청에 부응하는 조처이기도 하였다.
정조는 이와같이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 등 제 학파의 장점을 수용하고 그학풍을 특색있게 장려하여 나가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문화의 저변확산을 꾀하여 귀족문학 중심으로 성립되어 온 한문학의 시대에 중인이하 계층의 문학도 적극 지원함으로써 중인문화를 꽃피웠다. 때문에 이 시기를 조선시대의 문예부흥기로 파악하기도 하는데, 그 문예부흥이 가능하였던 배경은 병자호란 이후 17세기 후반의 소중화의식 고취와 이에 따른 북벌론의 대의명분 아래 국민 상하가 일치단결하여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룩한 정신적 자긍심과 조선문화의 독자적 발전에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18세기 전반에 있어 문화의 제반 분야에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으니, 이를테면 그림에서 진경산수, 글씨에서 동국진체가 그러한 것이다. 이는 조선 성리학의 고유화에 따른 조선문화의 독자성의 발로이며, 바로 이러한 축적 위에 정조의 학자적 소양에서 기인하는 문화정책의 추진과 선진문화인 청나라 문화의 수입이 자극이 되어, 이른바 조선 후기의 황금시대를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7.문화사업
정조의 업적은 규장각을 통한 문화사업이 대종을 이루지만, 이밖에도 일성록의 편수, 무예도보통지의 편찬, 장용영의 설치, 형정의 개혁, 궁차징세법의 폐지, 자휼전칙의 반포, 서류소통절목의 공포, 노비추쇄법의 폐지, 천세력의 제정 및 보급, 통공정책의 실시 등을 손꼽을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정치 문제로 되고 있던 서학에 대하여 정학의 진흥만이 서학의 만연을 막는 길이라는 원칙 아래 유연하게 대처한 점도 높이 평가할 것이다.
7.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예우
한편, 정조는 비명에 죽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와 예우 문제에도 고심하였다. 외조부 홍봉한이 노론 세도가로서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되었지만, 홀로 된 어머니를 생각하여 사면하여야 하는 갈등을 겪었고, 또 아버지를 장헌세자로 추존하였다가 뒤에 다시 장조로 추존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양주 배봉산 아래에 있던 묘를 수원 화산 아래로 이장하여 현륭원이라 하였다가 다시 융릉으로 지위를 올렸고, 그 인근의 용주사를 개수, 확장하여 원찰로 삼기도 하였다.
1800년 6월에 49세의 춘추로 정조대왕이 갑작스럽게 붕어 하였다. 이로서 왕이 추진의 주축이 되어온 모든 개혁정책은 그 동력을 잃고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뿐만아니라 가문의 이익과 권력을 독점하기위한 세도 정치 매관 매직의 암흑기로 들어감으로서 조선후기의 역사를 죽음으로 내몰고 급기야는 망국의 시기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정조대왕의 급서는 한 개인이나 왕실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의 맥이 끊어져 버렸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닌 타당한 이유이다. 왕 붕어후의 권력층이나 집권세력중에 단 한사람만이라도 선각자가 있었고 세계 정세와 열강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서구 제국이나 일본의 변화를 읽고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조선은 멸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단 한사람이 없어 나라가 망하고 민족이 겪어야 했던 죽음의 시련은 돌이킬 수 없는 한이 되고 말았으니 정조대왕의 붕어야 말로 어찌 민족의 슬픔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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