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illy의 한국사 이해

정조의 개혁과 끊어진 한민족의 기맥 - 2

Billy Soh 雲 響 2013. 9. 2. 01:28

4. 정조의 개혁정치 - 장용영의 창설과 군사개혁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국왕의 호위군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숙위소를 설치하여, 숙위대장에는 자신의 측근이었던 홍국영을 임명하였다. 숙위소는 처음에는 궁궐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했지만 점차 도성을 수비하고 군사령부인 오군영까지 총괄하는 최고 총사령부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조직상 숙위소는 병조나 오위도총부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국왕의 독자적인 직할부대였을 뿐이지만 홍국영의 권력은 숙위소의 위상을 정상적인 국방체계의 상부로 만들었다. 마치 박정희 대통령의 경호를 담담하던 대위출신의 차지철 경호실장이 장군들을 호령하고 전군에 영향력을 미쳤던 것이나, 10.26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사조직 하나회를 통하여 전군의 신경계를 장악하고 영향력을 미쳤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숙위소는 홍국영과 더불어 그 정치적 역할을 마감해야 했다. 홍국영은 정조의 즉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즉위초에도 반대파를 제거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나 그후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믿고 모든 소계, 장첩, 차제를 정조에게 올리기전 총람하는 등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 백관을 맹종하게 함으로써 최초의 세도정권을 이루었다. 정조는 1779(정조 3) 홍국영을 축출하고 숙위소를 혁파했다.

 

숙위소 혁파후 정조는 국왕 호위군 체제를 개혁하여 1782년에 장용위(壯勇衛)를 신설했다. 무예와 통솔력이 뛰어난 무관 30명으로 출발한 장용위는 1787(정조 11) 50명으로 그 인원이 보강되면서 장용청(壯勇廳)으로 승격되었고, 그 이듬해인 1788(정조 12)에는 장용영(壯勇營)이라는 새로운 확대 군사조직을 창설하여 군사개혁을 단행하였.

 

이는 왕조 국가의 무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노론과 외척세력의 위협 속에서 즉위한 정조가 개혁정치를 굳건하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친위군대가 필요했다. 장용영이 창설되면서 소위 '장용영의 시대'가 열린다. 오위 체제로부터 시작해서 임진왜란 이후 오군영(훈련도감, 총융청, 수어청, 어영총, 금위영) 중심으로 재편된 조선의 군사제도에 새롭게 '장용영'이라는 군사조직이 신설된 것이다.

 

원래 조선 초기의 군제는 오위 체제였다. 전국적으로 군사조직을 5개로 나누고 그 산하에 지방군을 편제시키는 방식의 오위 체제는 주로 북쪽 국경과 남쪽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군제였다. 그러나 남쪽으로부터 임진왜란과 북쪽으로부터 병자호란 등 실제 전쟁이 발발하자 기존의 오위 체제가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못했다. 명분상으로만 일원화된 국가 중앙군으로서의 작전권이 체계적으로 집중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 후기의 국왕들은 실제로 전쟁에 활용할 수 있는 군대조직을 하나씩 만들기 시작하여 5개의 군영이 탄생했고, 특히 인조반정 이후 왕권을 지키는 역할까지 이들 군사조직에게 부여됨으로써 조선의 군제는 오군영 체제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오군영마저도 당쟁과 무관할 수 없었다. 이들 군사조직들 또한 특정 정파의 이해관계에 긴밀히 얽혀있고 군령체제는 무질서하게 되었다.따라서 정조는 개혁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 자신을 지켜줄 별도의 군사조직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정치개혁의 결과 기득권을 상실하게 되는 외척과 권신들은 결코 설득만으로 그동안 누려온 특권을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정조는, 이들 기득권층의 저항을 분쇄할 수 있는 친위 군사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장용영을 신설했던 것이다.

 

장용영 신설과 더불어 정조는 대대적인 군제개혁에 돌입했다. 우선 정조는 조선 초기의 오위 체제를 복구하고자 했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 오군영이 설치되면서 '군사조직이 나뉘어졌음(分軍)'을 비판했다. 오군영의 등장과 더불어 군령이 일원화되지 못한 채 모든 군사적 조치가 번잡하게 되었다고 판단한 정조는 병조판서 중심의 통합적인 군령체제를 수립하고자 했다. 이에 정조는 오군영의 독자적 명령체계를 불식하고 전군을 오위 체제로 재편하는 동시에 국왕의 명령을 받아 병조판서가 전군을 지휘할 수 있도록 군제를 개혁했다.

 

정조는 군사조직의 인사권 문제에 있어서도 병조판서에게 일원화하여 실질적인 임면권을 부여했다. 당시 무관에 대한 인사에 있어서 각 군영대장에게 추천권이 주어졌는데, 정조는 이를 일소했다. 이에 따라 그 동안 군사조직에 대해 실질적인 인사로부터 소외당해 있었던 병조가 인사권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오군영의 대장들이 반발했지만, 정조는 단호하게 대응했다.

 

정조는 각 군영의 군영대장들이 단일안으로 올리던 인사추천을 3인안으로 올려 실질적으로 병부에서 선택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이후 군영대장들이 각종 편법을 동원하여 인사권을 유지하고자 했지만, 정조는 이를 엄격하게 제지함으로써 인사권은 실질적으로 병조판서에게 귀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당시까지 관례로 되어 왔던 훈련도감 출신자의 포도대장 임용을 금지시켰다. 훈련도감의 중군(都監中軍)은 자동적으로 금군별장(禁軍別將) 직을 거쳐 포도대장으로 승진했던 관례를 폐지하고 그 인사권을 병조판서에 귀속시킴으로써 군사조직의 인사권을 일원화시켰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정조의 군제개혁은 군대의 조직체계와 명령체계를 단일화함으로써 외적의 침입과 내란에 신속히 대응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사회 기강이 무너지고 분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기득권세력이 결집되어 있는 상황에서 총체적인 군제개혁은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왕권을 수호하고 개혁정치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이와 동시에 장용영이라는 친위군사조직을 강화하는 일이 정조에게는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였다.

장용영은 정조의 관심과 지원 속에서 그 규모가 꾸준히 확대되었고, 1793년(정조 17)에는 장용내영과 장용외영으로 나뉘었다
. 장용내영은 서울에 두고 장용외영은 화성에 두면서 총 병사가 3,450명에 달했다. 이는 당초 목표치였던 5,000명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장용영은 막강한 군사조직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특히 장헌(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을 호위하고 화성행궁을 수호한다는 취지에서 설립된 장용외영은 계속적으로 개편되었고 마침내 정조 22년에 수원부의 병력을 그 휘하에 흡수하여 오위 체제로 편제됨으로써 조직이 완성되었다. 또 장용영에 설치된 사무국에서는 '무예도보통지'를 완성하는 등 조선의 무예를 진작시키기 위한 사업도 추진했다.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추진한 바 있었던 무술기예를 정리하는 사업을 장용영 내에 설치된 사무국에서 추진하도록 했다.

 

검서관 이덕무, 박제가 등을 중심으로 장용영 내에서 마침내 무술기예를 24가지로 체계화하는 '무예도보통지'가 완성되었고, '병학지남(兵學指南)' 등의 군사학 서적도 인쇄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장용영의 군사들에게 다양한 새로운 무예를 보급할 수 있었고 국가 군사력은 괄목 할 만큼 강화 되기 시작하였다. 정조는 이렇게 장용영을 중심으로한 군제개혁 계획을 실행에 옮겼으며 착실히 기반을 다지면서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개혁방안을 추진해 나갔다.

 

결과적으로 국왕 중심의 일사불란한 군제를 확립함으로써 외적의 침입과 내란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자 했던 정조의 군제개혁은 그 빛을 보지 못한 채 세도정치의 와중에서 퇴색되고 말았지만, 그것이 개혁의 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정조가 했던 방식으로 군제개혁을 계속했다면 조선의 운명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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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융복(군복) 차림의 정조대왕 어진

수원화성의 화령전에 모셔져 있다. 정조는 학문에 있어서 규장각 천재 학사들을 대상으로 강론을 할 정도로 나라안 최고의 경지에 있었다. 현재로 말하면 서울대 교수들을 상대로 강의를 하였던 분이다. 무술에 있어서는 궁술, 검술, 마술이 또한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실제로 화성이 축조된 후 친히 시찰할 시에는 군왕 스스로 무예 시범을 보이고 즐기기도 하셨던 분이다. 즉, 정조 대왕은 조선왕조 27분의 군왕중 거의 유일하게 문무의 천재성을 겸비 하셨던 분이었다.

 

자신의 학문과 무예를 끊임없이 갈고 닦으셨으니 강철 같은 신체를 가지셨으나 갑작스럽게 발병한 중증 종기로 인하여 불과 49세에 붕어하시고 말았으니, 오호 통재라 하늘도 무심하신 일이었다.  조선왕조의 기상과 나아가서는 한민족의 불타오르는 기맥이 여기에서 단절 되어 버렸다고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분의 경략과 부국 강병책으로 계속 개혁 정치를 추진해 나갔더라면 우리의 근대사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펼쳐 나갔을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그분의 업적과 붕어 원인의 의문점, 그리고 갑작스런 붕어로 인한 모든 개혁 정책의 중단이 한국 근현대사에 미쳤던 영향에 대해서는 계속 공부해 보기로 하겠다.                     <운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