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조대왕은 누구인가?
정조는 조선왕조 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인 장헌세자(일명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사이에서 1752년 맏아들로 태어났다. 청원 부원군 김시묵의 딸 효의왕후를 비로 맞았다. 정조가 태어나기전 장헌세자는 용이 자신의 침실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틀림 없이 큰 인물이 될 아들이 태어날 것이로다 하며 크게 기뻐하였다 한다.
1759년(영조 35년) 세손에 책봉 되었으며 1762년 장헌세자가 당쟁의 희생양이 되어 뒤주에 갇혀 비극의 죽음을 당하자 일찍 죽은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후사가 되어 왕통을 이어 받았다. 1775년에 할아버지 영조의 지명에 의해 대리청정으로 국정훈련을 받다가 다음해 영조가 승하하자 25세로 왕위에 올라 1776년 3월부터 1800년 6월 갑자기 승하할때까지 24년 3개월동안 재위하였다.
2. 정조의 고달팠던 삶
생부인 장헌세자와 마찬가지로 정조 또한 세손으로서 숱한 위험을 겪었다. 열한번이나 시해 위험을 겪었으며 "나는 평생을 갈곳 없는 나그네처럼 살았다"고 하였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는 1760년 15세에 60세이던 영조와 혼인하였으며 그때 사도세자는 25세 였고 정조는 8세였다. 정조와는 손자뻘이었으나 나이 차이는 7세밖에 되지 않았다. 정조는 평생을 통하여 정순왕후 일파와 치열한 정쟁에 시달렸다. 정순왕후의 계략에 의하여 정조는 존현각(정조의 침전) 침입사건, 전흥문 시해사건, 장지함 시해사건등 심각한 생명의 위협에 처하기도 하였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역적지자 불위군왕(역적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 이라는 이른바 8자흉언이 전국에 퍼지기도 하였다.
장헌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인 1등 공신은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였으며 영조가 승하하자 왕실의 어른인 정순왕후는 옥쇄를 정조에게 넘겨주며 자신의 가문에 절대로 손대지 말라는 빅딜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정조의 모후인 혜경궁 홍씨의 감기가 극심하여 신료들이 문안할때 정조는 김귀주에게 늦게 연락하고 그를 흑산도로 유배시켜 버렸다. 그는 1784년 나주로 이배 되었다가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정순왕후는 그후에도 계속 정조시해를 시도하였다. 문무에 모든 신료들을 앞서는 탁월한 천재적 역량을 나타냈던 정조의 갑작스런 승하를 둘러싼 원인 규명은 아직도 학계의 논란으로 남아있다. 정순왕후의 후손인 경주김씨를 중심으로한 기존 사학파는 정조가 단순히 병사하였다는 논리이며 그외의 실사학파에서는 암살설을 주장하고 있다.
정조는 이렇게 온갖 어려움 속에서 국왕으로 등극하였으나 그는 비범한 학문과 세계의 정세를 읽는 안목으로 국가의 대계를 준비하였으며 백성을 사랑하는 수많은 정책을 구현하였다. 즉위하자마자 곧 규장각을 설치하여 문화 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자신의 즉위를 방해 하였던 정후겸, 홍인한, 홍상간, 윤양로등을 제거하고 나아가 정조의 총애를 빙자하여 세도 정치를 자행하던 홍국영마져 축출함으로서 친정 체제를 구축하는데 주력하였던 것이다.
3. 문화정치 추진
정조는 퇴색해버린 홍문관을 대신하여 규장각을 대제학의 상징으로 삼고 홍문관, 승정원, 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하면서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다. 우문지치(右文之治)즉. 학문을 통치의 기본으로 삼는다는 것과, 작성지화(作成之化) 즉, 만들어지는 것을 통해 발전을 꾀한다는 2대 정책을 규장각의 명분으로 내세워 본격적인 문화 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작성지화의 명분아래 기성의 인재들을 모아 들일뿐 아니라 참상, 참외등 참신하고 젊은 문신들을 선발 교육하여 국가의 동량으로 키우고 나아가 자신의 친위 세력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우문지치의 명분으로는 세손 시절부터 추진했던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수입에 노력하는 동시에 서적의 간행에도 힘을 기울여 새로운 활자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임진자, 정유자, 한구자, 생생자, 정리자, 춘추관자 등을 새로 만들어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으니 사서나 삼경등 당판서적을 수입하지 못하게까지 조처한 것도 이와 같은 자기 문화의 축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정조는 또한 왕조 초기에 제정 정비된 문물제도의 보완과 정리를 위하여 영조때부터 시작된 정비작업을 계승 완결하였다. 속오례의, 증보동국문헌비교, 국조보감, 대전통편, 문원보불, 동문휘고, 규장전운, 오륜행실 등은 그 결과였는데, 이와 함께 정조 자신의 저작물도 정리하여 훗날 홍재전서 184권 100책으로 정리 간행되도록 하였다(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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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인정전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정조는 24년 3개월동안 이곳에서 나라를 다스렸으며 국왕의 즉위식이나 왕실의 대행사, 외국 사신의 접견등으로 사용하였다. 위의 사진은 정면 사진이나, 나는 이곳에서 지인들이나 외국 고객들의 사진을 찍어줄때 즐겨 잡는 위치가있다. 위 사진의 오른쪽에는 계단이 있다. 그 계단을 내려와 국왕이 실제로 매일의 정치를 실시하던 선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그 문을 통과하기전 10미터 정도 비켜선 곳이 바로 인정전의 45도 각도이다. 나는 이 지점이 인정전을 가장 전체적으로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혼자서 멋대로 '사랑의 각도(Angle of Love / 愛の角度아이노카쿠도)라고 이름 붙였다. 그래서 부부나 연인들은 45도 각도로 마주서게하고 고개도 서로를 향해 45도 각도로 기울이게하고 찍는다. 우리 문화와 역사를 즐겁게 소개하려는 의도의 하나이다. 독자 여러분도 그 지점에서 한번 찍어보기 바란다. 아름다운 사랑이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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